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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핀란드, 작은 나라의 큰 역사

1975년 여름 핀란드 헬싱키에서 출발한 평화와 인권의 유럽 비둘기호
등록 2015-07-18 18:55 수정 2020-05-03 04:28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5년 7월31일, 8월1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유럽안보협력회의가 열렸다. 이때 동서 양 진영의 33개 나라 정상들은 ‘최종의정서’ 체결을 통해 ‘인권 존중’과 ‘국경 및 체제 존중’을 맞바꾸는 헬싱키 정신을 선언하고 제도화했다. 위키피디아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5년 7월31일, 8월1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유럽안보협력회의가 열렸다. 이때 동서 양 진영의 33개 나라 정상들은 ‘최종의정서’ 체결을 통해 ‘인권 존중’과 ‘국경 및 체제 존중’을 맞바꾸는 헬싱키 정신을 선언하고 제도화했다. 위키피디아

대통령은 총리에게 그의 아내가 너무 뚱뚱하니 살을 좀 빼야 하고 아내에게 맵시 있는 모자도 사서 씌워주라고 지시했다. 총리는 난감했다. 멋진 모자야 어찌어찌 얹겠지만, 네 명의 아이들을 돌보느라 몸매 관리를 하기 어려웠던 아내에게 갑자기 살을 빼라니? 그래도 대통령의 긴급한 명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6주의 시간이 있었다. 총리 부인은 6주 동안 굶고 걸으며 8kg의 살을 뺐다. 마침내 총리 부인은 “1m도 더는 걸을 수가 없었고 우울한 기분”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는 멋진 모자를 쓰고 행사를 잘 치렀다. 1975년 여름 핀란드 헬싱키에서의 일이었다. 대통령은 우르호 케코넨(1900∼86)이었다. 그해 6월13일 케코넨에 의해 총리로 임명돼 임시 내각을 이끌던 이는 케이요 리나마(1929∼80)였고, 자신의 몸과 씨름하며 우울해진 아내는 피르코 리나마였다. 행사는 유럽안보협력회의 ‘최종의정서’ 체결을 위한 정상 회의였다.

작은 나라가 큰 행사를 치르느라 그렇게 용을 썼다. 케코넨 대통령은 그해 초 부인과 사별했기에 총리 부인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해야 했는데, 대통령은 국빈 접대 자리에 더 멋진 핀란드의 외양을 자랑할 요량으로 총리 부인에게 다이어트를 명했던 것이다. 대통령도 나름 욕을 봤다. 1975년 7월28일부터 29일 이틀 동안 케코넨은 31개국 외국 정상들을 헬싱키 공항의 붉은 카펫에서 맞이하느라 진땀을 흘렸는데, 당시 그는 75살의 노인이었다. 이를테면, 그는 29일 정오께 비행기에서 내린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와 악수를 나누자마자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이 막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달받고 한걸음에 달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그때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와 외상 그로미코가 비행기가 아니라 열차를 타고 헬싱키로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달됐다. 케코넨은 헬싱키 공항에서 중앙역으로 내달려 모스크바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하고는 다시 공항으로 돌아오며 가쁜 노년의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피르코의 다이어트와 케코넨의 거친 호흡

다행히 사흘 동안 열린 국제회의는 성공했다. 비록 피르코의 필사적인 다이어트와 케코넨의 거친 호흡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지만, 1975년 여름 헬싱키는 유럽 평화사와 세계 인권사의 큰 봉우리가 되었다.

헬싱키가 유럽 평화사의 출발지로서뿐 아니라 세계 인권사의 거점으로 발돋움한 것은 1975년 8월1일의 ‘최종의정서’ 때문이다. 동서 양 진영의 33개국 정상들은 ‘인권 존중과 국경 및 체제 존중’을 맞바꾸는 ‘헬싱키 정신’을 선언하고 제도화했던 것이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국가들은 일찍부터 서방국가들이 제2차 세계대전 뒤의 국경을 인정하고 체제를 공식적으로 존중하기를 원했다. 반면 서방국가들은 동유럽 국가들로부터 인권과 자유로운 이동과 여행, 정보 접근권을 인정받고자 했다. 헬싱키 최종의정서는 이 두 핵심 내용을 담은 10개 항의 원칙(바스켓1) 외에 경제와 학문 등의 분야에서 협력을 규정한 내용(바스켓2), 인도적 문제를 위한 협력과 인적 접촉 및 정보 교환을 위한 협력 원칙의 천명(바스켓3)으로 구성됐다.

애초 이런 종류의 유럽 공동회의를 발의한 것은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었다. 소련의 몰로토프 외상은 1954년부터 수차례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공동의 안보회의를 통해 유럽 분열과 냉전의 해결책을 찾자고 주장했다. 1966년 3월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다시 유럽 공동안보회의 구상을 끄집어 올렸다. 이어 같은 해 7월에는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들이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모여 브레즈네프의 유럽안보회의 제안에 무게를 더했다. 당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자신들을 ‘제국주의-전쟁 세력’에 대항하는 ‘민주주의-평화 세력’으로 보았다. 그렇기에 평화 공세는 그들의 집단적 정치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기도 했다. 그것에 맞서 또는 조응해서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미국의 존슨 대통령과 서독의 브란트 외상, 벨기에의 하르멜 외상도 각기 긴장 완화를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사이에 무엇인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유럽 데탕트의 시곗바늘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럽안보협력회의 등을 주도하고 ‘약자의 위력’을 발휘하며 자국의 실리를 챙기고 평화사에 족적을 남긴 우르호 케코넨 전 핀란드 대통령. 위키피디아

유럽안보협력회의 등을 주도하고 ‘약자의 위력’을 발휘하며 자국의 실리를 챙기고 평화사에 족적을 남긴 우르호 케코넨 전 핀란드 대통령. 위키피디아

헬싱키에 깔린 유럽 데탕트의 멍석

그러나 대화와 협상은 항상 시간이나 정세가 아니라 행위자와 행동을 더 필요로 한다. 또 막연한 호의나 관심이 실제 우의와 협력으로 이어지려면 중재와 멍석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안보 문제의 해결을 둘러싼 유럽 데탕트 정치의 돌파구는 동쪽과 서쪽이 아니라 북쪽에서 왔다. 멍석이 깔린 곳은 헬싱키였고, 중재자는 바로 케코넨이었다.

1969년 5월5일 케코넨은 유럽 30개국과 미국, 캐나다에 공식 서한을 보내 소련이 제안한 유럽안보회의의 개최를 위해 핀란드가 중재에 나설 수 있으며 회의 개최를 위해 각국 대표단을 헬싱키로 초대한다고 발표했다. 인구 500만에 불과한 작은 나라의 담대한 중재안이었다. 이때 핀란드는 단순히 소련의 옛 제안을 무심히 반복하거나 그저 전달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케코넨은 애초 소련이 유럽안보회의에서 배제했던 미국과 캐나다를 회의 참가국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며 회의를 위해 어떤 종류의 전제 조건도 내세우지 않아야 함을 강조했고, 회의 주제도 안보 문제를 넘어 다양한 협력으로 확대하는 데 이바지했다. 핀란드는 곧 모든 수신 국가들로부터 긍정적인 답을 받았다. 케코넨은 1970년 1월 랄프 엥켈이라는 외교관을 특사로 보내 모든 국가들의 의중과 입장을 살펴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잘 준비했다. 1972년 11월22일부터 1973년 6월8일까지 헬싱키에서 유럽안보협력회의의 준비 회의와 협상 회의가 열렸다. 또 다른 중립국인 스위스가 팔을 걷고 나섰고 오스트리아도 그냥 있지 않았다. 그렇게 이른바 ‘유럽의 중립-비동맹(N+N·Neutral and Non-aligned) 국가’들은 유럽안보협력회의의 성공을 위해 다양한 제안과 중재를 통해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비록 핀란드와 중립국들이 이 회의를 시종 주도하거나 이끌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초기 국면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헬싱키 회담의 준비와 개최 및 최종의정서의 합의와 체결은 ‘약자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과정이었다.

핀란드가 그렇게 나선 데는 사연이 없지 않다. 핀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독일과 소련 양쪽으로부터 번갈아 공격과 압박을 받아 만신창이가 되었다. 비록 핀란드는 전후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1948년 4월 초 소련과 특별한 ‘우호·협력·상호지원 협약’을 맺었다. 핀란드는 소련의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주권을 지닌 독립국의 지위를 보장받았고 동서 냉전 사이에 중립국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당시 비판가들은 핀란드가 나토 동맹국이 되지 않은 채 중립국이란 이름으로 소련의 심부름꾼 역할이나 첩자 노릇을 한다며 의심했다. 그들은 ‘핀란드화’라는 말을 만들어 조롱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핀란드 모델’은 오히려 탈냉전의 새로운 전범으로 자리잡았다. 핀란드는 정치·사회적으로는 서구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체제를 받아들였지만 외교적으로는 소련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또 다른 중립국인 스위스나 오스트리아와도 매우 달랐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핀란드는 소련과 특별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소련의 안보 이익을 옹호해주면서도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지 않았고 오히려 서방과 경제협력과 문화 교류를 강화했다. 그 중심에는 1957년에 대통령이 된 뒤 핀란드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케코넨 대통령이 있었다. 그는 자유주의 계열의 중앙당 소속이었지만 탁월한 지도력과 친화력으로 곧 모든 정당으로부터 지지를 받으며 연임해 25년 동안이나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외교적 중립 노선과 소련과의 우호 관계를 시종 옹호했다.

그러나 1969년부터 1975년 여름까지 케코넨이 핀란드를 유럽 평화정치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데에는 두 가지 특별한 배경이 있었다. 먼저, 실용주의 관점이다. 사실 케코넨은 소련보다는 독일이야말로 유럽 평화의 위협 세력이라고 간주했다. 그는 대통령 재임 기간 일기를 남겼는데, 그것에는 반독일적 생각이 여과 없이 적혀 있다. 심지어 서독의 위대한 평화정치가 빌리 브란트에 대해서도 케코넨은 ‘나치 친위대처럼 말한다’고 인상을 남겼다. 그가 보기에, 독일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 여전히 프로이센 군국주의의 계승자였다. 후배 정치가들에게 케코넨은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그 발원지는 다시 독일일 것이라고 못박았다. 케코넨의 핀란드가 1973년까지 동·서독 모두와 공식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중립을 지향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와 같은 독일에 대한 거부와 불신 때문이기도 했다.

유럽 평화정치 중심지가 된 핀란드

그렇지만 헬싱키 회담을 준비하면서 케코넨은 두 독일 국가와 관계를 정상화했는데, 그것을 통해 자국의 국제 정치적 위상과 경제적 실익 모두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서독과의 협력은 핀란드의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소련으로부터의 독립과 자존을 유지하는 데도 긴요할 것이라고 보았다. 케코넨은 그것을 위한 국제정치의 명목적 조건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유럽안보협력회의는 바로 그가 찾던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1970년대 핀란드인들은 앞선 때와는 다른 자의식을 가졌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핀란드인들은 다른 중립국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안보에 위기를 느끼며 자신들을 냉전의 주변적 섬으로 생각하며 위축됐다, 그러나 패권적 대결에서야 강대국이 폼 나지만 평화적 공생을 위해서라면 소국도 강국이 되는 법이다. 1970년대 초 핀란드의 헬싱키는 스위스의 제네바와 오스트리아의 빈과 함께 유럽안보협력회의를 중재하며 평화 정치의 수도로 거듭났다. 케코넨은 바로 그런 핀란드인들의 새로운 ‘평화 사도’로서의 자의식을 강화하고 주도했던 것이다.

1955년 4월 말 인도네시아 반둥의 봄이 화사함을 뽐내다가 꽃잎처럼 흩어졌다면, 1975년 7월 말 핀란드 헬싱키의 여름은 유라시아 대륙 ‘극서’의 모든 ‘차가움’을 녹일 만큼 뜨거웠다. 일전에 알렸듯이, 반둥에서 아시아-아프리카 29개국 유색 인종의 대표들은 탈식민과 탈냉전의 뱃고동을 울리며 항해에 나섰지만 곧 망망대해에서 북극성을 찾지 못하며 표류했다. 반면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나고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5년 7월30일에서 8월1일 사이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모인 ‘무색’ 인종의 33개국 대표들은 탈냉전 ‘비둘기호’에 무사히 탑승했다.

‘헬싱키 프로세스’라고 불린 그 유럽 평화 협상의 여정은 탈이 없지 않았다. ‘철의 장막’을 뚫고 가야 할 비둘기호인지라 들러야 할 간이역이 많았고, 더러는 새로 길을 내야만 길이 보였다. 출발지는 분명했지만 종착점은 불명확해 창밖은 자주 캄캄했다. 그러나 어찌됐든 1975년 여름 헬싱키에서 출발한 유럽 비둘기호는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1977∼79), 스페인 마드리드(1980∼83), 스웨덴 스톡홀름(1984∼86)과 오스트리아 빈(1986∼89)을 거쳐 1990년 11월19일 프랑스 파리로 무사히 입성했다. 파리에 모인 유럽과 북미의 국가 정상들은 ‘새 유럽을 위한 파리 헌장’을 통해 ‘대결과 분열의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민주주의, 평화 그리고 단결을 유지하고 증진시키기 위해 우리는 헬싱키 최종의정서의 10대 원칙에 충실하기로 엄숙히 맹세한다”고 밝혔다. 비록 그 뒤 선보인 유럽 ‘통일호’가 기관 고장으로 지금 그리스 아테네에서 오도 가도 못해 모두가 망연자실하고 있지만, 40년 전 헬싱키에서 유럽의 비둘기호가 멋진 궤적을 그리며 출발하던 장관을 잊을 수는 없다.

서울이 헬싱키가 되는 정치적 상상을!

40년 전 헬싱키가 선보인 평화 정치는 공산주의 체제의 인권 개선이 비방이나 규탄이 아니라 체제 인정과 경제협력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는 지혜를 드러냈다. 그러한 상호 인정과 존중을 통해서만이 규범적 차원에서 공산주의 국가에 인권 존중을 압박할 수 있음을 확인해준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패권적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약자의 위력’이 어떻게 발휘될지 살피는 것이다. 아시아에는 핀란드와 스위스가 없다고 탓할 수만은 없다. 서울이 헬싱키가 되고 광주가 제네바가 되는 정치적 상상이 필요하다. 평화 정치의 역동성이 작동될 때 비로소 우리 정치가들도 의미 있게 바빠질 것이다. ‘용기가 고통의 일부를 이겨내고 인내가 나머지 고통을 이겨낸다’고 핀란드 속담은 말한다. 평화 부재를 이겨내는 일상의 지혜인데 이것이 정치의 덕목이 되어야 한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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