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너무나 중요하기에 역사가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고 말해 유명해진 사람은 미국 천문학자 도널드 오스터브룩(1924∼2007)이었다. 그는 역사학자가 되어 천문학사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그 전에 이 말을 한 사람은 영국의 좌파 역사가 라파엘 새뮤얼(1934∼96)이었다. 그는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지만 ‘아래로부터 역사’ 서술과 대중의 역사쓰기(역사작업장) 운동을 이끌었다.
유사한 어법의 주장이 이어졌다. “역사는 너무나 중요하기에 좌파(left) 역사가들에게만 맡겨둘(left) 수 없다”는 얘기는 보수 진영에서 흘러나왔고, 유럽에서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논객들은 늘 “역사는 너무나 중요하기에 대학교수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고 뻗대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역사 해석에 개입하는 ‘외부자들’ </font></font>
최근 한국 역사학계에 대한 다양한 비전문가들의 공격과 질타도 ‘역사는 너무나 중요하기에’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했다. 아울러 그 전제는 흔히 또 다른 인식 내지 평가를 전제한다. 특정한 정치적 편향과 인적 고루함이 지배하는 한국 역사학계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행위자들이 여러 이유로 대학과 학계의 역사 연구와 서술을 부정하고 의심한다. 물론 박근혜 정부가 국정화를 추진하면서 역사학계를 ‘종북 좌파’로 매도한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이른바 ‘재야’의 국수주의적 상고사 주창자들이 한국사학계 전체를 ‘식민사학’이라 비난하면, 아직도 비장한 마음으로 그 말에 공감하며 가슴을 여미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런데 현재 한국 역사학계는 그 반대의 비난도 동시에 받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할머니 비하로 논란이 됐던 박유하 교수의 책 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드러났듯이, 일부 지식인들이 보기에는 한국 역사학계가 대부분 편향적 관점, 즉 여기서는 오히려 ‘민족주의’를 벗어나지 못해 심각한 결함을 갖는 것으로 간주됐다. 한국 역사학계는 동시에 서로 다른 종류의 비난을 받고 있는 셈이다.
한국 역사학계가 지닌 이런저런 문제점과 ‘편향’에 대해서는 역사학계 내부에서도 진지하게 토론 중이다. 역사 해석에서 편향과 오류, 연구 대상에서 소홀함과 배제가 있었다면 그것을 수정하고 보충하면 된다. 그런 교정과 확장 또한 학문이 발전하는 보편적 과정의 일부다.
다만 이미 새로운 문제의식과 연구 흐름과 관점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싸잡아서 역사학계 전체의 ‘집단적’ 성격을 규정하고 딱지를 붙이는 것은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지만 그 자체로 매우 비이성적이다.
일부 정치가나 지식인이 사료와 맥락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주제에 대해 무리한 해석을 시도하며 역사학자들의 신중한 접근이나 진중한 작업을 무시하고 의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타 분과 학문이나 사회적 삶의 영역에서도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 전문가들의 오랜 연구와 관찰이 늘 존중받는다.
그런데 역사를 둘러싸고는 상황이 좀 다르고 때로는 너무 격하다. 정치가나 언론인, 문화계 종사자뿐만 아니라 다른 전공의 학자와 아마추어 역사가들이 모두 나서 큰 목소리를 내며 역사 인식과 해석에 직접 개입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역사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이니!
<font size="4"><font color="#008ABD">‘역사의 대중화’에 깔린 부당 전제</font></font>그런 상황에 맞서 역사학자들이 대응한 방식은 좀 인습적이었다. 즉, ‘역사(학)의 대중화’였다. ‘역사를 대중화한’다는 말은 전문적 역사연구의 성과를 사회 대중에게 돌려주자는 것이었다. 대중에게 전문 역사학계의 연구와 서술을 전달하려면 다양한 문화매체의 활용은 필수적이고 쉬운 문체와 어법의 글쓰기도 불가피하다. 이 대중화 작업에 전문 역사가들의 참여와 관심이 적극적으로 요구됐다.
그런데 ‘역사의 대중화’는 두 개의 미심쩍은 전제에 기반을 두고 있음이 드러났다. 먼저, 대중은 역사에 대해 무지하고 다만 전문 역사가들만이 항상 ‘올바른 역사’를 알고 있다는 전제이다. 역사가들은 열심히 연구한 끝에 얻은 올바른 역사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해 그들을 계몽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제는 대학이나 학계 바깥에는 독립적인 역사 인식과 서술의 주체가 없는 듯 보는 것이다. 사실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든 근대 학문 체계가 발전하기 전, 또는 대학에서 역사 연구와 서술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그 바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를 재현하고 공유하고 전승하는 문화적 전통이 존재했다. 특히 20세기 대중문화의 폭발적 발전으로 대중은 역사 인식과 집단적 기억을 통한 문화 전승에 더욱 다양하게 직접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최근 정보화 사회의 급속한 진전은 대중의 고유한 역사 재현과 해석의 가능성을 더욱 넓혔다.
이런 현실에 직면해 역사가들은 ‘역사의 대중화’가 일방적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되고 될 수도 없음을 인식했다. 앞서 ‘대중의 역사화’ 같은 말이 등장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역사의 대중화’가 학계의 기성 연구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을 지시했다면, ‘대중의 역사화’는 대중의 삶의 현장에 파고들어 그들의 생활세계에 밀착한 역사 서술이나 재현을 말한다. 그것은 유럽과 북미의 ‘아래로부터의 역사’ 전통을 이은 실천적 역사 서술을 지시한다. 이 과정에서 구술사와 생애사와 여성사와 지방사 등이 새로운 역사 서술 분야로 급격히 부상했고 대중은 직접 역사쓰기에 동참했다.
다양한 대중과 만나면서 그들로부터 역사를 일구어내는 전통은 여전히 소중하다. 하지만 역사와 대중의 관계는 그것만으로 포착되지 못하는 차원이 널려 있었다. 대학 바깥에 존재하는 사회 구성원은 매우 이질적이다. 또 사회 구성원들이 역사에 대해 관심 갖는 것이 반드시 자신의 생애사 서술 요구에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세계화와 정보화 사회를 맞이해 역사적 사건과 현상에 대한 사회와 대중의 관심은 더욱 증가했다. 10여 년 전부터 국제 역사학계는 이와 관련된 새로운 개념이 호황을 누리며 관심을 끌고 있다. ‘공공역사’(Public History)다.
미국에서는 이미 1970년대에 ‘공공역사’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당시 그것은 아직 대중의 자기 역사쓰기 맥락에서 이해됐다. 그러나 그 뒤 공공역사는 그것을 넘어서 공공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종류의 역사 재현과 활용을 포괄적으로 지시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것은 민중의 주체적인 자기 생애사 서술 같은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공공역사는 대학이나 연구소 같은 제한된 전문 학술 활동 공간을 넘어 사회의 다양한 공적인 삶에서 수행되는 역사 관련 활동을 지시한다. 다시 말해, 학회나 대학과 연구소의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역사 지식의 공적 활용과 재현과 전달과 소통과 매개의 모든 형식을 공공역사로 규정할 수 있다. 이때 ‘공공’은 하나의 단일한 총체가 아니기에 오히려 다양한 행위자를 전제해야 한다.
공공역사의 세부 영역은 다양하다. 먼저, 언론과 미디어매체의 역사 관련 기사와 역사 기획물, 역사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역사 관련 프로그램을 꼽을 수 있다. 역사박물관이나 역사 주제 전시관의 역사 전시도 주요한 영역의 일부를 차지한다. 정치나 행정을 위한 역사 자문과 프로젝트 등도 주목받을 만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역사 지식의 공적 활용과 소통</font></font>특히 정치폭력의 가해와 피해와 관련한 과거사 정리 및 사법부를 위한 역사 자문과 외국과의 역사 화해를 비롯한 역사 정책, 기업의 역사 활용 또는 역사 마케팅, 문화재 보호와 전승 작업, 역사재단과 정치교육기관의 역사 강좌와 세미나, 역사답사기행 사업, 기록보관소의 사료와 역사 활용, 지방사와 가족사와 생애사 전문 저술 작업 등도 있다.
특히 현대사와 공공역사는 서술과 재현의 자료 차원에서 깊이 연결되어 있다. 사진과 영상 등 생생한 시청각 자료와 역사 현장의 재구성을 통한 과거의 현재화는 현대사 이해를 보조한다. 시청각 자료와 현장의 사실성에 기초한 역사 전달은 현대사 교육과 소통에 유익하게 활용된다. 그것은 다시 역사 체험과 사실성에 크게 의존하는 공공역사에서 현대사가 특별한 지위를 지닐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공공역사는 ‘역사가 너무나 중요하기에 역사가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는 사회적 인식을 반영한다. 공공역사는 이제 인습적 방식, 즉 학문적 역사 연구의 결과를 손쉽게 가공해 대중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는 공적 요구와 수요에 조응할 수 없음을 드러냈다. 공공역사는 역사에 대한 공적 논의의 새로운 방식이 필요함을 예시한다.
공공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학문적 연구의 결과 자체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소통 가능하고 전승 가능하고 활용 가능한 역사 재현의 형식과 방법이기 때문에 그 고유한 능력과 기술에 대한 숙고와 훈련이 따로 필요하다. 아울러 공공역사의 여러 위험과 난점에도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즉 역사의 공적 활용에는 항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악용, 단순화를 통한 역사 오용 및 경제적 이익 창출에 의거한 상업화 등에 대해서는 비판적 검토와 개입이 필요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전문 역사가들과 시민사회의 다양한 역사 행위자들은 공공영역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요구와 관심을 갖고 더 많이 토론하는 것이다. 토론과 소통은 공공역사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그러니 우리는 누군가 공공영역에서 특정 역사상을 일방적으로 관철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의심을 거두지 말아야 한다.
특정 역사상의 일방적 관철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서 주로 발생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에서 최근 몇 년간 역사 관련 사회운동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박물관이나 전시관 또는 추모(기념) 조형물을 보면 그것이 유관 운동단체를 넘어 얼마나 많은 공적 토론과 전문가 논의 절차를 거쳤는지 따져물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운동의 긴급성과 운동 주체들의 정치적 정당성에 의거해 ‘건립’ 자체만으로도 큰 역사적 의미가 부여됐다.
그러니 전시 내용이나 조형물의 성격에 대한 검토는 말할 것도 없고 건립 절차나 과정의 개방성과 민주성 문제도 고려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건립된 그리고 현재 건립을 준비 중인 여러 시민역사관과 역사 조형물에 대해서도 여러 차원의 비판적 토론이 더 필요하다. 그것은 더 좋은 공공역사의 장을 갖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대중과 사회의 더 큰 관심과 참여를 이끄는 방식이기도 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위안부 소녀상 건립, 더 많은 토론을 </font></font>그런 맥락에서 보면, 현재 전국 곳곳에 위안부 소녀상을 건립하는 문제는 더 토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대중의 열망과 사회운동의 정당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역사 조형물 건립의 민주적 원칙과 공공역사 차원의 숙고와 시민사회 내 토론 과정이 더 필요하다. 이제 우리는 공공영역에서 역사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더 신중하게 토론하고 숙고해야 할 일이 많아진 것이다. ‘역사는 너무도 중요하기에’ 어떤 경우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font color="#C21A1A">▶ 바로가기</font>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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