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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주의 삼총사를 기억하다

유럽의 샌더스 형님들, 브란트·팔메·크라이스키… 민주사회주의 구상하고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만든 동지들
등록 2016-03-02 07:23 수정 2020-05-02 19:28

1830년대 중반 프랑스 사상가 토크빌은 미국을 방문한 뒤 “미국의 위대함은 다른 나라보다 더 계몽되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류를 교정할 줄 아는 능력에 있다”고 말했다. ‘오바마 열풍’에 뒤이은 ‘샌더스 돌풍’을 맞는 한 방식은 ‘미국의 위대함’을 ‘비로소’ 발견하는 기쁨일지도 모르겠다. 미국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 버니 샌더스는 소수의 상층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탐욕을 비판하며 북유럽의 민주사회주의 모델을 미국에 도입할 것을 선포했다. 실제로 샌더스의 주장들 대부분은 이미 20세기 후반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줄곧 주장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자국의 총리로 ‘민중의 호민관’을 자임한 독일의 빌리 브란트,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 오스트리아의 브루노 크라이스키(왼쪽부터)는 서로를 공동의 사명을 지닌 동지로 여겼다. 한겨레

자국의 총리로 ‘민중의 호민관’을 자임한 독일의 빌리 브란트,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 오스트리아의 브루노 크라이스키(왼쪽부터)는 서로를 공동의 사명을 지닌 동지로 여겼다. 한겨레

인물이 있어서 가능한 현대 정치

샌더스의 등장으로 단순히 민주사회주의 정책과 강령에만 관심을 가질 것은 아니다. 역사의 행위자인 정치가에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계급이나 인종이나 젠더 차별의 구조적 압박을 제쳐두고 현대 정치를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구조나 관계는 항상 특정 행위와 결정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정치를 이해하려면 제도나 구조 못지않게 정치가를 살펴야 한다. 정치가의 개성과 태도, 행위와 덕목, 자질과 능력에 대한 미시적 관심도 중요하다.

이때 마키아벨리의 ‘여우’니 ‘사자’니 하는 군주 이야기, 또는 막스 베버의 신념윤리니 책임윤리니 하는 기묘한 구분으로 현대 정치를 설명하는 것은 유익하지 않다. 현대 정치의 역동성은 그런 식의 싱거운 단순화와 초보적 이분법을 훌쩍 넘어버렸다. 20세기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최근의 다양한 전기 연구와 서술은 그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20세기 후반 유럽을 면밀히 관찰했던 토니 주트는 “대중민주주의가 그저 그런 평범한 정치가들을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항상 예외는 있었고, 그 작은 예외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은 잠시 행복했다. 1970년대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황금기를 벼렸던 ‘삼총사’ 이야기다. 독일의 빌리 브란트,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브루노 크라이스키. 이 ‘샌더스의 선배들’은 20세기 후반 안정과 번영의 유럽을 빚었다. 샌더스가 새 생명을 잇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민주사회주의 정치가의 전통이다.

빌리 브란트(1913∼92)는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서독 총리였고, 브루노 크라이스키(1911∼90)는 1970년부터 1983년까지 오스트리아 총리, 올로프 팔메(1927∼86)는 1969년부터 1976년까지 그리고 다시 1982년에서 1986년까지 스웨덴 총리를 역임했다. 1970년대 전반기 그들은 모두 자국의 총리로 ‘민중의 호민관’을 자임했다. 아울러 이 ‘유럽 좌파 트리오’는 모두 오랫동안 자국 사민당의 당수로 독보적 카리스마를 누렸고 매력을 발산했다.

이 ‘좌파 트리오’는 서로를 단순히 같은 정치 노선을 공유한 외국 지도자쯤으로 보지 않았다. 서로를 진정으로 아꼈고 참된 동지로 여겼으며 공동의 사명을 의식했고 협력하며 일했다. 그런 의미에서 진실로 ‘삼총사’였다. 브란트의 제안으로 그들은 서로 편지를 교환하고 두 차례 만나 함께 토론한 뒤 민주사회주의 정책 구상을 책()으로 출간했다. 일국적 차원을 넘어 그들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주도해 민주사회주의 이념을 세계로 확산하며 국제정치를 바꾸고자 실험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과 관련해서 그들은 당시 민주사회주의 이념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자유의 가치를 옹호하며 소련식 공산주의와 비판적 거리를 유지했지만 맹목적인 전투적 반공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자본주의 위기를 인정하며 그것을 극복하려면 ‘더 많은 민주주의’와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기업과 경제는 국가의 민주적 통제를 받아야 하고 사회에 대해 공동체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소득불평등에 항상 주목했고 적극적인 노동정책과 노동조합 옹호, 사회적 연대와 신뢰의 구축을 강조했다.

[%%IMAGE2%%]출생은 달라도 지향은 같았다

유럽 냉전의 갈등 극복을 위해서도 삼총사는 한마음이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이야 너무 유명하니 빼면, 팔메의 스웨덴과 크라이스키의 오스트리아는 이 시기 유럽 평화의 조정자 역할을 만끽하며 ‘소국의 힘’을 과시했다. 팔메와 크라이스키는 세계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자국의 오랜 역사를 끊었다. 정치 지도자가 국제정치에서 능동적이고 독특한 역할을 보여주니 그 국가의 시민들은 오랜 불안과 위축감을 털고 새로운 종류의 자신감과 소속감을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좌파 ‘톱 트리오’는 유럽을 넘어 중동에서도 미국으로부터 벗어난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모색했다. 다만 미국의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는 팔메만이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반전시위에 참가했다. 1980년대 브란트와 팔메가 세계의 부국과 빈국 간의 경제적 격차와 그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적 관심을 환기했고, 크라이스키는 다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이때 크라이스키와 팔메는 팔레스타인의 고통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아랍 지역의 종교적·영토적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유럽에도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팔메는 심지어 아프리카에도 큰 관심을 가졌고 자신이 삼총사의 막내로서 이 대륙의 문제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겠다고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30년 전, 즉 1986년 2월28일 막내는 형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고 돌아오던 밤거리에서 암살됐다. 아직도 진상은 밝혀지지 못한 채 추모만 깊다. 올해는 더욱 그럴 것이다. 유럽과 세계가 지금 겪고 있는 많은 위기들은 모두 팔메가 예견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삼총사의 삶의 역정이 꼭 일치하지는 않았다. 브란트가 ‘사생아의 사생아’로 태어나 굴곡 많은 노동자 집안에서 어렵게 성장했던 것에 비해, 크라이스키와 팔메는 ‘금수저’를 갖고 태어났다.

크라이스키는 오스트리아 빈의 부유한 사장집 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지적 관심과 정의감이 높았기에 쉽게 저항적이 되었다. 그는 이미 학생 시절 사회주의 청년 조직과 사민당에 가입했다. 순전히 당에 보탬이 되기 위해 법학을 공부했으며, 구금 경험과 비합법 활동을 통해 사회주의 정치가로서의 결기를 다졌다. 그러나 유대인이었기에 위기에 처해 1938년 빈에서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그는 그곳에서 또 다른 망명객 브란트를 만나 평생의 우의를 다졌다.

당시 스톡홀름에는 이 두 명의 반파시즘 투사 외에 또 한 명의 민주사회주의자가 성장하고 있었다. 팔메는 은행장 할아버지와 기업가 아버지를 둔 보수적인 대자본가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어머니는 독일-핀란드 가계로 귀족 출신이었다. 팔메는 어릴 적부터 다방면에 지적 관심을 보였고, 6개 언어에 능통했으며,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엄친아’였다. ‘엄마의 열성’과 ‘조기 교육’이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다고 해야 할까?

부잣집 도련님이 좌파 정당의 지도자가 된 것을 둘러싸고 팔메 연구자들 사이에 논쟁이 좀 있었다. 스웨덴 ‘강남 좌파’의 출현을 설명하는 틀로 흥미로워 보이는 것은 ‘문화급진주의’(헨릭 베르그렌)라는 개념이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세계와 삶에 대한 탐구 정신, 그리고 진보와 계몽에 대한 낙관적 믿음은 모든 종류의 무지와 야만에 대한 저항의 중심인 좌파 정당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최소한 팔메와 크라이스키의 인생 역정을 설명해주는 방식으로 상당히 적절해 보인다.

“여러분의 힘을 자각하세요!”

그렇게 성장한 민주사회주의 삼총사는 새로운 방식으로 정치를 일굴 줄 알았다. 그들은 모두 대중에게 친근감과 신뢰를 쌓았다. 삼총사는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줄 알았고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소통하고 조응할 줄 알았다. 크라이스키와 팔메는 시민들 누구라도 전화를 걸면 자신과 통화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브란트는 평소에는 너무 오래 숙고하고 ‘햄릿’처럼 결정을 주저해 참모들의 속을 썩였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작은 행동 하나로 사람들의 간절함에 화답할 줄 알았다.

브란트는 애초 ‘독일의 존 F. 케네디’로 불렸지만 정치적 성공과 독보적 카리스마로 모두를 능가하는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팔메는 모든 방면에 박학다식했고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유창하고 품격을 지니며 말할 줄 알았다. 외모와 비극적 죽음이 유사해 팔메는 ‘스웨덴의 로버트 케네디’로 불린다. 하지만 팔메의 경우 의문에 싸인 죽음이 멋진 정치가로서의 삶을 가릴 수 없다. 크라이스키는 팔메나 브란트 같은 독서광은 아니었지만 비서와 참모들에게 매일 몇 권의 책을 직접 골라주며 요약하고 인용할 말을 찾아올 것을 지시했다. 그는 우파 언론인도 존경한 좌파 인물이었다. 오스트리아 정치는 크라이스키 전과 후로 나뉠 뿐이다.

1992년 9월 브란트는 세상을 뜨기 직전 마지막 편지를 베를린에서 열린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대회에 보냈다. 이미 몸이 무거워져 참석 못한 채 대독하도록 했다. 유언이었다. 브란트는 동지들에게 보내는 유언을 다음과 같이 맺었다. “여러분의 힘을 자각하세요!”

미국 시민들 상당수가 샌더스에게 몰려드는 것은 바로 그들이 ‘자신들의 힘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연설이나 토론을 보면 샌더스가 1970년대 유럽의 ‘선배’들만큼 카리스마적 매력을 발산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의 말에 열광하고 삶에 감동한다. 1970년대 유럽의 세 선배처럼 그도 삶을 통해 진정성을 보여주었고 일관된 말과 행위로 신뢰를 주기 때문이다. 정치가의 카리스마나 매력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현대 정치에서 카리스마는 정치가의 ‘초자연적 특성’도 아니고 지배의 정적인 형식도 아니다. 정치가로서의 매력도 천성적 자질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치가가 대중과 소통하고 상호작용을 하며 만들어가는 역동적인 것이다. 그러니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제안했듯이, 정적인 카리스마 개념보다는 사회적 관계와 상호작용을 포괄할 ‘카리스마화’라는 말이 현대 정치를 이해하는 데 더 적당하다.

특히 민주사회주의의 가장 돋보이는 별들은 나 홀로 빛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시대의 어둠을 뚫고 대중에게 말을 걸었다. 다시 대중의 말을 듣고 신뢰를 형성하며 서로 반짝였다. 별처럼 항상 그 자리를 지킨 것도 사실 그런 별을 기다렸던 대중에게 힘이 되었다. 사람들의 간절한 열망과 소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민주사회주의의 새 ‘호민관’이 등장할 것이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는 원래 ‘사총사’ 얘기다. 잘 알려져 있듯이, 소설에는 더 큰 활약을 벌이는 다르타냥이라는 주인공이 따로 있었다. 미국의 샌더스가 뒤늦게 ‘총사를 꿈꾸는’ 다르타냥이 되어 민주사회주의의 미래를 새롭게 열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른다.

마지막 주인공, 시민의 자각

다만 소설과는 달리 현실에서 ‘삼총사’는 홀연히 등장하지 않는다. 카리스마와 매력을 지닌 비범한 정치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것이다. 샌더스는 묵묵히 자신의 민주사회주의 정치를 일구어왔다. 그럼으로써 이제 그는 미국 시민의 상당수를 자신의 정치 광장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묵묵했던’ 샌더스를 ‘돌풍 샌더스’로 만든 것은 그의 알려지지 않은 비범함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미국 시민들의 평범한 자각과 열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브란트의 말대로, 우리도 ‘우리의 힘을 자각하자!’. 그러면 혹시 아는가? 고통받는 사람들과 소통하며 분명한 전망을 제시하며 “우리 앞에 멋진 날들이 펼쳐질 것입니다”라고 말할 새로운 ‘총사’를 우리도 보게 될지. 1968년 팔메가 그랬던 것처럼.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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