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5일 독일에서는 재독 한인 영화감독인 조성형 교수의 신작 다큐영화 (Verliebt, verlobt und verloren)이 개봉된다. 조 감독은 2006년 독일 북부 시골의 헤비메탈 축제를 다룬 첫 작품 로 독일에서 가장 각광받는 다큐영화 감독이 되었다. 그는 2009년 한국 남해의 독일마을을 배경으로 ‘파독’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을 발표했고, 2015년 여름 이제 새 영화를 통해 ‘고향’과 ‘그리움’의 주제를 완결짓는다.
은 1950년대 동독으로 건너간 북한(조선) 유학생들과 동독 여성들 사이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 한(조)-독 가족들의 이산과 기다림의 이야기다. 이미 국내에도 잘 알려진 독일 예나시(市) 레나테 홍의 사연도 많이 다루어져 있다. 레나테 홍에 대해서는 이미 2007년 초 한국에서도 두 편의 다큐영화가 따로 만들어졌고, ‘북한에 사는 남편을 47년간 기다리며 수절한 동독 할머니’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친화력이 크고 감성이 짙고 유머까지 갖춘 조성형 감독의 작품이 앞의 것들보다 더 깊은 울림을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47년의 기다림 그리고 영원한 이별
조 감독은 작품 소개 사이트(www.verliebtverlobtverloren.de)에서 작업 착수 배경을 알렸다. 거기서 나는 레나테 홍 이야기를 국내에 처음 알린 ‘예나의 한국인 역사가’로 잠시 언급됐다. 그런데 조 감독은 내가 레나테 홍 할머니를 ‘우연히’ 만나 사연을 듣고 알린 것으로 얘기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유명 영화감독의 신작 잔치의 말석에 걸쳐 앉는 느낌이 들어 민망하지만, 이 이야기를 처음 세상에 끌어올린 역사가로서 나도 주석을 좀 붙이고 싶다.
내가 동독 지역 예나시에서 레나테 홍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가을이었다. 1999년 3월 예나에 도착해 독일 유학을 시작한 나는 ‘분단 독일의 국가연합 통일안’에 대해 연구했다. 2002년 여름부터 동독의 문서들을 열람하다 틈틈이 1950년대 동독과 북한의 관계에 대한 기록을 뒤져보았다. 흥미로운 자료들이 넘쳤다. 나는 베를린에서 그 자료들을 챙기는 한편으로, 예나에서는 북한 유학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수소문했다. 그들을 기억하는 동독 주민을 만나는 것이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레나테 홍을 만나기는 그로부터 더 시간이 걸렸다.
1955년 레나테는 예나대학 화학과 동급생으로 북한 유학생 홍옥근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레나테는 1961년 그가 북한으로 돌아간 뒤 두 아들을 홀로 기르며 재회를 기다리며 말라갔다. 2004년 10월 레나테 홍은 당시 한반도 출신의 누군가를 새로 만난 것에 무척 기뻐했다. 나는 레나테 홍의 사연을 정리하는 한편, 함경남도 함흥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된 남편 홍옥근을 만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궁핍한 박사과정 학생으로 고립된 채 지내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2006년 여름 나는 이 사연을 에 알려 도움을 요청했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져주었고, 조성형 감독도 다큐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희망을 피력했다. 그 사이 국내의 한 언론은 이를 ‘특종’(?)으로 세상에 더 크게 알렸다. 곧 독일 외무부도 관심을 가졌다. 독일 정부와 적십자의 노력으로 2008년 7월 레나테 홍은 평양에서 홍옥근을 47년 만에 재회했다. 2012년 9월4일 홍옥근은 레나테 홍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다 사망했고, 얼마 뒤 그의 묘소에 도착한 레나테 홍은 눈물을 떨구며 돌아갔고 예나에서 망부석 같은 기다림을 종결지었다.
이 참담한 냉전의 가족사를 잉태한 것은 1952년 3월29일 중국 베이징 주재 동독대사관에서 이뤄진 한 접견이었다. 당시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 권이직은 동독대사 요하네스 쾨니히를 만나 북한 학생 50명을 동독 대학에서 교육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본국과 상의한 뒤 쾨니히 대사는 북한에 100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다고 알렸다.
1952년 9월 말 북한 유학생 37명이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 여행 끝에 10월30일 동베를린에 도착했다. 그들은 뒤이어 도착한 63명과 함께 1년간 라이프치히에서 독일어를 배운 뒤 동독의 여러 대학으로 흩어졌다. 1956년까지 동독에 들어온 북한 유학생은 357명이었다. 그 외에도 1953년 전쟁고아 600명도 북한에서 동독으로 보내져 집단생활을 하며 공장에서 기술을 익혔다.
동독의 북한 학생 수용과 교육 지원은 곧 ‘사회주의 국제연대’의 모범으로 간주됐다.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랍 지역에서도 동독과 동유럽에 유학생을 보내 ‘근대화 일꾼’들을 위탁교육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1950년대 후반까지 북한 유학생은 동유럽 어디서나 가장 많은 외국 유학생 비율을 차지했다. 이를테면, 북한 유학생은 1956년 동독의 전체 유학생 중 37%를 차지했다. 북한은 ‘근대화’를 위한 교육열을 앞서 선보였고, 동독은 ‘반미 항전’의 모범이던 북한에 아낌없이 지원하며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젊지만 외로웠던 북한 청년들1952년 봄이면 아직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시험을 통해 학생들을 선발해 외국에서 공부하도록 조치했고 전쟁고아들을 챙길 줄 알았다. 이 역사를 살피다보면 도대체 전쟁 중임에도 그런 미래 국가 전략을 구상하고 교육에 투자할 줄 알고 심지어 고아들의 생존까지 챙긴 인물들이 누구인지 궁금하다. 그러나 더 살피면, 그 유학생 ‘파독’ 과정에 경탄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북한 유학생들은 어떤 선택의 자유도 없었다. 그들 모두 당에서 지시한 대로 대학과 전공을 할당받았고, 학업 성취도가 낮으면 당 간부에게 질타를 받았으며 심지어 북한으로 소환되기도 했다. 다만 그들은 서로 전공을 맞바꾸는 방식으로 제한적이나마 나름의 활로를 찾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젊었는데 외로웠다. 또 동독 정부의 환대로 넉넉한 장학금을 지급받아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조건 속에서 지낸 북한 유학생들 중 일부는 열악한 상황의 북한으로 돌아가기 꺼렸다. 90% 이상이 남학생이었기에 곧 그들 중 일부는 동독 여성들과 연애를 하며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눈을 떴다. 1953년 동독과 1956년 헝가리에서는 공산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시위가 격렬했고, 그것 또한 북한 유학생들 사이에서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1956년 6월 드레스덴 근처 프라이베르크대학의 북한 유학생이 서독으로 도주하는 일이 발생해 북한 지도부를 격앙케 했고 동독 정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은 본국의 지시를 받아 사상 교육과 생활 통제를 강화했고, 동독 유학생들을 북한으로 불러 훈계하고 위협했다. 일부 진지한 이들에게는 잠시나마 효과가 있었다. 적지 않은 유학생들은 ‘사회주의 조국 근대화’에 복무하리라는 신념을 다졌다.
레나테 홍의 증언에 따르면, 홍옥근은 북한에 갔다가 돌아온 뒤 2주 동안 자신을 만나려 하지 않고 학업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기회를 엿본 북한 유학생들이 모두 마냥 순진하지는 않았다. 역효과도 발생했다. 북한 유학생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일이 이어졌던 것이다. 특히 1959년 학생 11명이 동독을 떠나 서독에서 새로운 삶을 찾았다. 1961년 8월 베를린장벽이 들어서기까지 도합 20명의 북한 유학생들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갔다.
모두가 정치적 이유로 간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함께 사랑을 나누던 동독 여성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였고, 또 어떤 이는 더 풍요롭고 전망 있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어떤 이는 당 간부인 선배와 다툼이 잦았는데 전공이 같았기에 북한으로 돌아가도 자신을 학대할 것이라는 이유로 서독행을 결정했다. 서쪽으로 넘어간 20명의 생애사가 한결같지는 않다. 물론 명민했을 뿐 아니라 삶의 기회를 잘 포착할 줄 알았던 그들 대부분은 직업적으로 성공했다. 서독과 미국과 한국 등지에서 그들은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또한 냉전과 분단의 족쇄를 달고 다녀야 했고, 굴곡진 삶을 견뎌야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쫓겨나다시피 한 동독 여성들그러나 동쪽에서 서쪽으로 경계를 넘어간 20명의 북한 유학생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참담한 생애사를 가진 주인공 20명이 따로 있다. 동쪽에서 더 동쪽으로 대륙을 건너간 여성들이다. 1961년 4월15일 홍옥근은 북한으로 소환됐지만 둘째아들을 임신하고 있던 레나테 홍은 건강상의 이유로 나중에 북한으로 가려고 예나에 남았다.
그런데 1961∼62년 소환된 남편을 따라 북한으로 들어간 동독 여성 20명의 경우 그곳에서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 문화적 차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동독과 비교해 너무도 열악해진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기 어려웠다. 또 중국과 소련 간의 국제 분쟁은 동독 여성들의 삶에 긴장을 더했다. 북한은 소련과 동유럽의 ‘수정주의’ 이데올로기를 차단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는데, 동독은 당시 소련에 충성했기에 중소 분쟁은 북한에 거주하던 한(조)-독 가정의 삶에 파도처럼 덮쳤다.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일부 동독 여성들은 북한을 나와야 했다.
더욱이 1963년을 전후해 경제적 이유나 가정사 등으로 잠시 동독으로 나왔던 그들에게 북한은 재입국 비자를 발급해주지 않았다. 북한은 동독의 부인과 북한의 남편 사이에 오가던 편지도 끊어버렸다. 동독 여성들은 남편과 연락하기 위해 베를린의 동독 외무부에 아우성을 쳤지만, 북한은 냉혹했고 동독은 무심했다.
동독 외무부의 자료에 따르면, 북한 정부는 홀로 남은 남편들에게 북한 여성과 재혼하기를 강제했고 남편들은 그것을 거부하다 굴복해야 했다. 그중 두 남자는 끝까지 거부하고 가족을 찾아 북한에서 동독으로 탈출하려고 했지만 체포돼 재판에 회부된 뒤 장기 투옥됐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동독 여성이 1974년 아이들을 데리고 북한에서 나온 뒤 그 집단적 가족 이산의 비극은 더욱 짙어갔다. 그들 외에도 동독에는 레나테 홍처럼 북한에 아예 가지 못한 채 남편 내지 남자친구와 이별하고 홀로 자식을 기른 여성도 있다. 동독 여성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이사하지 않고 남편이 기억하는 옛 주소지나 도시를 떠나지 못했다. 레나테 홍은 남편과 재회하기 전까지 매일 혹시나 하며 우체통을 열었다고 전했다.
그렇게 냉전과 분단은 한(조)-독 가족의 삶을 할퀴었다. 그런데 이 냉전의 이산 가족사는 이데올로기 장벽과 정치적 경계의 너머도 아니고 한 진영 내부, 심지어 한때 ‘사회주의 국제연대’의 모범으로 간주된 국가들, 특히 분단의 비극을 함께 짊어진 국가의 주민들 간에 생겨난 것이기에 더욱 안타깝고 격해진다.
1950년대 후반 드레스덴 공대에서 공부했던 최득찬은 1963년 신의주에서 대륙을 횡단해 드레스덴의 가족에게 돌아오려고 모스크바행 기차에 숨어 있다가 붙잡혀 25년형을 선고받았다. 2007년 3월 나는 최득찬의 마지막 탈출 시도와 장기 구금형을 확인해주는 사료 복사본을 그의 아내와 아들에게 전달했다. 드레스덴 엘베 강변의 한 식당에서 그 사료를 보며 처참하게 무너지던 모자를 잊을 수가 없다. 안넬리체 최 할머니는 “그는 몸이 약해 교도소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탄식했다. 뒤이어 아들 우베가 내뱉는 북한에 대한 저주를 나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북한에 상영될 날이 올까?그러나 북한으로부터 ‘까치’가 날아오기를 기다리는 한(조)-독 가족 모임의 회원들은 여전히 모든 것에 조심스럽다. 그곳에 아직 남편과 아버지가 있는 사람들이다. 한반도에 봄이 와야만 그곳에도 ‘까치’가 날아들 것이다.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한반도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 한국만이 아니라 북한에서 상영될 날이 언제 올까? 서로 다른 방향으로 넘어간 각 20명의 두 생애사를 언제쯤 냉전박물관에 전시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를 이데올로기의 송곳이 아니라 냉전적 삶의 치유와 회복 과정으로 다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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