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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유럽에 없는 것 ‘유럽인’이라는 사명

유럽 통합의 힘은 경제·평화공동체 필요성 자각… 브렉시트 이후 위기 극복할 동력 보이지 않는 유럽
등록 2016-08-18 06:17 수정 2020-05-02 19:28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 전(위쪽)과 후(아래쪽). 유럽연합 잔류를 요구하는 시위는 계속됐다. REUTERS, EPA 연합뉴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 전(위쪽)과 후(아래쪽). 유럽연합 잔류를 요구하는 시위는 계속됐다. REUTERS, EPA 연합뉴스

불가리아 중서부에는 ‘톰슨’이라는 마을이 있다. 수도 소피아에서 멀지 않은 발칸산맥 자락에 놓인 시골이다. 마을 이름은 한 영국인에게서 따왔다. 그는 명문 고등학교인 윈체스터칼리지를 다녔고, 1938년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했다. 일찍부터 명민하고 다방면에 탁월함을 보여 엘리트로의 입신이 보장된 듯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신념과 정의감에 불타 ‘정치적 인간’이 되었고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영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조국 ‘유럽’을 원한 두 영국인

톰슨은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영국 공산당이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반파시즘 전선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영국군에 입대했다. 장교 훈련을 마친 그는 북아프리카와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서 복무했다. 1944년 1월 톰슨은 특수부대 소령으로 전우 3명과 함께 불가리아 반파시즘 게릴라 부대와 접촉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로 파견됐다. 자원했다고 한다.

그 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서 활약하던 그는 5월 불가리아 정부군에 맞서 싸우다 체포돼 처형됐다.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프랭크 톰슨 소령은 20세기 가장 탁월한 역사가인 E. P. 톰슨의 형이다. 전후 불가리아 공산당 정부는 그를 기려 인근 마을들을 합쳐 ‘톰슨’이라 불렀고 기차역도 톰슨 소령역으로 고쳤다.

영국의 엘리트 청년들만 그런 자유와 평화의 이상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20세기 전반 영국 노동자들도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유럽으로 달렸다. 톰 하월 존스는 웨일스 애버데어 출신의 광부였다. 그는 영국 노동자 특유의 자의식 넘치는 문화 속에서 독서와 토론으로 세계를 알아갔고 시야를 넓혔다. 영국 공산당 당원이던 그는 심지어 괴테와 헤겔과 마르크스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독어를 배웠다.

1936년 9월 ‘대륙’에서 또 파시스트들이 준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안락한 섬’에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1936년에서 1939년까지 스페인 내전시 파시즘을 막고 공화국을 지켜야 한다며 50여 개국에서 4만 명의 자원병이 몰려왔다. 영국인도 2천 명이 넘었는데, 대부분은 존스처럼 하층 노동자였다. 존스는 1938년 8월25일 프랑코 군대와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그의 나이 37살이었다. 스페인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맨몸으로 달려온 영국 노동자들 중 절반은 그렇게 유럽의 하늘을 덮은 채 돌아가지 못했다.

대학생 톰슨과 광부 존스는 모두 영국인이면서 유럽인이었다. 유럽을 야만으로부터 지키는 것이 ‘사랑하는 조국’ 영국을 위한 일이고, ‘멋진 영국인’이라면 응당 구난에 빠진 유럽을 위해 나서야 한다는 사명을 가졌다. 영국인의 자존심과 유럽인으로서의 기쁨을 함께 가졌다. 영국을 사랑하던 그들은 모두 “유럽을 조국”으로 갖기를 원했다.

앞의 두 인물과는 달리 공산주의를 비판했던 또 다른 두 영국인도 1945년을 전후해 ‘하나의 단일한 유럽’을 웅대하게 제안했다. 영국의 전쟁 영웅이자 보수당 지도자인 윈스턴 처칠은 영국 애국주의가 어떻게 유럽 통합의 투철한 옹호와 결합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1946년 스위스 취리히대학의 연설에서 처칠은 자유세계의 전위인 유럽합중국 건설을 유럽 정치 무대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제기했다. 그는 영국 영웅이 유럽 선구자가 되는 위용을 보였다.

한편, 조지 오웰은 처칠만큼 ‘영국적인 것’(영국 음식도!)을 사랑하며 또 다른 종류의 유럽합중국의 이상을 옹호했다. 처칠이 그랬듯이, 오웰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과 영국이 긴밀히 결합됐고 서로 존중할 수 있게 된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1947년 ‘유럽의 단결을 위해’라는 에세이에서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느낄 수 있을 때만 문명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고 그것은 하나의 유럽 정치공동체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애초 유럽 통합은 평화 프로젝트

제안만이 아니라 실천에서도 런던은 유럽 통합의 발원지였다. 런던은 나치 독일에 쫓긴 유럽인들의 가장 중요한 피란처였다. 다양한 국적과 배경을 가진 유럽인들이 바로 그곳에서 유럽 단일국가의 구체적인 계획과 합의를 만들어갔다. 1944년 9월5일 벨기에와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가 관세와 경제와 통화와 관련한 예비 협약을 맺은 곳도 바로 런던이었다. 비록 유럽공동체에 가입한 것은 좀 늦었지만 영국은 영국의 자의식을 유지하면서도 유럽의 일원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1980년대 보수당 소속의 마거릿 대처 총리는 ‘모든 악은 대륙으로부터 나오고 해결책은 영국이 제시한다’고 폼을 잡았다. 그런 영국 예외주의 자존심은 볼썽사나웠지만 유럽 대륙의 전쟁과 파시즘과 공산주의와 냉전의 방어막으로서 영국이 수행한 역할을 인정하며 봐줄 수 있었다.

유럽연합(EU)은 위기와 위기 극복의 역사였다. 유럽연합의 질긴 생명력은 국민국가의 결함과 전통적 국제질서의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됐다. 유럽연합은 신자유주의나 특정 이데올로기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것은 공허한 이상이나 일시적 전망에 그친 게 아니라 국민국가의 현실정치와 실용주의의 합이었다.

유럽 통합 역사의 최고 전문가인 빌프리트 로트에 따르면, 유럽 통합의 추진력은 네 가지였다. 먼저, 전통적인 국가 간 협약이나 협력으로는 평화가 보장될 가능성이 없다는 통찰이 이미 전간기 유럽에서 퍼졌다. 양차 대전의 경험으로 개별 국가 사이의 협약으로는 유럽에서 평화를 구현하기 어렵고 범유럽 차원의 정치공동체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에 유럽 정치가들의 견해가 일치했다.

둘째는 독일 문제다. 독일은 유럽 열강의 하나로 만족하기에는 너무 크고 강했다. 그렇기에 독일이 독립적인 패권국으로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유럽공동체가 유일한 답이었다. 독일에 대한 두려움이 오히려 독일을 포함하며 억제하는 유럽 프로젝트로 발현됐다. 1990년 독일 통일은 유럽 통합의 흐름 속에서만 국제적으로 승인될 수 있었다.

셋째, 유럽 각국은 시장 규모가 너무 작아 국민국가의 장벽을 유지하면 생산력의 확장을 기대할 수 없다. 시장을 확대해야만 산업 추진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더구나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유럽은 국가의 모든 자원을 파괴와 살상에 쏟으면서 세계시장에서 영향력을 급격히 잃었다. 손실은 막대했고 자력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했다. 미국의 도움을 받았지만 곧 미국의 들러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국제정치나 경제적 이익의 관점으로 보면, 유럽 통합은 필수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미국이나 소련 같은 열강들 속에서 유럽의 고유한 이익을 유지하고 관철할 필요 때문이다. 유럽이 하나가 되어야만 국제적 지위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유럽연합은 경제적 이익공동체이기도 했지만 평화 프로젝트였다. 2012년 10월12일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유럽연합을 평화상 수상자로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결정에 대해 비판과 조소가 적지 않았다. 당시 이미 유럽연합은 유로화 위기에 빠져들었고 회원국 사이의 심각한 불평등 격차로 순탄치 않은 미래의 징조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흔히 그렇듯이, 상은 그동안 잘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잘하라고 주는 것이기도 하다며 넘어갔다.

물론 유럽연합의 역사적 성취에 인색할 수는 없다. 노벨위원회는 유럽연합이 지난 60년 동안 유럽의 평화적 발전에 공헌했다며 그 구체적 성과를 들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와 결속, 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 등 남유럽의 민주주의 발전, 공산주의 붕괴 뒤 중동부 유럽의 통합, 발칸 지역의 평화 정착 지원과 가입 예정국인 터키의 인권과 민주주의 증진 등. 노벨위원회는 유럽 통합의 역사는 항상 위기를 겪었지만 결국에는 성공의 역사였음을 강조했고, 유럽인들에게 그 성공을 쉽게 포기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통합 아니면 몰락

호소는 공허했고 현실은 냉혹하다. 과거의 위기와는 다르다. 위기에 위기가 중첩되고 있으며 전망은 혼미하다. 다만 유럽 통합의 역사에서 확인되는 추진력을 살피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나 유로화 위기로 유럽 통합 프로젝트 자체가 무너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국민국가의 결함과 위기를 보고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젝트가 다시 국민국가로의 분열로 회귀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유럽이냐 민족이냐가 아니라 ‘통합하느냐 몰락하느냐’가 남았다. 국민국가 질서로 회귀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브뤼셀 관료주의의 퇴행과 장벽을 넘는 민주적 의사결정의 확대도 중요하지만 유럽 각국이 가진 이질적 이익과 지향은 역사적 경험과 기억이 달라서 생긴 문제이기도 하다. 경제적·재정적 상황과 이익에 대한 유럽 각국들의 인식 차이는 쉽게 조정되기 어렵다. 그럴수록 유럽연합이 애초 평화 프로젝트였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을 위한 동력이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유럽연합에서 영국은 나갔고 프랑스는 뻗었고 독일만 솟았다. 독일이 헤게모니 세력으로 유럽연합을 이끌고 갈지는 의문이다. 전후 유럽은 독일과 프랑스의 세력 균형과 조정 협상으로 안정을 가졌다. 그런데 이제 프랑스는 너무 약하다. 독일이 유일한 권력자다.

하지만 권력을 가졌다고 곧 헤게모니를 갖는 것은 아니다. 헤게모니 국가는 안정을 위한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 일시적 불이익도 감수하고 전체와 장기적 관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독일 정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리스의 재정위기에서 독일은 자신의 방침을 관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리스를 포함한 여타 국가들의 반감만 샀다. 자신의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안 되고 유럽연합의 여타 국가들의 상황을 고려하고 그들의 관점에서 문제를 볼 줄 알아야 평화 프로젝트을 위한 헤게모니 국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브렉시트 위기를 오히려 이익 실현의 기회로 삼으려는 이가 독일에 적지 않다. 브렉시트 결정 뒤 이틀 만에 독일 헤센주 주지사 폴커 부피어(기독민주연합)는 브렉시트를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최대의 사건이라고 규정한 뒤 헤센주가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라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그는 주정부 발표에서 런던 소재의 유럽은행감독원과 유럽약품감독원 및 여타 유수 기업들을 프랑크푸르트로 유치하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고 밝혔다.

부피어 주지사는 브뤼셀과 런던에 가서 유럽의 주요 정치가들에게 프랑크푸르트가 런던을 대신해 유럽의 경제와 금융 중심지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설득할 계획이다. 이미 프랑스 파리가 런던을 대체할 경쟁 도시로 나섰고 뮌헨마저 유럽은행감독원 유치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상황에서 헤센주의 기민련-녹색당 연정은 프랑크푸르트를 ‘새로운 런던’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특별 감세와 노동법의 일시적 이완마저 고려하고 있다.

유일 권력자 독일의 자국 이기주의

지역 정치가들의 입장에선 고려할 만한 일이지만 유럽연합이 절벽의 위기에 서 있는 현실에서 협량해 보인다. 독일이 최근 유로화 위기와 브렉시트를 맞이해 비판받는 이유는 바로 이런 자국 중심의 이익 추구 때문이다.

사실 진짜 문제는 정치가든 시민이든, 영국이든 독일이든 유럽 전역에서 애초 감정공동체이자 ‘사랑의 대상’이던 유럽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내내 유럽은 고통과 절망에 빠진 유럽인들에게 희망의 원천이자 갈망의 대상이었다. 정치강령이나 경제공동체 이전에 억압과 갈등을 극복할 추진력이었는데, 이제 유럽은 그것의 결핍이다. 이것이야말로 현재의 근본 위기다. 이 상황에서 유럽에 대한 꿈과 사랑을 여전히 간직한 이들이 아랍에서 오는 난민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흥미롭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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