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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인네 85살밖에 안 됐지”



천혜로 장수를 누리는 에콰도르 시골 마을에서 만난 비센테 아저씨의 탐정놀이
등록 2010-12-22 09:52 수정 2020-05-03 04:26

에콰도르 투미아누마 마을의 창고를 빌린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손님 중 한 명은 비센테 아저씨였다. 왜소한 몸집인데다 말투와 표정에서 그가 조금 모자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이곳의 비옥한 땅은 부지런한 사람들에게는 풍족함을 주지만, 그는 일을 하지 않고 매일 술만 마셔 동네에서 알아주는 술주정뱅이였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푼타’(punta)라는 술을 만들어 마셨다. 마을잔치 때 맛본 푼타는 알코올 도수 60도가 넘는 위험한 술이었지만 사탕수수로 만들어 달착지근한 맛에 ‘맛이 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술에 대한 자기 조절이 비교적 잘되는 다리오 역시 잔치 때 마을 아저씨들에게 업혀올 정도였다. 비센테 아저씨는 푼타에 취한 어느 날 고꾸라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부딪혔고 그 뒤로 바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두 아들을 데리고 도망가버려 소식도 모르고 그는 졸지에 부모와 모든 형제의 업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아저씨가 좋았다. 밭일이 끝나고 당나귀를 두고 가면서 아저씨는 항상 밭에서 캔 것들을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언제나 미소 띤 얼굴이었고 가끔 우리가 밥을 차려주면 그렇게 맛있게 먹었다. 바보가 된 그는 일도 열심히 했고 술도 마시지 않는 성실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비센테 아저씨는 낯선 마을을 찾은 이들에게 더없는 친구가 되었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비센테(왼쪽)와 다리오.

비센테 아저씨는 낯선 마을을 찾은 이들에게 더없는 친구가 되었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비센테(왼쪽)와 다리오.

하루는 물이 시원치 않게 나왔다. 길이가 1km도 넘는 호스로 계곡의 꼭대기에서 물을 끌어다 쓰는데, 검정색 고무 호스는 탄탄해서 좀처럼 망가지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도무지 원인을 찾을 길이 없었다. 때마침 온 비센테 아저씨는 아마도 낙엽이 들어가 막힌 것 같다며 호스를 놓은 길을 따라갔다. 우리도 아저씨를 쫓았다. 하지만 상황은 달랐다. 불과 집에서 3분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마체테’(정글에서 쓰는 긴 칼)로 호스를 일부러 끊어놓은 것이다. 그 흔적도 선명해서, 두 번의 시도를 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음,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짐작이 가는군.”

아저씨는 심각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과학수사대(CSI) 형사 같았다.

“이곳을 지나다니는 그 노인네야!”

우리는 매일 보는 백발의 꼬부랑 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유일한 동네 사람이었고, 가끔 마녀 같은 눈초리로 우리를 주시했다.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할머니 밭에 물을 대는 샘은 이맘때가 되면 마르는데 1년 내내 마르지 않는 샘을 가진 우리가 부러워서 그랬으리라는 것이다.

“에이 그래도 그렇지, 말도 안 돼요! 힘없는 할머니가 어떻게 마체테로 호스를 이렇게 단번에 잘라놓냐고요!”

나와 다리오는 황당해하며 웃었다. 그러나 아저씨는 나름 완전 진지해져서 말했다.

“아니야! 그 노인네 나이 얼마 안 먹었어, 남편이 훨씬 나이가 많아.”

“대체 그 할머니가 몇 살이신데요?”

“그 노인네는 아직 젊어. 85살밖에 안 됐지, 남편은 93살이야. 그 역시 아직 밭일을 나간다고.”

우리는 황당했다. 아! 비센테 아저씨가 바보라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렸다.

하지만 이 지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수 마을이었다. 90대 할아버지가 밭일을 하는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비센테 아저씨의 탐정놀이는 그 뒤로도 계속됐다. 어느 날 우리가 집을 비우고 잠시 나간 사이 누군가가 부엌에 있던 음식을 죄다 먹어버렸다. 아껴두었던 과일잼이고 뭐고 모조리…. 그때도 비센테 아저씨는 “누가 그랬는지 짐작이 가는군…” 하며 신빙성 없는 주장을 했다. 배고팠던 동네 아이들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가려 했으나 아저씨는 동네 사람들의 알리바이를 스스로 추측했다. 그가 탐정이었다면 아마 평생 배고프게 살았을 것이다. 그가 농부로 태어나서 참 다행이다.

지와 다리오 ‘배꼽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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