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진짜 보상은 강연 때 만나는 청년들입니다.” 필로메나 프란츠 할머니는 자신의 강연에 귀를 쫑긋하는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에게 자기 생애사를 들려주기를 좋아한다.
필로메나는 1922년 독일 남서부 비버라흐에서 ‘집시’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첼로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가수였다. 부부는 일곱 남매를 두었고 유복했다. 길거리 악단이 아니라 슈투트가르트와 베를린의 근사한 공연 무대에 초청받는 유명 음악가 가족이었다.
기억, 책임, 미래
비둘기 같은 필로메나 프란츠 집안에 나치의 폭압이 덮쳤다. 1938년 필로메나는 다니던 슈투트가르트의 고등학교에서 쫓겨났다. 인종적 이유 때문이었다. 1939년 나치는 집시 탄압을 강화했다. 필로메나의 부모는 악기와 자동차를 뺏겼고, 곧 가족 전체가 강제수용소나 노동 막사로 내몰렸다.
17살 필로메나는 슈투트가르트의 군수공장으로 끌려가 노동해야 했다. 1943년 필로메나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로 보내졌다. 다행히 한 친척의 도움으로 그는 그 절멸(絶滅)수용소에서 라벤스브뤼크 노동수용소로 옮겨졌다. 노동수용소는 절멸수용소와는 달리 일단 노동을 통해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필로메나는 그곳 탄약공장의 중노동을 견디다 못해 탈출을 시도했다. 발각되어 만신창이가 되도록 맞고 고문을 당한 뒤 다시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가스실로 들어가기 직전 요행으로 살아남은 필로메나는 라이프치히 근처인 비텐베르크시(市)의 한 공장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일하다 탈출한 뒤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10명의 가족 중 나치의 폭압에 살아남은 이는 그를 포함해 3명에 불과했다. 파괴된 삶의 터전에서 필로메나는 새롭게 일어서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필로메나는 아우슈비츠에서 의료실험의 대상이 되어 몇 주 동안 정기적으로 주사를 맞았는데 전후에도 그 후유증으로 마비 증상을 겪으며 오랫동안 고통을 떨쳐내지 못했다.
필로메나의 강제노동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진 것은 2000년 8월2일 독일에서 ‘기억, 책임, 미래 연방재단’이 설립된 뒤의 일이었다. 필로메나는 강제노동에 대해 7천유로, 생체실험에 대해 6700유로의 보상금을 각각 수령했다. 필로메나는 자신이 당한 희생과 노역에 비해 보상금이 너무 적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연을 통해 역사를 증언한다. 강연 때 만나는 청년들을 통해 오히려 더 큰 보상을 받는다고 말한다.
‘기억, 책임, 미래 연방재단’은 나치 시기 강제노역에 몰렸던 사람들을 위한 물질적 보상을 위해 설립됐다. 물론 전후 서독은 나치 독일의 점령과 범죄로 피해를 본 나라들에 수차례 배상했다. 1952년 9월10일 당시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는 ‘룩셈부르크협정’에 서명해 이스라엘에 30억마르크의 현물을 배상금으로 지급하고, 유대인 희생자 단체들을 대표하는 ‘대독 유대인 청구권 회의’에 4억5천만마르크의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서독은 10여 년에 걸쳐 약속을 이행했다.
또 1959년부터 1964년까지 서독은 11개 서방국가들과 각기 협정을 체결해 배상금을 지급했으며, 1975년에는 폴란드와 협약을 맺어 나치 독일에 청구권을 가진 폴란드인에 대한 연금과 사고 보험기탁금 13억마르크를 지급했다. 소련은 이미 동독으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대신해 공장과 자본 설비를 이전해갔다. 하지만 통일 국면에서 독일은 다시 소련에 180억마르크를 보상금으로 지급했다.
아울러 서독에 거주하는 나치의 희생자 집단들, 특히 유대인을 비롯해 정치나 종교를 이유로 박해를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물질적 피해에 대한 보상 조치가 이어졌다. 1953년 10월1일의 연방보상법과 1956년 6월29일의 연방보상법은 나치 독일로부터 박해를 받은 희생자에게 물질적 보상과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고 그 범위를 점차 넓혔다.
전후 기업도 분담한 사회적 책임이와 같은 독일의 배상 정책에도 불구하고 집시와 동성애자, 탈영병, 강제노동자는 오랫동안 수혜자가 되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에야 비로소 이들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증대했고 피해 보상에 대한 주장이 제기됐다.
독일 기업들도 개별적으로 자신들의 나치 과거사에 대한 역사적 정리 작업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일부 기업은 이미 1988년 ‘대독 유대인 청구권 회의’ 쪽에 배상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의 극히 일부였을 뿐이다. 왜냐하면 나치 시기 강제노동자의 대다수는 당시 동유럽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강제노동’ 전력은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에서 오랫동안 조국에 대한 배신이나 나치에 대한 동조의 증표로 간주됐기에 그것에 대한 언급이 사실상 금기 사항이었다.
독일 통일과 냉전 해체 뒤인 1990년대 독일에서는 강제노동자 문제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증대했고 물질적 보상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 문제 해결에 결정적 자극을 준 것은 미국 내의 움직임이었다. 미국의 유대인 피해자 단체는 미국 정부의 지원으로 독일 기업들에 집단 보상 소송을 준비했다. 독일 기업들은 그 법적 분쟁을 꺼렸다. 나치 시기 강제노동자에 대한 보상 문제는 곧 독일과 미국뿐 아니라 동유럽에서도 정치적 이슈로 등장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 문제의 급박성을 알렸다. 나치 시기 강제노동자 중 대다수, 즉 열 중 아홉은 이미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런 국내외 압력에 직면해 1998년 가을 집권한 사회민주당(사민당)과 녹색당의 좌파 연립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 나섰다.
이미 그해 총선 기간에 두 당은 강제노동자에 대한 보상을 선거 강령으로 내걸었다.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총리실 산하에 직속 부서를 만들어 역사 연구에 기초해 보상 규모와 방식을 준비하도록 했고 기업들과 협상하기 시작했다.
그 뒤 2년에 걸쳐 독일 정부와 기업, 미국과 동유럽 국가의 정부 대표뿐만 아니라 다양한 피해자 단체들이 모여 격렬한 논쟁과 진중한 협상을 진행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역사였다. 국제적 차원의 역사 정의와 규범을 세우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곧 재단 설립과 활동 방향, 보상의 기준과 규모가 정해졌다. 2001년 6월15일 처음으로 보상금이 지급됐고, 2007년 6월12일 공식적으로 지급 완료가 선언됐다. 230만 명 이상이 보상금 지급 심사를 신청했고 그중 약 165만 명에게 지급 결정이 내려졌다.
독일 연방정부와 기업들은 각각 절반을 부담해 100억마르크(50억유로, 약 7조9700억원)의 기금을 마련했다. 독일 기업들은 납부를 강요받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책임에 근거해 자발적으로 기금을 기부했다. 특히 나치 시기에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던 전후 신생 기업들이 기금을 납부하기도 했다. 그 비율이 전체 6544개의 기업 중 약 40%에 달했다. 1970~80년대 이래 본격화된 과거사에 대한 집단적 학습 과정은 기업가와 경영인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최종적, 불가역적’이지 않은보상금 수혜 대상은 크게 두 범주로 나뉘었다. 먼저, 게토나 수용소로 끌려와 그곳에 구금돼 강제노동에 종사해야 했던 사람들을 A그룹으로 정했다. 그들에게는 1만5천마르크(7670유로, 약 1천만원)까지 지급하도록 했다. 반면 자국에서 독일이나 독일 점령지로 끌려와 자유가 제한된 상태에서 강제노동에 종사해야 했던 사람들은 B그룹으로 정했다. 그들에게는 최대 5천마르크(2550유로, 약 330만원)까지 지급이 가능했다. 역사학자들은 전자를 노예노동자, 후자를 강제노동자로 구분해서 부른다.
165만7천 명의 수급권자에게 총 43억1600만유로(약 6조3070억원)가 지급됐다. 그것으로 이제 독일은 나치 범죄에 대한 배상을 매듭지었다. 나치의 강제노동과 관련해서는 어떤 개별적 법적 소송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도록 국제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렇더라도 독일은 이 보상을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법적 구속력을 지닌 보상은 완료됐지만 정치적 책임에 기초한 재정 지원은 지속되고 있다. 독일은 나치 억압의 희생자 범주와 피해 규모에 대해 개방적이어서 계속 수혜 대상과 지원 방식의 범위를 스스로 넓히며 각종 화해재단을 통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돕고 있다.
아울러 독일은 각종 역사재단과 유관 조직들을 통해 물질적 보상과 함께 기억문화와 역사 교육으로 이 강제노동자의 문제를 다양하게 확산하고 있다. 이를테면, ‘기억, 책임, 미래 연방재단’은 ‘기억과 미래’ 기금을 따로 책정해서 ‘역사와 인권’ 교육을 비롯해 청소년을 위한 토론과 교류 및 장학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독일이 나치의 과거사에 대해 보상하며 과거 청산을 지속하는 이유는 그것을 이미 ‘지나간 유감스러운 일’쯤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전범 국가로서 가해 행위에 대한 반성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인습적 정치 의례나 외교적 면피에 그치지 않으려면 희생과 피해의 고통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독일의 과거사 보상 정책과 과거 청산 작업은 피해 국가나 주민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독일인 자신들의 민주적 정치문화의 발전을 위해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정치폭력의 피해자와 그 후손의 고통과 상흔을 기억하는 것은 역사 속 불의를 집단적으로 인정하는 과정이다. 기억이야말로 정의의 시작이고 책임의 근간이다. 역사적 책임의 가장 중요한 형식은 공동체의 기억문화다.
역사 속 피해자들의 고통은 ‘시간의 지양’(장 아메리)이 필요하다. 고통의 시간을 중단시켜 역사적 시간으로 보존하며(‘기억’), 그것을 현재의 정치문화에 연관시키며(‘책임’), 공동체의 전망(‘미래’)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의 지양’은 기억과 책임이라는 집단적 행위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역사적 책임을 지려면 먼저 기억문화를 통해 과거의 파괴적 흔적을 유지하고 그 건설적 의미를 전승할 필요가 있다. 집단적 기억을 통해 고통은 정의와 책임으로 지양된다. 피해와 고통에 대한 집단적 기억 작업이 없는 물질 보상은 모두를 다시 무책임과 불의의 소용돌이로 내모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미래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닫힌다. 독일의 그 재단 명칭이 ‘기억’과 ‘책임’으로 시작해 ‘미래’로 이어지는 것은 매우 함축적이다.
세기말, 대통령의 사과20세기 전반 나치 시기 강제노동자에 대한 보상을 둘러싼 국제적 논의는 그 세기가 끝나기 며칠 전에 일차 합의에 도달했다. 정치 지도자의 시간이 왔다. 1999년 12월17일 당시 독일 대통령 요하네스 라우는 공식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재단을 발의한 독일 국가와 기업은 과거의 범죄로 인해 발생한 공동의 책임과 도덕적 의무를 다할 것을 선언합니다. 노예노동과 강제노동은 단지 받아야 할 임금을 뺏긴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납치, 근거지 상실, 권리 박탈 및 잔인한 인권유린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돈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님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강제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고통으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자신들에게 가해진 불의가 불의라고 불리기를 원합니다. 오늘 저는 독일의 지배하에서 노예노동과 강제노동을 수행해야만 했던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며 독일 민족의 이름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이런 게 바로 정치 지도자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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