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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지금도

무지와 멸시에 맞선 여성들의 지난한 발걸음… 식민지 통치 정당화에 이용된 이슬람 여성해방운동과 서구 사회의 여성참정권 반대 물결
등록 2016-06-11 06:27 수정 2020-05-02 19:28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여성참정권을 보장하라고 부르짖는 여성들. 유니버설픽처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여성참정권을 보장하라고 부르짖는 여성들. 유니버설픽처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낮보다는 밤이 안전했다. 특히 겨울밤 외진 곳이 더 안전했다. 나는 1999년부터 수년간 독일의 동독 도시에서 공부하면서 네오나치들의 인종주의적 조롱과 물리적 위협을 빈번히 경험했다. 지금은 나아졌지만 당시 동독은 외국인들에게 위험했다. 그때 나는 여름 낮의 대명천지보다는 겨울밤의 칠흑 어둠이 네오나치들로부터 나를 보호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둡고 외진 겨울밤이 더 안전하다고 느낀 이유는 그땐 모두가 두꺼운 외투와 모자로 신체를 덮기 때문이다. 내 피부와 머리 색깔도 가려졌고, 난 더 안전하다고 느꼈다. 그러다 다시 여름, 한 주에도 몇 차례 인종주의 적대 행위를 경험했을 때 ‘아, 부르카나 히잡이라도 착용해야 하나’라고 독백했다.

식민주의자가 부르짖은 여성해방?

독백은 힘들어 대화했다. 그런데 내 경험을 접한 독일 친구들 중 일부는 ‘어디나 이상한 놈들이 있어’, 또는 ‘우리 독일인들도 위험을 느껴’라며 나를 ‘위로’했다. 그들은 동독 지역에 인종주의와 외국인 적대가 ‘사회적 사실’이자 ‘일상적 실천’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피부색 차이에 근거한 조롱이나 위협의 실재만큼 그것에 대한 인지 방식과 해석 태도, 즉 완고한 상대화는 막막하고 당황스러웠다.

서울 강남역 살해사건으로 충격에 휩싸인 ‘어머니들, 딸들, 자매들’이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들의 선언’에 나섰다. 그런데 이 21세기 한국판 ‘올랭프 드 구즈’(프랑스의 여성혁명가)들에 맞선 많은 ‘인간과 시민들’의 ‘무지와 망각과 멸시’ 또한 그렇게 막막하고 당황스럽다.

10여 년 전 겨울밤 온몸을 감싼 채 더 자유롭고 안전하게 동독 도시의 거리를 활보했던 나는, 그 뒤 부르카를 착용한 무슬림 유럽 여성들을 보며 혹시라도 부르카가 성차별적 남성 시선의 보호 장치일 수도 있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그냥 물음이었다. 히잡이나 부르카를 보며 여전히 여성 억압을 떠올리지만, 그것이 등장하게 된 복잡한 맥락이나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인지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 대해 과문해서 여전히 조심스럽다.

과문하지만 과감했던 이들은 따로 있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 서양 제국의 남성 지배자들은 식민지에서 ‘여성해방’을 옹호했다. 이를테면, 영국의 식민 관료들은 인도와 이집트에서 전통적인 여성 억압 전통을 철폐하며 ‘문명화’를 정당화했다. 인도에서 “백인 남자들은 갈색 남자들로부터 갈색 여자들을 보호했다.”(가야트리 스피박) 영국 지배자들은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같이 산 채로 화장하는 힌두 전통인 사티(Sati)의 폐지에 팔을 걷어붙이며 ‘문명화’를 설파했다. 물론 그 뒤꼍에서 영국 제국주의는 피식민 주민들의 저항에 폭력유린과 보복살해, 강제이주와 인신매매라는 야만을 광범위하게 실천했다.

한편, 인도에서 경험을 쌓은 뒤 1883년부터 1907년까지 이집트 총독으로 영제국의 일부를 이끈 에벌린 베링(1841∼1917, 크로머 경)은 여성 억압적인 무슬림 전통을 경멸하고 유럽 문명의 도입을 이끌었다. 특히 그는 공적 영역에서 남녀를 분리하는 관습과 여성의 베일 착용을 유럽식 문명화와 이집트 ‘개혁’의 결정적 장애물로 보았다.

베링이 보기에 모든 악의 근원은 이슬람이었다. 그는 이슬람 사회를 유럽 문명과 비교해 열등하다고 전제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여성에 대한 대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유럽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데 비해, 이슬람은 근본적으로 반여성적이고 그 폐습이 이집트 전체 사회를 약화시킨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집트가 영국인에 의해 종속되고 훈육돼야 한다고 확신했다. 여성 억압 전통을 극복하고 여성이 이슬람으로부터 ‘해방’돼야만 이집트는 문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이집트라는 국가가 강해지려면 여성이 해방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럽식 문명화를 벗어나

베링의 전제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결론은 공유했던 이집트 지식인은 카심 아민(1863∼1908)이었다. 아랍 지역 최초의 남성 페미니스트인 아민은 이슬람을 반여성적이라고 보는 것에 반대했다. 그가 보기에 코란은 오히려 신 앞에서의 양성평등을 강조했고 다만 여성 억압은 나중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민족들의 퇴행적 전통 탓이라고 말했다.

귀족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뒤 카이로대학 건립에 참여했던 그는 이집트와 아랍 지역 여성의 베일 착용을 강력히 비판했다. 서구적 근대화의 맹신자였던 그는 여성의 베일 착용을 여성해방의 장애물이고 민족 발전에 가장 심각한 걸림돌이라고 보았다. 아민은 서구적 근대화 과정의 필연성을 옹호했고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여성의 베일 착용과 남녀 분리 문제만을 부각해 아랍 문화와 이집트 민족의 후진성을 탓했다는 면에서 서구적 편견을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가졌다. 아울러 아민이 국가와 민족의 강화를 위해 여성해방을 내세운 논리도 사실 베링의 것이었다.

반면 이집트의 선구적 여성운동가 말락 히프니 나시프(1886∼1918)는 영국의 이집트 식민화를 비판하며 민족주의운동에 동참했다. 나시프는 서구 문화를 수용해 피식민 국가가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에 반대했다. 고유한 관습의 유지와 문화적 정체성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나시프도 기본적으로는 여성의 베일 착용에 비판적 태도를 가졌고 이집트 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옹호했다. 그는 심지어 베일을 벗은 얼굴로 사진을 찍어 공개한 최초의 이집트 여성이었다. 아울러 사회적 조건이 무르익으면 베일 착용 폐지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시프는 이집트와 아랍 지역은 고유한 근대화의 길을 추구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고 보았다. 나시프는 베일을 착용한 여성을 거리에서 조롱하고 위협하는 이집트 남성 근대화론자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도 아끼지 않았다.

나시프가 보기에 영국 제국 지배자 베링과 이집트인 근대화 동조자 아민은 여성해방에 진정한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서구적 편견에 사로잡혀 식민화 구실과 정당화를 찾는 기만적 인물들임에 불과했다. 물론 나시프의 입장에 당시 이집트 여성운동가들이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은 ‘이슬람 페미니즘’의 발원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그 뒤 무슬림 여성의 베일 착용과 여성해방을 둘러싼 ‘백년전쟁’의 원형이 이때 등장했다.

한편, 나시프의 비판대로, 영국 총독 베링은 이집트에서 교육정책을 통해 자신의 반근대성과 반여성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미 이집트에는 영국의 지배 전 오스만제국 시기부터 공립학교의 무상교육과 장학금 제도가 정착돼 있었는데 베링은 그것을 없애고 공납금 제도를 도입했다.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의 교육 기회도 현격히 줄었다. 베링이 공납금 제도를 도입하며 내세운 이유는 교육받고자 하는 이들은 그것에 대한 경비를 지급하는 것으로 그 의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핑계였다. 무상교육 확대로 민족주의 감정이 고양돼 식민 통치에 방해될 것을 우려한 조치였을 뿐이다.

여성참정권 반대에 전력 투구한 남성들

20세기 초 영국에서는 근대 학문의 모든 성과가 여성참정권 반대표를 던지기 위해 동원됐다. 한겨레

20세기 초 영국에서는 근대 학문의 모든 성과가 여성참정권 반대표를 던지기 위해 동원됐다. 한겨레

흥미로운 것은, 베링처럼 ‘갈색 여성을 갈색 남성들로부터 보호’하며 문명을 자랑하던 제국의 남성 지배자들이 자국에서는 오히려 여성 권리의 강력한 반대자였다는 사실이다. 1910년 이집트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뒤 베링이 몰두한 것은 여성참정권 운동 반대였다. 그는 여성참정권을 혐오하며 ‘전국여성참정권반대동맹’ 결성에 참여했다. 인도 총독을 지내며 마찬가지로 ‘갈색 여성들을 보호’했던 조지 커즌 경과 ‘백인의 짐’이란 시로 식민화를 정당화한 시인 러디어드 키플링도 그곳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영국에서 19세기 후반부터 수십 년 동안의 합법적 청원 노력으로 전개됐던 여성참정권(서프러제트·Suffragette) 운동은 20세기 초 전환이 필요했다. 보수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참정권에 우호적이라고 여겨졌던 자유당이 1906년 1월 총선에서 유례없는 승리로 집권했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실망한 서프러제트 급진파들은 투석과 폭탄과 방화, 감옥에서의 단식 투쟁으로 완강하고 처절했다. 영화 가 보여주듯, 그 투쟁에 맞선 것은 지배 엘리트들만이 아니었다. ‘무지와 망각과 멸시’를 드러낸 이들은 사회와 가정에서 함께 호흡하던 남자 사람들, 즉 ‘인간과 시민들’이었다. 근대 학문의 모든 성과가 여성참정권의 부당함을 역설하기 위해 동원됐다. 여성참정권을 저지하는 서명운동은 더욱 확대됐다. 심지어 상당수 여성들도 자신의 참정권 운동에 반대하고 나섰다.

서프러제트들의 투쟁에 놀라 순식간에 확산된 여성참정권 반대 운동은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구분하며 “국가제도의 작동에 있어 여성들의 몫은 남성에게 부과된 것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에 기초했다. 신체적 차이로 인한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고전적 논리가 체계를 갖추었다. 그들이 보기에 여성에게 합당한 자리는 가정이었다. 자선활동이나 행정 보조를 넘는 정치와 공무는 남성의 몫이었다. 그것에 맞선 서프러제트 운동 투사들의 투쟁은 지속됐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30살 이상 여성 일부에게 선거권이 부여될 때까지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다.

이 대결 과정에서 베링은 제국 지배와 식민지 통치의 경험을 가져왔다. 베링이 보기에 서프러제트들은 ‘남성화된 여성’이고 영국을 약화시키는 위험한 존재였다. 베링은 영국에서 ‘자연에 반하는 투쟁을 용인하고 젠더 관계를 뒤집으면 민족이 허약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 영국에서 여성을 정치적으로 해방하면 식민지 남성들이 영국의 지배 남성들을 존중하겠느냐고 뻗대었다. 그렇게 기괴한 주장은 완성됐다. 인도와 이집트 식민지에선 여성이 베일을 벗고 해방돼야 사회가 발전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영국에선 참정권을 반대하며 여성해방이 민족을 약화시킨다고 말했던 것이다.

역사 속 ‘무지와 망각과 멸시’의 예들은 무한하다. 특히 인종과 젠더 문제에서 그것은 무안하고 무참하다. 그것을 돌이켜 살피는 것이 현재의 ‘무지와 망각과 멸시’를 극복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듯하다. 다만 비판적 역사 서사를 재현하는 과정에서도 오류나 실수는 잦다. 귀 밝은 이들은 이미 영화 가 백인 여성들만의 투쟁을 보여준 것에 당혹스러워한다.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의 대오에서 함께 어깨를 결었던 ‘갈색 여성들’은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 영화는 ‘인간과 시민들’이 ‘여성과 여성시민들’의 ‘자유, 소유권, 안전 그리고 압제에 대한 저항’의 권리에 더 다가가는 데 유익하다.

무안하고 무참한 인종·젠더 감수성

눈을 뜨고 귀를 열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일상적 실천으로서의 억압과 ‘혐오’는 많고도 세다. 몸의 떨림으로 직접 겪지 않은 차별과 위험의 현실에 마음이 향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다른 몸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무심한 조롱과 위협이 궁극에는 내 몸을 겨냥할 수도 있음을 깨닫는 길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 길을 밝히고 터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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