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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하라”

1980년대 만개한 유럽의 대중적 평화운동과 유럽 평화의 거점, 오스트리아 슐라이닝성
등록 2016-09-23 11:00 수정 2020-05-02 19:28
오스트리아 슈타트슐라이닝 평화박물관의 전경.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 슈타트슐라이닝 평화박물관의 전경. 위키피디아

슈타트슐라이닝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남쪽으로 120km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1921년까지 헝가리에 속했던 이곳은 해발 400m의 산지다. 인구는 2천 명 남짓이다. 절대미(美)로 빛나는 빈을 뒤로하고 궁벽진 이곳을 방문한 때는 2012년 7월 초였다. 당시 나는 서울의 한 대학 내 평화연구소에서 근무하던 때라 유럽의 여러 평화연구소를 탐방하고 평화문화 현장을 답사했다.

나토 재무장과 핵위기

슈타트슐라이닝의 중심에는 중세 때 구축한 방어 진지와 성곽이 그대로 남아 있다. 슐라이닝성이라는 곳이다. 그곳에 ‘오스트리아평화연구소’가 있다. 군사 요새이자 전장의 현장이었던 곳에 평화 연구의 거점이 마련된 것이다. 그 연구소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며 유럽 평화학의 중심축을 이룬다.

슐라이닝성에는 연구소 외에 유럽 최대 규모의 평화박물관이 건립돼 흥미로운 전시를 펼친다. 상설전시관은 ‘전쟁이냐 평화냐, 폭력문화에서 평화문화로’라는 표제 아래 전쟁과 정치폭력뿐 아니라 일상 폭력의 원인과 양상을 다루고 동시에 평화를 위한 정치적·문화적 노력을 포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전시관 초입에서 ‘평화’라는 한 단어를 수십 개의 서로 다른 언어 문자로 새긴 동판을 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감흥이 일었다. 2시간가량 전시를 가로질렀다. 평화를 위한 숱한 고투의 역사와 미래 전망을 한눈에 담으니 ‘평화 능력’이 솟는 듯했다.

슐라이닝성 건너편 주택가에 자리한 평화도서관은 작지만 알찼다. 바로 그 옆의 유엔평화대학도 방문객을 평온하게 이끌었다. 게다가 당시 마을은 ‘여름평화아카데미’로 법석댔다. 매년 7월 첫쨋주 한 주일 내내 연례 평화 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슐라이닝성은 애초 여타 유럽인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정작 오스트리아인들에게도 낯선 지명이었다. 슐라이닝성이 느닷없이 평화문화의 거점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82년이었다. 당시 서유럽은 유례없는 대중적 평화운동의 파고를 경험했다. 발단은 서독과 미국의 안보 정치가들이 추진한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핵 재무장 추진이었다. 1970년대 국제정치는 미국과 소련 간의 데탕트와 동서 유럽의 화해협력 정치로 잠시 빛을 발했다. 그러나 여전히 미온적이던 평화정치는 전통적 안보관에 기초한 냉전의 위협과 공포정치를 끝내지 못했다. 데탕트의 화려한 수사와 제스처 너머에서 미국과 소련의 군사무기 기술은 계속 발전했고, 그러는 한 양편 모두 상대에 대한 의심과 불안을 줄이지 못했다. 안보로 평화를 대신 말하는 정치가들은 항상 최악의 상황을 그려냈고 ‘만반의 준비’를 강조하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군사적 균형’을 내세우며 ‘군사적 대응’을 추진하기 바빴고 그 귀결은 ‘군사적 위기’밖에 없었다. 상대도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1970년대 신종 무기 발전의 속도와 동력은 이미 1972년 5월 미국과 소련이 체결한 전략무기제한협정(SALT·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을 뛰어넘었다. 특히 1976년 8월 소련이 사정거리 5천km에 달하는 신형 SS-20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하자 서유럽의 안보 정치가들은 ‘군사적 균형’을 요청하며 미국이 이 문제에 적극 대응하길 바랐다. 1979년 12월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나토 ‘이중 결정’을 통해 한편으로는 소련과 협상을 지속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퍼싱II와 순항미사일의 배치를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재무장’을 둘러싼 뒤이은 국제 긴장과 유럽 사회 내부의 갈등, 즉 ‘핵위기’는 유럽과 세계 전역에 다시 검은 냉전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조직 뛰어넘은 평화운동의 물결
1981년 옛 서독의 수도 본에서 시민들이 반핵 시위를 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81년 옛 서독의 수도 본에서 시민들이 반핵 시위를 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당시 소련의 공세에 너무 유약하다는 비판에 몰린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는 서유럽 정치가들보다 더 단호해졌다. 1980년 10월 미소 간 겐프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났다. 곧 카터보다 더 강경한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이 되어 서방의 최고 ‘안보’ 지도자로 등장했다. 소련은 이 나토 재무장을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초기에 동독 주둔 소련군의 감축과 중거리 무기의 후방 배치 등 일정한 양보안을 통해 나토 재무장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실패하자 곧 단호하게 대응했다. 소련 정치지도부는 1970년대 성공적인 데탕트 외교의 끝에 들이닥친 나토 재무장으로 다시 수세에 몰렸다고 의식했다.

특히 레이건 행정부의 고삐 풀린 소련 비난과 공세적 성격의 전략방위구상(SDI)은 소련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기에 1980년대 전반 소련 지배 엘리트들은 최고 지도자의 공백 속에 미국과 나토의 핵 선제공격을 우려해 비상경계령을 발동하며 핵전쟁이 발발할지 모른다는 실제 위기감과 공포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특히 대한항공 여객기가 미군 정찰기로 오인돼 소련군에 격추됐던 1983년은 냉전 시기 중 ‘가장 위험한 해’였다.

이 새로운 핵 재무장 대결과 위기에서 유럽은 전례 없는 ‘대중적’ 평화운동을 맞이했다. 유럽 평화운동의 역사에서 1980년대가 특별한 것은 그것이 일부 운동단체나 정치조직을 넘어 일반 시민들의 능동적 참여와 관심을 수반했다는 사실이다.

서독의 경우 사민당 다수파나 녹색당뿐만 아니라 집권 여당인 기독민주연합과 자유민주당 내에서도 재무장 반대 세력이 존재했고 교회와 노조와 지역사회 등에서도 비판과 저항은 강했다. 그들은 새로운 종류의 저항문화, 즉 자유로운 의복 착용과 춤과 팝음악이 뒤섞인 축제풍의 집회, 언론매체의 주목을 겨냥한 의식적인 소통 방식과 인간띠 잇기 같은 저항 양식의 개발, 작가와 예술가들의 동참을 통한 평화예술 축제와 대안언론을 통한 저항운동 확산 등을 선보였다.

아울러 나토 재무장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은 일국적 경계를 넘어 초국가적 네트워크와 상호 교류를 통해 위세를 드높였다. 유럽 각국의 평화운동은 연사를 서로 초대하고 유럽 도시 간 동시 다발 또는 연속 평화 집회를 개최하며 협력과 교류를 발전시켰다. 특히 반공주의가 비교적 약했던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평화운동이 고양됐다.

내 앞마당이 고요하더라도

물론 나토 재무장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보면 유럽 평화운동은 성공 사례가 아니다. 그렇기에 유럽 평화운동이 냉전 해체에 직접 공헌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1980년 전반 유럽 평화운동은 1984∼85년부터 진행된 미소 간 군축 대화와 탈냉전 분위기 형성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1984년 레이건은 미국과 유럽 시민들의 핵무장 중지 요구 여론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에서 고르바초프라는 개혁가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유럽의 평화운동을 빼고는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다.

냉전 종식의 평화정치에 압박을 가한 것과 별도로 당시 평화운동은 안보관의 근본적 전환과 새로운 평화문화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안보 만능주의 정치가와 지식인들은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願平備戰·원평비전)는 로마의 격언을 무슨 큰 지혜인 것처럼 초든다. 그러나 그런 유비무환을 내세운 위협정치와 군비 강화는 긴장과 위기, 오해와 공포의 악순환을 가져올 뿐이다.

그에 반해 1980년대 유럽 평화운동을 통해 나온 새로운 준칙은 ‘인과적 평화주의’다. 즉,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하라!’(願平備平·원평비평). 독일의 평화학자 디터 젱하스는 “민주주의를 원한다면서 독재를 준비할 수 없는 것처럼, 평화를 원한다면서 전쟁을 준비할 수는 없고 평화를 가능케 하는 요인들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속 가능하고 안정적인 평화는 원평비전의 악순환이 아니라 원평비평의 건설적인 평화문화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슐라이닝성 평화센터’를 발의하고 주도한 인물은 게랄트 마더라는 오스트리아의 지방 정치가였다. 그는 중앙무대의 저명한 지도자는 아니었고 슐라이닝이 속한 부르겐란트주에서 주의원을 역임하고 주정부에 잠시 참여했을 뿐이다. 마더가 1982년 슐라이닝성을 평화의 거점으로 만들자고 발의하고 슈타트슐라이닝 주민들이 자신의 작은 마을에 온갖 종류의 평화기구와 행사를 갖추는 데 쉽게 동의한 이유는 바로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하라’는 새로운 평화관 때문이다.

1980년대 초 나토의 핵 재무장과 유럽 냉전의 재격화가 중립국인 오스트리아의 산간 마을을 직접 위협에 빠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슐라이닝 주민들은 내 앞마당이 고요하다고 해서 내 생명과 삶이 안전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미사일은 모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 마을과 도시가 그렇게 ‘평화를 준비’하면 누구도 그곳을 군사기지나 전략 거점으로 만들 생각을 갖지 못한다.

이미 넘치고 있는 살상무기를 줄이지도 못하고 이미 산재한 군사기지를 없애지도 못한 채 한반도 남쪽 끝에는 해군기지가 들어서고 중남부에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가 들어설 위기에 처했다. 안보전략가니 군사전문가니 하는 위험한 ‘멍텅구리’들은 그렇게 ‘전쟁을 준비해야 평화가 보장된다’고 요설을 설파한다. 이대로 계속 가면 한반도 곳곳에 군사기지와 방어 요새가 넘칠 것이다. 제주 강정이든 경북 성주든 김천이든 그것에 맞선 ‘대중적’ 평화운동이 질기게 이어져야 할 것이다.

평화의 ‘최적지’를 선점하자

다른 한편으로 그 멍텅구리들이 ‘전쟁을 준비’할 ‘최적’의 땅을 찾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한반도 곳곳에 ‘평화를 준비’하는 것은 어떨까? 해안은 해안이라 산지는 산지라, 남쪽은 남쪽이라, 북쪽은 북쪽이라 모두 평화의 ‘최적지’다. 도처에 평화를 주제로 한 박물관과 도서관과 아카이브를 짓고, 평화교육 아카데미를 열고 평화연구소를 건립하고 평화박람회를 마련하고, 평화 감성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평화문화 행사들을 개최해버리자. 전국에 평화전시회를 순회시키고 ‘평화의 날’을 제정하고 ‘평화도시’를 선포해버리자. 그러면 과연 그 멍텅구리들이 ‘전쟁을 준비’할 ‘최적지’를 찾을 수 있을까?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이동기의 현대사 스틸컷’ 연재를 마칩니다. 좋은 글 보내주신 필자와 칼럼을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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