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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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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안전한 거리는 없다

테러리즘이 바이러스처럼 번지는 시대, ‘세계내전’의 지구촌… 응축된 시간으로 21세기 1/4분기 끝나
등록 2015-12-24 18:56 수정 2020-05-03 04:28

21세기 1/4분기가 끝났다. 역사가 연대기라면 21세기는 아직 15년을 헤아리겠지만, 역사에서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연속된 시간)가 아니라 카이로스(Kairos·주관적 시간)다. 프랑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의 말대로, 역사적 시간은 사회적 형성물이기 때문이다.
인간 삶의 전환과 연속의 계기는 단순히 시간의 물리적 흐름에 따르지 않고 역사적 의미를 응축한 특정 사건에 의거한다.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말대로, 1989∼90년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국제 냉전의 종식은 ‘단기 20세기’의 종언을 뜻했다. 그 뒤 지금까지 인류가 겪은 25년은 21세기가 얼마나 위험하고 고통스러울지 선보였다. 아마도 앞선 세기보다 이 세기는 더 험한 ‘극단의 시대’이거나 더 거친 ‘폭력의 세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1991년 걸프 전쟁 때만 하더라도 이제 무장 충돌은 탈냉전기 ‘역사의 종말’로의 이행기 현상쯤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로부터 비롯된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 전쟁, 르완다 내전과 수단 내전 및 그 과정에서 발생한 ‘인종청소’와 대량살상은 이번 세기가 20세기와는 다른 종류의 ‘새로운 전쟁’(메리 캘도어)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드러냈다.
유고에서 뉴욕을 거쳐 파리로

프랑스 파리의 바탕클랑 콘서트홀 앞에서 한 남성이 존 레넌의 <이매진>을 연주하고 있다. 주말에 벌어진 파리 테러는 더 이상 지구촌 어디에 있어도 일상이 안전하지 않다는 공포를 드러냈다. AP 연합뉴스

프랑스 파리의 바탕클랑 콘서트홀 앞에서 한 남성이 존 레넌의 <이매진>을 연주하고 있다. 주말에 벌어진 파리 테러는 더 이상 지구촌 어디에 있어도 일상이 안전하지 않다는 공포를 드러냈다. AP 연합뉴스

이 전쟁과 살상은 전통적 국민국가의 폭력 독점이 무너지고 정치적 지배의 정당성이 붕괴되면서 발생했다. 그것은 국민국가의 형성과 강화 또는 제국의 패권 구축을 위한 전통적인 20세기형 전쟁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 ‘새로운 전쟁’은 21세기 초엽 지역 질서의 혼란과 국제정치의 불안을 배경으로 등장한 무장의 사유화에서 비롯됐다. 그것은 전통적·문화적 소속을 배경으로 한 정치적 정체성이 삶의 불안과 공포를 이용해 타 집단에 대한 증오와 파괴 본능을 강화하는 현상으로 확산될 것임을 예시했다.

곳곳에서 순식간에 새로운 선동가들이 등장했고 무기 시장은 호황을 누렸다. 민족 소속감과 종족 정체성 내지 종교와 역사에 대한 낡은 서사가 급속도로 이데올로기화됐고 군사적 동원의 근거가 되었다. 대결하는 군사조직들은 서로 총질하는 것 못지않게 상대 쪽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했다. 전쟁 수행자와 폭력 가해자들은 ‘인종청소’ 외에는 달리 어떤 구체적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공포와 증오가 조직돼 폭력과 전쟁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역동적이었고 그 속도는 놀라웠다.

그런데 2001년 9월11일의 알카에다 테러와 2015년 11월13일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이슬람국가(IS)의 테러 공격은 이 ‘새로운 전쟁’이 탈냉전기 일부 지역의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21세기 인류가 도처에서 부딪힐 일반적 상황임을 드러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 공격과 이에 대항하는 ‘반테러 전쟁’의 시기가 활짝 열렸다.

이미 9·11 테러 뒤 미국이 ‘반테러 전쟁’을 명목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폭격하고 점령한 것처럼, 프랑스도 러시아와 미국과 함께 시리아와 이라크의 IS 근거지들에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그 폭격이 사실상 효과가 없었다는 것은 금방 알려졌지만,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민간인들의 피해가 있었는지는 아직 잘 모른다. 프랑스의 테러 희생자들에 대한 세계 시민들의 애도와는 무관하게 상황이 나아진 것은 없으며, 안타깝게도 테러 살상과 ‘반테러 전쟁’이 탁구공처럼 오고 갈 듯하다.

테러의 전장, 이라크·아프간

테러주의는 현존 정치체제와 사회질서에 대항하며 불특정 다수를 희생시키거나 상해를 입히는 폭력 전략이다. 테러주의는 폭력 행위를 통해 한편으로는 대중에게 불안과 공포를 확산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조와 지지를 유인하는 투쟁 전략이다.

21세기 이슬람 테러주의는 일면 20세기에 지구 곳곳에서 발생한 테러주의의 연장이었다. 20세기에도 일부 극좌파 조직들에서 사회혁명을 목표로 하는 테러주의가 등장했다. 그때 그것은 주로 일국 내에서 사회체제와 정치질서의 전복을 겨냥한 것이었다. 반면 알카에다와 IS로 대표되는 21세기 이슬람주의 테러조직들은 국제적 연계를 갖고 최신 과학기술을 활용하며 세계 도처에서 전사와 지지자들을 흡인하고 있다.

아울러 이슬람 테러주의는 20세기 극좌파 테러조직들과는 달리 특정 국가나 체제를 넘어서 문명 세계, 즉 이슬람 근본주의를 거부하는 문명 세계 전체를 겨냥하고 있다. 그런 이슬람 테러주의의 희생자들은 특정 국가의 시민에 한정되지 않았다. ‘서구’ 세계만이 아니라 아랍 지역 대부분의 국가와 시민들도 테러의 궤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가장 심각한 테러 현장은 그곳이다. 몇몇 테러주의 연구센터에 따르면, 테러에 의한 희생자 수는 2011∼2013년 매년 1만2500명에서 1만8천 명에 달하는데 그중 80%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나이지리아와 시리아의 주민들이다.

다만 이번 파리 테러 사건의 경우에는 9·11 때와 달리 테러 현장이 공연장이나 극장, 식당, 카페 등 ‘서구’ 시민들의 일상적 삶의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를 비롯한 분석가들이 테러 장소인 미국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가 갖는 상징적 의미, 즉 세계경제 권력의 중심이라는 것을 부각했는데, 이제 지구상에 테러로부터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보드리야르는 당시 ‘테러주의 정신이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고 있다’고 했는데 이제 그 말의 의미가 더 현실로 다가온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유럽의 극좌 테러주의가 최소한 사회 해방이라는 정치 강령을 목표로 삼았다면, 21세기 이슬람 테러주의자들은 테러 행위 외에 지향하는 목표가 분명하지 않다. 물론 그들이 내건 구호는 ‘이슬람 땅’에서 서구 열강을 내몰고 ‘배교자’들의 정권을 무너뜨려 칼리프를 복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치·경제·사회의 건설 강령은 모호하다.

그들은 세계 현실에 대한 총체적 거부를 살상과 공포 유발 말고는 달리 표현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슬람 종교의 ‘순수성’을 도구화하며 ‘성전’을 내세우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강조하듯이 테러주의는 이슬람과 직접 관련이 없다. 세계 전역의 이슬람 단체들은 테러주의를 규탄하고 유럽과 미국의 이슬람 신자들 절대다수는 서구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하며 수용한다. 테러와 반테러 전쟁이 ‘문명 출동’이 아닌 근거 중 하나다.

“나는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레바논 베이루트 남부에서 테러로 숨진 이의 주검을 분노한 주민들이 운구하고 있다. 파리 테러에 앞서 2015년 10월13일, 베이루트의 시아파 밀집 지역에서 이슬람국가(IS)가 자행한 테러로 많은 이들이 숨졌다. REUTERS

레바논 베이루트 남부에서 테러로 숨진 이의 주검을 분노한 주민들이 운구하고 있다. 파리 테러에 앞서 2015년 10월13일, 베이루트의 시아파 밀집 지역에서 이슬람국가(IS)가 자행한 테러로 많은 이들이 숨졌다. REUTERS

이슬람 테러주의는 20세기가 창출하고 21세기가 가속화한 하나의 단일한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모순의 발현으로서 ‘세계내전’의 성격이 짙다. 미국 중심의 패권적 국제 질서가 낳은 세계화의 파괴적 유산과 불평등한 현실에 눈감으며 인습적인 반테러 전쟁을 지속하면 21세기 인류는 ‘새로운 전쟁’의 형식인 이 테러주의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의 ‘반테러 전쟁’이 오히려 세계의 무질서와 테러 행위를 더욱 가속화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만성적인 세계 무정부 시대의 도래가 묵시록적 예언만은 아니다.

때로는 객관적 현실 자체보다 현실에 대한 인지와 해석이 더 중요하다. 파키스탄 출신 미국 시민권자인 파이샬 새자드는 2010년 5월1일 저녁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테러 폭발 시도로 체포됐다. 그는 같은 해 6월21일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유죄를 인정합니다. 앞으로 백번이라도 유죄를 인정할 것입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할 때까지, 미국이 소말리아와 예멘과 파키스탄에서 위협적 공격을 중단할 때까지, 미국이 더 이상 이슬람의 땅을 점령하지 않고 더 이상 이슬람 신도들을 살해하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미국을 공격할 것입니다.”

‘왜 죄 없는 민간인, 특히 어린이까지 죽이려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담담하며 의연했다. “사람들이 그런 정부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국 정부와 민간인을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폭격을 감행할 때 미국은 어린이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성과 아이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들은 모두를 살해했습니다. 나는 내 행위를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미국의 법을 어겼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지하드 전사이고 무슬림 군인입니다. 미국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는 이슬람 지역을 공격했습니다. 그것은 전쟁이고 나는 그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이슬람 테러주의자들의 이런 세계인식과 자기인식에 대해 맞설 수 있는 대안적 전망이 제시돼야 할 것이다. 그들의 맹목적 반미주의나 반서구주의가 얼마나 정당한지도 따져물어야 하지만, 오랜 식민주의와 서구 제국의 패권적 권력 행사가 낳은 ‘역사의 복수’를 껴안을 방법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

테러리즘의 거울 ‘반테러 전쟁’

테러주의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반테러 전쟁’은 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이미 테러주의는 과거 방식으로 영토와 주민을 보유한 특정 국가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에 폭격과 점령을 통해서 해결될 문제를 넘어섰다. 하나의 단일한 세계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초래한 정치·경제적 불균형과 위계적 서열, 모멸과 공포의 양산 체제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반테러 전쟁’은 또 다른 테러만을 영속적으로 낳을 뿐이다.

해결책은 간단치 않다. 다만 영국 런던정경대학의 교수이자 오랜 평화운동가인 메리 캘도어가 주장하듯이, 일국적 안보 모델이나 블록 동맹 모델을 넘어 세계시민주의적 거버넌스의 모색에 유일한 희망이 있다. 파리의 테러 희생자들에 대한 세계시민적 애도를 안보와 평화에 대한 세계시민주의적 접근으로 확장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우리에게도 그것은 단순히 남북한 분단과 동아시아 지역 갈등 이후에 살필 문제가 아니다. ‘하나의 단일한 세계’ 속 무질서의 일부를 구성하는 우리에게도 이슬람 테러주의는 그저 심각한 국제 문제 중 하나가 아니라 이미 세계 내부의 문제다. 오히려 그것을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세계시민주의적 거버넌스에 대한 논의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평화의 지혜가 생겨날 수도 있다.

또 최근 주목받는 폭력사회학의 분석에 따르면, 폭력의 특징은 ‘정상성’의 경계를 넘어서면서 점차 고조되는 경향을 지닌다는 것이다. 정상성의 경계를 벗어나 이탈하면 폭력은 행위자의 사유와 대응 방식을 변화시키며 역동성을 발휘해 이전에는 예상 못한 새로운 상황을 펼친다. 폭력은 불신을 증폭하며 비폭력 상황에서 가능한 모든 ‘정상적’ 의사소통을 중지시킨다. 그 대신 명령과 위협, 공포와 불안이 상황을 지배한다.

폭력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했던 사회적 공간을 전면적으로 변화시킨다. 폭력은 사회의 안전지대를 줄이거나 없애고 ‘폭력 공간’을 창출하고 확대한다. 그리하여 폭력은 애초에는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자가 상승하며 또 다른 ‘경계를 넘어’ 곧 통제 불능의 상태로 나아간다.

지난 수년 동안 이슬람 테러주의와 ‘반테러 전쟁’은 바로 그런 폭력의 경계초월성과 역동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알카에다에서 일부 세력이 떨어져나와 IS를 만들고 이젠 심지어 서로 경쟁하고 대결한다.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국지적으로 행동하는’ IS는 알카에다도 상상해보지 못한 살상과 파괴를 일삼는다.

또다시 크리스마스

반면 애초 미국이 창안했던 ‘반테러 전쟁’에 이제 프랑스와 러시아와 터키가 빠져들고 있다. 또 그들과 여타 아랍 국가들은 모두 반테러 전쟁을 옹호하며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저마다의 이익이 달라 또 다른 갈등을 초래하거나 새로운 불안의 근원이 되고 있다. 폭력은 그렇게 자신의 행위자들을 엮으며 폭력 공간을 확장한다. 그 공간과 시간의 끝이 어디일지 누구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평화와 인권, 상생과 공존의 기제는 폭력이나 전쟁과 달라 가속장치를 갖고 있지 못하다. 고장만 자주 날 뿐이다. 다가올 21세기 2/4분기에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각종 문명 수리 기구들을 단단히 챙겨야 할 것이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모처럼 만나니 잠시라도 ‘밤이 고요’하길 빈다. 100년 전 참호를 사이에 두고 영국군과 독일군이 만들었던 그 ‘크리스마스 평화’처럼 ‘작은 평화’라도 항상 소중하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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