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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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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의 보색은 녹색이다

몽상이라 조롱당한 탈핵을 현실로 만든 독일 녹색당… 착취적 성장, 권위적 좌파와 맞서온 풀뿌리의 힘
등록 2016-04-14 08:32 수정 2020-05-02 19:28

빨강의 보색은 파랑이 아니라 녹색이다. 빛을 분사한 스펙트럼의 색환에서만이 아니라 색깔이 지닌 상징적 의미에서도 그렇다. 물론 색깔의 상징적 함의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었고 보색끼리 꼭 대립하는 의미를 가질 이유도 없다. 그러나 빨간색은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오랫동안 금지나 위험을 뜻했다. 반면 그 보색인 녹색은 적어도 유럽에선 위반 및 전복을 대표했다. 그러다 뉴턴의 스펙트럼 실험 뒤 18세기에 색의 분류와 의미 부여가 정착되면서 빨간색의 보색으로서 녹색은 허가나 자유를 뜻하기 시작했다. 1868년 영국 런던에서 교통신호등이 등장했을 때부터 빨강은 통행금지, 녹색은 통행허가를 지시하며 보색의 사회적 의미가 정착됐다.
생태, 풀뿌리, 비폭력, 반권위

1983년 2월 요슈카 피셔(왼쪽 두 번째) 등 독일 녹색당의 주요 활동가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1983년 2월 요슈카 피셔(왼쪽 두 번째) 등 독일 녹색당의 주요 활동가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물론 1848년 2월 혁명 뒤 빨강은 줄곧 급진좌파를 대변하고 체제 거부를 함축했다. 하지만 21세기 전반 한국의 지배 정당은 정치적 색깔의 보편적 의미를 전복해 다시 금지와 배제의 본래 의미를 드러냈다. 한편 녹색은 애초의 전복이나 허가의 의미를 넘어 20세기 전반에는 자연과 생명과 평온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윽고 20세기 후반 일부 대안 정치세력들은 녹색을 아예 당명으로 채택하며 전복의 지향과 생명의 가치를 표현했다. 그 녹색 정치가 가장 크게 위세를 발휘한 곳은 독일이다.

1980년 서독 카를스루에에서 출범한 녹색당의 가장 큰 정치적 성공은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사민당이 주도한 적-녹 연정에 하위 파트너로 참여한 때다. 현재 녹색당은 독일 전체 16개 주 가운데 8개 주에서 주정부의 연정에 참여하고 있다.

심지어 독일 남서부의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서 녹색당은 2011년부터 현재까지 제1당 지위(2011년 주선거에서 24.2%, 2016년 3월 주선거에서 30.3%의 지지 획득)를 유지하며 주정부를 이끌고 있다. 2013년 연방의회 총선에서 녹색당은 8.4%를 얻어(2009년 총선에서는 10.7%) 현재 독일 연방의회 631석 중 63석을 차지해 제4당(기독민주연합과 사민당은 연정을 구성해 집권, 제3당은 64석을 차지한 좌파당)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정치적 성공과는 별도로 녹색당이 이룬 가장 의미 있는 성취는 무엇보다 탈핵이다. 2011년 6월 독일 연방정부는 그해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직면해 2022년까지 원자력발전소를 전면 폐쇄하고 재생 가능 에너지로 전환할 것을 공표했다.

1980년 녹색당이 그것을 핵심 강령으로 제안했을 때 기성 정당들은 모두 ‘몽상’이라고 비웃었는데, 이제 독일에서 탈핵은 현실이다. 녹색당의 노력이 없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전환이었다. 유럽의 가장 큰 공업국가인 독일이 탈핵 사회로 진입함으로써 이제 유럽의 탈핵 지대는 더욱 확장됐고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을 대변한다.

1980년 1월 녹색당은 “생태적, 사회적, 풀뿌리 민주주의적, 비폭력적” 삶으로의 전환을 주장하며 등장했다. 그러나 창당 당시 녹색당은 강령뿐 아니라 당의 존속 자체가 의문시됐다. 조롱과 경시가 보수우파 정당에서만 나오지도 않았다. 1979년 “나는 녹색운동이 제도에 안착하는 데 성공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전망한 사람은 다름 아닌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사민당 청년위원회 대표였다. 그는 나중, 즉 1998∼2005년에 사민당 소속 총리로서 녹색당 소속의 외무장관 요슈카 피셔와 함께 적-녹 연정을 이끌었다.

피셔는 창당 1년6개월 뒤에야 입당했지만 1983년 독일 연방의회에 진입한 녹색당 의원의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녹색당의 의원직 로테이션 원칙에 의해 자리를 물려준 뒤 1985년 12월 헤센주에서 사민당과 녹색당이 연정을 구성할 때 환경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당시 그는 주의회의 장관 서약식에 양복과 구두가 아니라 재킷 차림의 평상복을 입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었는데, 그것 또한 당시 서독의 ‘엄숙한’ 정치문화에 큰 충격이었다.

녹색 정치가들은 권위에 도전하는 저항과 인습을 거부하는 운동권 문화를 이어갔다. 녹색당은 ‘반정당의 정당’으로 등장했고 상당 기간 ‘운동정당’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최근 녹색당의 정체성 위기와 체제 내화를 보면서 실망할 수도 있지만, 초기 녹색당의 활력과 ‘담대한 실험’들을 하찮게 볼 수는 없다.

슈미트 총리 ‘사실상 창립자’

흔히 녹색당의 창당을 서독 ‘68운동’과 1970년대 신사회운동의 흐름과 연결시키지만, 사실 녹색당은 초기에 매우 이질적인 여러 세력들이 모인 곳이었다. 녹색당사 연구자인 질케 멘데의 분석에 따르면, 1980년 다섯 가지 정치적 네트워크가 녹색당에 결집했다.

먼저, 오른쪽에는 보수적 자연보호주의자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가장 먼저 독자 환경 정당의 창당을 발의했고 녹색당의 초기 역사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보수 정당인 기독민주연합의 연방의원이었던 헤르베르트 그룰은 이라는 베스트셀러로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고, 반근대적 보수주의를 대표하며 자연보호 운동의 대표 이론가였다.

두 번째는 공산주의의 억압적 명령 체제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에 기초를 둔 서구적 자유주의 문명과도 거리를 두며 대안적인 ‘공동체’의 삶과 ‘제3의 길’을 찾았던 흐름이었다. 비교적 연장자 세대인 그들은 1960년대 후반 청년 세대의 봉기를 지켜보며 새로운 정치적 사회화의 동력을 찾았고, 그들의 자극을 통해 녹색당으로 들어왔다.

세 번째는 다양한 세대의 반권위주의 세력이었다. 전후 초기 다양한 정치적 경험과 급진화를 통해 저항정신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초기 평화운동의 발의자와 1950년대 사민당의 초기 이탈자들도 이에 속한다.

넷째, 가장 많은 당원들을 제공한 것은 비교조적 좌파였다. 1968년 청년 봉기의 경험과 기억을 공유한 이 좌파들은 사민당을 거부했고 공산주의 여러 정파 조직과도 거리를 두었다. 사민당은 그들에게 기성 체제의 일부에 불과했다. 또 그들은 교조적 이데올로기에 빠진 공산주의 정파 조직들을 비판하며 중앙집중적이고 관료적이고 패권적인 급진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과 부분에서 자치 조직과 모임을 결성하며 새로운 풀뿌리 정치를 실험했다.

마지막으로 교조적 좌파 조직들이 해체되면서 모여든 급진 세력이다. 그들은 1970년대 후반 일부 극좌 그룹의 테러의 충격과 조직 간 끝없는 당파 투쟁에 지쳐 정체성을 상실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대안적 정치 세력화의 중심으로 등장한 녹색당은 새로운 정치적 삶의 근거를 제공했다.

이질적 흐름에서 발원하긴 했지만 그들은 모두 소비사회와 산업문명의 파괴적 위험에 대해 위기 인식을 공유했다. 그들은 1970년대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불안을 겪으며 ‘경제성장 신화’의 한계를 보았고 ‘영원 무구한 번영’이 신기루일 수 있음을 자각했다.

한 가구에 한 명씩 활동가
2015년 3월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녹색당 주지사 빈프리트 크레치만(가운데)이 지자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REUTERS

2015년 3월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녹색당 주지사 빈프리트 크레치만(가운데)이 지자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REUTERS

게다가 사민당도 녹색당 창당의 주요 계기를 제공했다. 1970년대 전반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사회적 활력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후임자인 헬무트 슈미트 총리는 환경문제에 아무 관심이 없었고 전형적인 개발주의의 추종자였다.

특히 슈미트 총리는 1977년부터 당시 소련의 SS-20 중거리 핵미사일에 대항해 서유럽에 지상 발사 크루즈 미사일과 파실 투 핵탄두 미사일을 독일과 서유럽에 배치할 것을 주장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안보를 내세워 평화를 유린한 주장이었기에 서독에서 평화운동의 파고가 크게 일었다.

평화 의제는 녹색당 내 이데올로기적 이질성과 정치적 차이를 무마하며 사민당 정부와의 경계를 뚜렷하게 부각하는 통합적 기능을 수행했다. 그렇게 하여 생태적 전환과 평화의 삶을 지향했던 ‘녹색인’들은 사민당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슈미트 총리야말로 ‘사실상 녹색당 창립자’라는 말이 틀리지는 않다.

생태적 전환의 삶에 대한 발견과 평화 지향도 결집 동력이었고 사민당에 대한 불신과 실망도 촉매 요소였지만, 그 이질적인 세력들을 녹색당으로 결집하게 한 진정한 힘은 다른 것이었다.

하나는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과 연대의 경험이었다. 1970년대 사민당 정부는 핵에너지를 경제 발전과 현대화의 원천으로 삼으며 친원자력 정책을 유지했다. 핵발전소 건설이 증가했다. 그러나 이미 1970년대 초부터 핵발전소의 위험을 자각한 지역 주민들과 환경보호 운동은 본격적으로 원전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지역마다 핵발전소 예정 부지를 점거하는 운동이 등장했고 전국적 연대 운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1975년 핵발전소 건설 예정지인 뷜에는 서독 전역에서 3만 명의 시위자가 몰려와 9개월 동안 점거시위를 지속했다. 뒤이어 브로크도르프와 그론데에서도 원전 건설 반대 운동에 결집이 일었고, 1977년 칼카에서 고속증식로 건설 반대 운동에도 수만 명이 뛰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시위대는 내전을 방불케 하는 물리적 대결을 펼쳤다. 시위대에는 부상자와 구속자가 속출했다. 또 1979년 고어레벤을 중심으로 한 핵폐기장 부지 건설 반대 시위에는 10만 명의 시위대가 참가하며 강력한 저항과 대결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경험한 경찰의 폭력은 지역 주민과 원전 반대 운동가들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깊게 남겼다. 국가권력에 맞선 공동체적 결속의 경험과 함께 인적 접촉의 네트워크는 고스란히 녹색당의 창당과 약진의 밑거름이 되었다.

두 번째는 풀뿌리 조직의 힘이다. 연방 차원의 녹색당 창당은 다양한 풀뿌리 조직과 단체들이 지역에서 발의한 과정의 결과였다. 통계를 둘러싸고 논란은 좀 있지만, 1970년대 서독에는 대략 1만5천 개에서 2만 개의 주민단체와 자치조직이 존재했다. 그중 3천∼4천 개가 주로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애썼다. 1979년 이런 자치단체나 조직에 참여하는 서독 시민의 수는 180만 명에 달했다. 그것은 당시 서독 기성 정당들의 전체 당원 수를 능가하는 규모였다.

더 많은 집단적 경험 거쳐야

1980년대 초 대부분의 서독 가정에는 주민단체와 자치조직에서 활동하는 가족 구성원이 한 명쯤은 있었다. 그 시민들이 모두 녹색당원이나 지지자였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녹색당이 기성 정당의 지배적 질서를 깨고 ‘제3당을 노리는 제4당’으로 안착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런 시민적 토대가 결정적이었다.

독일인들에게 뷜과 브로크도르프와 고어레벤은 원전 반대 운동의 결연함을 상기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가의 폭력성을 확인하는 기억의 장소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겐 그런 곳이 너무 많다. 서울 용산, 제주 강정, 경남 밀양, ‘4대강’ 사업과 숱한 노동 해고의 현장들. 국가가 폭력과 기만 외에 달리 가진 것이 없음을 드러낸 세월호 참사와 ‘그 후’.

그러나 달리 보면, 우리에겐 이미 생명 존중과 평화 공생의 대안적 삶을 추구하고 그것을 전면에 내건 정치 흐름을 지지할 이유가 넘친다. 다만 독일 녹색당의 창당 과정에서 보듯, 국가의 폭력에 맞짱 뜨며 얻은 고통과 결속의 집단적 경험을 넘어 더 많은 풀뿌리 조직과 자치단체들이 등장해 대안정치와 녹색 삶의 실험을 보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짧은 기간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겠지만- 아니기에 더욱더- 나는 ‘빨강의 보색은 녹색’이라고 맺는다. 아, 물론 당내 권력을 둘러싼 패권 다툼을 이유로 자기 당을 뛰쳐나가 지역주의에 눌러앉아 바동거리는 ‘가짜 녹색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족이 필요하다니!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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