“한-미 동맹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가치동맹입니다. 이익에 따라서 만나고 헤어지는 편의적인 계약 관계가 아닙니다. 가치에 기반해서 영원히 지속되는 동맹입니다. 서로 생각이 다른 어떤 현안에 대해서도 협의를 통해 충분히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회복력이 강한 동맹입니다.”
어제오늘의 생각이 아니다. 윤 대통령의 오랜 소신이자 신념으로 보인다. 그는 취임 직후인 2022년 5월21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대강당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 머리발언 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오늘 저는 저와 바이든 대통령님의 생각이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일치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 한-미 동맹은 이제 북한의 비핵화라는 오랜 과제와 함께 팬데믹 위기, 교역질서 변화와 공급망 재편, 기후변화, 민주주의 위기 등 새로운 도전 과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런 도전은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의 연대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미 동맹은 그러한 연대의 모범입니다.”
한-미 동맹은 1953년 10월1일 체결된 상호방위조약에 기반한 ‘조약동맹’이다. 동맹은 공동의 위협에 기반한다. 냉전 시절 한·미는 위협 인식을 공유했다. 냉전은 끝났다. 한국의 최대 안보 위협은 북핵·미사일 위협이다. 미국의 최대 위협은 중국과 러시아다. 위협에 대한 인식 격차는 정책 차이로 나타난다. ‘보편적 가치’도 정세와 국익이 반영된 개념이다. 국가는 개인이 아니다. 가치가 국익에 우선할 수 없다. _편집자
2023년 4월26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직후 대통령실은 기자단에 ‘주요 성과 보도참고자료’를 냈다. 표지 포함 39쪽 분량 자료에서 대통령실 쪽은 “한-미 정상 간 ‘세계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정의로운 한-미 동맹’ 비전에 대한 확고한 공감대를 구축했다”며 “자유민주주의, 법치, 인권 등 핵심 가치를 함께 수호해나가는 ‘가치동맹’으로서의 역할을 재확인했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실이 첫손에 꼽은 이번 정상회담의 성과는 북핵·미사일 위협에 맞서기 위한 ‘확장억제 실행력 강화’ 방안이다. 대통령실은 “‘한국형 확장억제’ 협력 방안을 △정보 공유 △공동 기획·실행 △협의 체계 등 분야별로 구체화함으로써 미국의 확장억제 실행력을 과거와 질적으로 다른 수준으로 강화했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따져보자. 먼저 한·미 양국은 핵 관련 논의에 특화된 고위급(차관보급) 상설협의체인 ‘핵협의그룹’(NCG)을 신설하기로 했다. 또 양국의 범정부적 참여 아래 실전적 시뮬레이션 훈련을 최초로 도입해 확장억제 공동 기획·실행 협력을 심화하기로 했다. 탄도미사일 탑재 핵잠수함을 비롯한 미국의 전략자산을 정례적으로 한반도에 전개해 강력한 전략적 메시지 발신을 확대하고, 이와 관련한 공조도 심화하기로 했다. 양국은 이런 내용을 담은 ‘워싱턴 선언’을 따로 발표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선언에서 “북한의 한국에 대한 모든 핵공격은 즉각적, 압도적, 결정적 대응에 직면할 것”임을 재확인했다. 이어 “한국에 대한 미국의 확장억제는 핵을 포함한 미국 역량을 총동원해 지원된다”며 “향후 예정된 미국 전략핵잠수함의 한국 기항을 통해 증명되듯, 한국에 대한 미국 전략자산의 정례적 가시성을 한층 증진시킬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의 ‘자체 핵무장론’에 대한 미국 쪽 우려를 불식하려는 조항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제 비확산 체제의 초석인 핵확산금지조약(NPT)상의 의무”를 준수하겠다고 재확인했다.
확장억제는 냉전의 산물이다. 미국 노틸러스연구소가 공개한 미 공군의 핵작전 교리 관련 문건(2009년 5월7일)을 보면, “냉전 기간 미국은 소련이 동맹국에 대한 공격을 하면 핵무기로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위협함으로써 동맹국에 안보를 제공했다. 보복위협에 기반한 이 정책은 지금 ‘확장억제’로 불리는 개념의 토대가 됐다”고 적혔다. 실제 냉전 시절인 1978년 열린 제11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 공동성명에서 처음 명문화한 ‘핵우산’은 2006년 같은 회의 때 ‘확장억제’란 표현으로 대체됐다.
이어 미 공군 문건은 “확장억제는 여전히 미국 정책의 중요한 기둥으로 남아 있지만, 21세기에 이를 적용하는 것은 냉전 시절과는 전혀 다르다”며 “이제 확장억제는 보복공격보다는 미국이나 동맹국에 대한 공격을 통해 이루려는 정치·군사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점을 확신시킬 수 있는 태세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미국의 확장억제는 전세계 주요 지역에서 일간 단위로 투사된다. 전진 배치된 자산과 미 본토에 배치된 핵전력의 장거리 투사 능력을 통해 동맹국의 안전을 보장하고, 적을 억제하는 효과를 거둔다”고 덧붙였다.
그러니 ‘워싱턴 선언’을 통해 미국의 확장억제가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대통령실 주장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전과 ‘질적으로’ 달라진 건 대체 뭔가? 국방부 기획조정실장을 지낸 김정섭 세종연구소 부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외교·국방(2+2) 고위급(차관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와 확장억제수단 운용연습(DSC TTX) 등 확장억제 관련 한-미 협의체는 기존에도 가동 중이었다. 이름만 다른 협의체를 하나 더 만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제는 협의의 결과물을 내놔야 한다. 확장억제 의지만 강조할 게 아니라, 위기 발생시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지 한국과 미국이 합의한 결과가 나와야 한다. 현재 한·미가 한반도 전쟁을 상정해 작성한 작전계획은 재래식 전쟁 대비책이다. 북한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 등 달라진 변수를 담은 새로운 대응책이 나와야 한다. 확장억제전략협의체가 이를 위한 것인데, 새로운 협의체를 만들어 무슨 논의를 새로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다.”
전직 외교·안보 핵심 당국자는 ‘전략자산 정례 배치’에 대해서도 “실질적 효과보다 상징적 의미만 강한 허상일 뿐”이라고 짚었다. 그는 “기존에도 항공모함과 전략폭격기 등 전략자산은 필요할 때마다 한반도에 배치됐다. 탄도미사일 탑재 핵잠수함도 미국의 전략자산 중 하나일 뿐으로, 전혀 새롭다거나 강화됐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외국 주둔 미군의 핵심 개념은 전략적 유연성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대처해야 하기 때문에 한 지역에 오래 머물 수 없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전략자산 상시 배치를 요청했지만, 미국 쪽이 거절했다. 이미 미국은 확장억제와 관련해 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은 ‘동맹 70주년 기념 한-미 정상 공동성명’도 발표했다. 두 정상은 성명에서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 △인도·태평양 전역에서 협력 확대 △철통같은 양자 협력 강화 등으로 나눠 동맹의 미래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한·미 양국은 보편적 인권, 자유, 법치 수호에 대한 공동의 공약에 기반해 미래세대에 번영과 안보를 위한 확고한 기반을 제공할 동맹을 구축해나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회담에 앞서 윤 대통령이 <로이터> 통신과 한 인터뷰(4월18일)에서 내비친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용 무기 지원 문제는 일단 성명에서 빠졌다.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언급한 “대만 문제는 역내를 넘어서서 전세계적인 문제”란 표현도 담기지 않았다. 러시아와 중국 쪽 반발을 비켜가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불법적인 해상 영유권 주장, 매립지역의 군사화 및 강압적 행위를 포함해 인도·태평양에서의 그 어떤 일방적 현상 변경 시도에도 강력히 반대”한다는 문구가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처음으로 추가된 게 눈길을 끈다. 중국을 겨냥한 이 문구는 2022년 11월13일 한·미·일 3국 정상회담 뒤 나온 ‘인도·태평양 한·미·일 3국 파트너십에 대한 프놈펜 성명’에도 등장한다. 미국 쪽 요청을 수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 쪽이 어떻게 대응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정상회담특집②] “냉전 때와 닮아…과거로 가는 동맹” 기사로 이어집니다. https://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53773.html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영상] 김문수, “내란공범” 외친 시민 빤히 보면서 “경찰 불러”
공수처 넘어온 내란 수사…‘수취 거부’ 윤석열 직접 조사 속도전
‘권’모술‘수’ 세트 [그림판]
‘내란당’ 오명 반성은 어디로…‘이재명 혐오 확산’ 사활 건 국힘
한덕수, 오늘 양곡법 등 6개 법안 ‘거부권’ 무게
경호처가 윤석열 수사 거듭 막는데…한덕수 ‘강 건너 불구경’
극우 유튜브에 빠진 대통령, ‘내란의 기원’
‘기억의 습작’ 그룹 전람회 출신 서동욱 별세…향년 50
1호 헌법연구관 “윤석열 만장일치 탄핵…박근혜보다 사유 중대”
윤석열, 헌재 문건 수령 죄다 거부…과거에도 ‘거부권’ 남발하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