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유럽이 스위스를 주시했다.” 20세기 후반 냉전기 평화 정치를 위한 원탁 때문도 아니고 20세기 전반기 ‘31년 전쟁’의 폭우를 가린 천막 때문도 아니었다. 아직 제네바가 국제 냉전의 갈등에 맞서 평화의 멍석을 깔기 전이었고, 아직 취리히가 세계대전에 쫓긴 망명객들의 도피처가 되기 전의 일이었다. 아, 물론 ‘유럽의 지붕’ 융프라우요흐 때문도 아니었다. 여대생들 때문이었다. ‘대학에 여자’라니? 19세기 후반엔 유럽에서도 그것은 아직 묘한 풍경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유럽의 눈길, 스위스로 향하다 </font></font>
1864년 취리히대학이 여성에게 입학의 문을 열었다. 유럽 전체로 보면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대학에 이어 두 번째고, 독일어권 유럽에서는 최초였다. 취리히를 본받아 1870년대 후반까지 베른과 로잔과 제네바를 비롯한 스위스 주요 도시의 대학들이 여성에게 정규 수학의 기회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취리히대학이 가장 먼저 그렇게 나선 데에는 자유주의적 시 당국과 대학 교수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특히 1848년 자유주의 혁명의 실패 뒤 반동의 세월을 삭여야 했던 일부 독일 학자들이 취리히에서 교수로 자리를 잡으면서 그곳 대학은 ‘자유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곳은 학문과 교육에서 자유와 개방의 정신을 실현하고 민주화를 선도하며 진보적 개혁의 거점이 되었다.
19세기 후반 정치적 자유주의가 유럽을 휘감고 있었지만, 대학이 낡은 국가권력과 보수적 가부장주의 사회를 뛰어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런 가운데 스위스 대학이 여성에게 학업 기회를 제공하자 유럽은 모두 ‘스위스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인접한 강대국의 대학과 달리 절대주의 정치권력이나 전통적 교회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취리히대학은 개방과 자유의 정신을 더 밀어보고자 했다.
그런데 형식적으로 권리를 인정하고 제도적으로 기회를 보장한다고 해서 누구나 그 권리를 실질적으로 향유하는 것도 아니고 기회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당시 유럽의 여성들은 대학 입학 자격의 실제 조건을 충족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성들은 고등학교 졸업증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중등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해 대학 입학시험을 통과하기도 쉽지 않았으며, 신원 증서를 비롯한 행정 서류 확보에도 난관을 겪었다.
그리하여 스위스 대학들은 이 모든 절차를 간소하게 만들어 약식 신원 증서 하나만으로도 여학생을 받아들이기로 조치했다. 당시 파리나 미국의 일부 여자 대학도 여성에게 대학 입학을 보장하는 조치를 도입했지만, 스위스의 대학이 여성의 입학에 더 융통성을 발휘했고 곧 더 큰 흡인력을 가지게 되었다.
문이 열리자 가장 목말랐던 사람들이 가장 빨리 달려왔다. 취리히대학은 애초 스위스나 독일 교양 시민층의 딸들이 몰려들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들은 관심이 적었다. 그들은 결혼과 가족 외의 삶을 상상해보지 못한 탓에 대학 공부의 필요를 절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새로운 세계와 혁명적 삶의 변화를 갈망하던 러시아 여성들이 배움의 기회를 찾아 먼 길을 나섰다. 대학에서 청강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도 박탈당한 러시아 여성들은 취리히대학의 여학생 입학 허가 소식을 듣자마자 득달처럼 달려왔다. 제네바대학에 가장 먼저 학생으로 등록한 여성들도 러시아인들이었다. 베른대학도 곧 러시아 여성들로 가득했다. 특히 의과대학에 많이 몰렸다.
취리히대학 최초의 여자 졸업생은 나데즈다 수슬로바(1843~1918·사진)였다. 그는 러시아인으로서, 1867년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스위스 남편과 함께 러시아로 돌아가 병원을 열었다. 1867년부터 1876년까지 스위스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여성 26명 중 19명이 러시아 출신이었다. 그 외에는 영국 여성이 3명, 독일 여성이 2명이었다. 정작 스위스 출신은 단 1명에 불과했다.
대학 전체의 통계를 통해 한 번 더 살피면, 1873년 취리히대학 여학생 수가 114명이었는데, 그중 100명이 러시아인이었다. 당시 취리히대학의 전체 학생 수가 439명에 불과했던 것을 염두에 두면, 그 규모를 쉽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같은 해 취리히대학의 러시아 출신 남학생이 45명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해도 러시아 여대생의 존재는 눈에 띈다. 덧붙이면, 1873년 취리히대학의 외국인 학생 비율은 52%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러시아·동유럽에서 몰려든 여학생들</font></font>아울러 동유럽 지역에서 스위스 대학을 찾아온 여성의 수도 점차 늘었다. 1888년 당시 러시아 지배하의 폴란드에서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가 취리히에 도착해 자연과학을 전공하기 위해 대학에 입학했다. ‘(18)89학번’이었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여러 전공을 맛본 뒤 1897년 법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세르비아에서 건너온 밀레바 마리치(1875~1948)는 ‘(18)96학번’으로 취리히의 연방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밀레바는 동급생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밀레바는 수학을 잘해 아인슈타인의 공부와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임신과 유산, 결혼과 출산의 후유증으로 학업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했다.
스위스의 러시아와 동유럽 여학생들은 여러 난관을 넘어야 했다. 가장 큰 장벽은 여성의 지적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보수적 학자들의 요설이었다. “계집애들을 지성으로부터 보호하자!”는 자극적인 구호와 함께 각종 궤변이 등장했다. 이를테면 독일 라이프치히대학의 신경생리학 교수 파울 율리우스 뫼비우스는 1900년 이란 책에서 뇌의 무게를 근거로 여성의 지적 무능력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그는 약한 뇌를 가진 여성이 지적 작업에 몰두하면 신체를 상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정신의 균형을 파괴하게 될 것이라고 뻗대었다. 또 ‘교육 전문가’들이 나서서 ‘지적 능력이 부족한 여성이 대학에 들어오면 대학의 수준이 떨어지게 되며, 여대생들이 남성을 유혹하면서 학업 분위기가 흐려지기에 결국 대학과 학문은 붕괴할 수밖에 없다’며 여성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다행히도 스위스의 대학들은 그런 교설에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비아냥거리던 사회 여론과 보수적 정치 엘리트들도 곧 자유주의적 대학의 결정을 따랐고 진보적 교수들을 믿었다. 여성의 신체적 능력과 성실성 및 지적 발전을 의심하는 소리는 점차 사라졌다. 어리석은 그 ‘과학’에 직면해 여대생들도 스스로 여성의 지적 능력을 옹호하고 자신들의 학업에 대한 경험 보고서를 출간하며 적극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그런 투쟁과 대학 자유와 교육 평등 이념의 확산 끝에 유럽의 나머지 대학들도 1905년부터 서서히 ‘스위스 모델’을 따르기 시작했다.
“전 유럽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어.” 이 말은 애초 안나 외메라는 러시아 여학생이 취리히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료 러시아인 여학생들에게 한 말이었다. 유럽의 ‘제1세대 여대생’으로서 그들도 자신들의 지위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학업이나 대학생이라는 신분 자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학 공부를 세계를 변화시킬 도구라고 생각했다. 그들 대부분은 사회혁명을 지지하는 급진 정치를 익혔다.
스위스의 러시아 여학생들은 ‘전 유럽의 운명이 자신들의 혁명적 실천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굴종과 억압을 넘는 정신의 세계를 접하고 세계를 구원할 도구를 찾아 배움의 길을 떠나온 것이다. 특히 그들은 의사나 교사가 되면 고통받는 민중을 직접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또 혁명 활동에 참여하거나 사회적 실천을 통해 민중에게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치조직이 도처에서 결성되었고 혁명에 대한 토론은 격렬했다. 급기야 러시아의 차르 당국은 1873년 취리히대학의 러시아 학생들에게 소환 명령을 내려 혁명 조직과 저항 정신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강요했고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생애 내내 괴롭힐 것이라고 겁박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포기할 수 없던 자유와 학문 </font></font>많은 러시아 여학생들이 고국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한번 경험한 대학의 자유와 학업의 기회를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일부는 스위스 내 다른 대학으로 전학을 하면서 학업을 계속했다. 잠시의 소강상태를 지나 1890년대 중반부터 1912년 사이에 러시아 여성들은 다시 스위스로 대규모 유학의 물결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1867년부터 1915년까지 스위스 대학에서 공부했던 러시아 여성의 수는 대략 6천 명을 헤아린다.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유럽 여대생 제1세대인 러시아 여학생들의 생애사는 단일하지 않다. 러시아로 돌아간 여성들은 대부분 혁명 투쟁에 참여했다. 초기에는 인민주의자들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취리히와 베른에서 플레하노프와 레닌을 만나 함께 정치 토론을 벌였던 러시아 여학생들 일부는 고국으로 돌아가 멘셰비키가 되거나 볼셰비키로 활약했다. 1898년 26살의 나이로 취리히대학에서 유학했던 여성주의 혁명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1872~1952)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스위스에 남은 러시아 여성들 중에는 정치 활동을 이어간 이도 있었고, 의사로 활약한 이도 있었다.
한편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에서 혁명 투쟁 끝에 비극적 죽음을 맞았고, 밀레바 마리치는 남편의 성공 뒤 버림받아 취리히로 돌아와 ‘천재의 그늘’에 가려 잊혀졌다. 스위스 대학의 제1호 졸업 여학생이자 러시아 최초의 여성 의사인 나데즈다 수슬로바는 평생 민중을 위해 의료봉사를 하며 깊은 흔적을 남겼다. 흥미롭게도 20세기 유럽 지성사와 사회사를 면밀히 살피다보면, 곳곳에서 당시 스위스 대학에서 유학했던 러시아와 동유럽 여학생들을 만난다.
대학이 선구적으로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한 역사를 들어 스위스에 찬사를 보내기만 할 수는 없다. 기괴하게도 스위스는 유럽에서 가장 늦게 여성참정권을 도입한 나라 중 하나다. 1971년 2월에야 비로소 국민(남성만 국민!)들은 그동안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고 ‘국민투표’를 통해 여성참정권을 인정했다. 여성에게 가장 앞서 대학 입학의 기회를 보장해준 나라가 여성참정권을 가장 늦게 부여한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은 수수께끼에 가깝다. 젠더사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에 얼마나 황당한 정치적 역설의 맥락과 처절한 투쟁의 사연이 있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스위스 대학이 러시아와 동유럽 여성들에게 배움과 결의의 울타리를 제공해준 것도 인상적이지만 그 역의 도움과 자극도 무시할 수 없다. 즉, 러시아와 동유럽 여학생들로 인해 스위스의 작은 대학들은 일약 ‘시대의 전위’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아울러 스위스 사회는 그들을 흡수함으로써 다가올 정치 해방과 사회 변혁의 진폭을 미리 느낄 수 있었다. 스위스의 제1세대 여성운동가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모두 ‘러시아인들의 친구’였다. 뒤이은 20세기 전쟁과 냉전의 시대에 스위스가 보여준 피난처와 완충지로서의 국제적 역할의 배경이 그 이전 시기 대학과 사회가 경험하고 기억하는 초국가적 역사와 무관할 리 없다.
마지막으로, 이를 다시 대학사의 맥락에서 보면, 스위스 대학의 이 선구적 경험이 주는 함의와 교훈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대학은 권력의 완고한 횡포와 보수적 인습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때만이 본래의 자유와 개방의 정신을 통해 제 할 일을 수행할 수 있다. 정신의 자유에 기초한 학문적 도전과 실천적 탐색이야말로 대학으로 하여금 시대에 앞선 새로운 삶의 가치와 가능성을 선취해 공동체의 문명적 방향 찾기를 안내하고 보조하도록 만든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만신창이된 오늘의 한국 대학 </font></font>2015년 여름 끝자락 한국, ‘전세계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대학이 어떻게 망가지는가를 보기 위해서! 권력자들이 멋대로 정한 대학 교육의 방향과 관료들이 무책임하게 만든 온갖 심사 평가 기준으로 대학이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군대나 기업에서 지시를 챙기거나 통계를 만지며 효율과 이윤을 따지고 살면 될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대학에 와 있다.
대학이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마냥 두고만 볼 수 없었던 한 국립대학 교수의 절명이 사무친다. 그는 시를 안고 살았다고 한다. 시를 통해 세계의 정신을 조심스럽게 더듬던 학인은 정신의 세계를 이탈한 권력의 포악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대학의 존재 위기와 그것으로 발생할 문명적 삶의 위험을 죽음으로 알린 그와는 달리 역사를 통해 미래를 밝히려는 우리에게 아직 삶의 기회가 더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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