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특집①]미국은 ‘국익’, 한국은 ‘미익’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https://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53772.html)
경제안보 분야의 ‘성과’ 역시 구체성이 떨어진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과학법 등 미 국내 입법으로 옹색한 처지가 된 한국 기업에 대한 미국 쪽 ‘양보 조치’는 예상대로 전무했다. 그저 “한국 기업들의 우려를 완화하기 위해 한·미 양국이 기울여온 최근의 노력을 평가했다. 긴밀한 협의를 계속해나가기로 약속했다”는 정도의 언급만 있을 뿐이다. 대통령실은 이번 방미 기간에 넷플릭스를 포함해 “미 주요 기업 8개사가 모두 59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공동기자회견에서 “제가 취임한 뒤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1천억달러 이상 투자했다”고 언급하면서 빛이 바랬다.
공동기자회견에서 한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은 곱씹어볼 대목이 많다. 그는 머리발언에서 윤 대통령을 향해 “담대하고 원칙 있는 일본과의 외교적 결단에 대해 감사한다. 이는 (한·미·일) 3자 파트너십을 강화시킬 것이고, 엄청난 영향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쪽 사죄와 배상 참여 없이 정부가 일방적으로 내놓은 강제동원 해법(제3자 변제)에 대한 한국 내 부정적 여론에도,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부터 공들여온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란 미국의 국익에 충실한 발언이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는 윤 대통령이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날인 4월23일 눈에 띄는 보도를 했다. 중국 보안당국의 조사를 받는 미국 메모리반도체 업체 마이크론이 제재를 받으면, 이로써 중국 시장에서 발생하는 반도체 부족분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이 메우지 못하게 해달라고 미국 정부가 한국 쪽에 요청했다는 내용이다.
좀더 살펴보자. 마이크론은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삼성과 SK에 이어 세계 3위 업체다. 마이크론은 2005년 9월 산시성 시안에 2억5천만달러를 투자해 반도체공장을 지으면서 중국에 진출했다. 2022년 10월 ‘국가안보’를 이유로 첨단 반도체와 제조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하면서 시작된 미국의 파상공세에 속수무책이던 중국은, 2023년 3월31일 국가사이버정보판공실(CAC)을 앞세워 반격에 나섰다. 국가 중요 통신 기반시설의 “안전 확보”를 위해 관련법에 따라 마이크론 제품에 대한 사이버보안 심사에 착수한 것이다.
이미 미국의 반도체과학법 입법으로 중국에 진출한 한국 반도체 업체는 각종 규제에 직면했다. 중국 쪽이 마이크론에 제재를 가한다면, 중국 반도체 시장에서 공급 부족분을 대체할 기회가 될 수 있다. 반면 바이든 행정부로선 대중국 반도체 규제 후폭풍으로 자국 기업에 피해를 주는 모양새가 된다. 중국 쪽도 한국 반도체 업체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할 터다.
실제 삼성전자가 2023년 4월7일 1분기(1~3월) 매출과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9.0%와 95.8% 줄어든 실적을 발표하자, 중국 관영매체들은 일제히 이를 비중 있게 다뤘다.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삼성 쪽은 거시경제 상황과 고객 구매심리 둔화에 따른 수요 감소, 다수 고객사의 재고 조정 지속 등을 영업이익 감소 이유로 내세웠다. 하지만 이는 피상적인 분석일 뿐이다. 더 근본적으론 미국이 중국을 탄압하기 위해 반도체 공급망을 무기화하면서,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현상이 발생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4월26일 공동기자회견에서 관련 질문이 나오자, 바이든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중국에 대한 첨단 반도체 수출 금지 등 규제조치는) 중국과 관련된 게 아니다. 미국의 제조산업을 성장시키고 싶을 뿐이다. 미국이 반도체를 발명했다. 우리가 과거에 시장의 40%를 차지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제조업 일자리를 국외로 내보내고 반도체를 수입하는 게 더 저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10%로 떨어졌다. 다시 한번 시장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중산층을 위한 외교정책’을 내세우고 집권했다. 미국 경제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게 최우선 과제다. 이를 위해 국외로 이전한 제조업체를 국내로 복귀시키고, 외국자본을 유치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바이든 대통령의 답변은 이런 ‘가치’에 기반했다. 그는 회견에서 “한국의 경제성장이 우리 미국에도, 그리고 전세계인의 자유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가치는 ‘국익’이다.
윤 대통령의 ‘가치’는 다른 것 같다. 회담 기간 내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가치동맹’을 강조한 윤 대통령은 가치와 국익이 충돌할 때도 미련 없이 가치를 택했다. 윤 대통령은 4월25일(현지시각) 미국 <엔비시>(NBC)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미 중앙정보국(CIA)의 도청 정황을 두고 “이 문제가 한-미 동맹을 지탱하는 철통같은 신뢰를 흔들 이유가 없다고 본다. 자유 같은 가치 공유에 기반을 둔 동맹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친구가 친구를 염탐하느냐”는 추가 질문에도 “신뢰가 있다면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4월18일 국무회의 때도 “한-미 동맹은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관계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동맹이다. 한-미는 이해가 대립하거나 문제가 생겨도 충분히 조정할 수 있는 회복력이 있는 가치동맹”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E. H. 카는 20년 경력의 직업 외교관 출신이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을 파헤친 책이 1946년 펴낸 <20년의 위기>다. 그는 이 책에서 “이상주의적 가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특정 시기의 국익에 대한 특정 해석에 기반한 국가 정책의 무의식적 반영”이라고 썼다. 한 외교·안보 분야 원로는 이렇게 짚었다.
“이번 회담은 전반적으로 확장억제 등 한-미 군사동맹 강화의 반대급부로 미국이 원하는 글로벌 포괄적 동맹과 인도·태평양 전략에 한국이 적극 동참하는 것을 맞바꾼 구도로 볼 수 있다. 북한의 위협에 스스로 대처하지 못해 미국 쪽에 확장억제 강화를 요청하는 마당에, 미국을 따라 5대양 6대주를 누비겠다는 건가? 힘의 집중이 필요할 때 되레 힘을 분산시키는 건 자기분열적 모순이다. 소인수회담의 머리발언을 보니 바이든 대통령이 ‘자유세계 한 나라의 안보는 파트너들의 안보에 달려 있다’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더라. 자국의 이익을 위해 편가르기를 하는 셈인데, 세상을 흑백으로만 보려는 점에서 냉전 때와 똑같다. 윤 대통령은 이를 막지 않고 되레 적극 동참할 기세다. 이번 회담에서 확인한 한-미 동맹은 미래로 가는 동맹이 아니라, 과거로 가는 동맹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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