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88만원 세대가 있듯이 스페인에도 밀레우리스타(Mileurista), 1천유로 세대가 있다. 물론 환율로 따져보면 1천유로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말이다. 1천유로가 스페인에서 얼마의 가치를 갖는지는 상대적이다. 1천유로를 버는 독신은 독립을 하기 힘들다.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수도인 마드리드 시내에서 원룸의 월세는 싸게 500유로부터 시작한다. 비싼 공과금과 용돈을 합하면 1천유로로 한 달 생활이 빠듯하다. 한국에서 결혼 전까지 부모와 함께 사는 관습이 있는 것처럼, 스페인에서는 동거를 시작하기 전까지 부모 밑에서 얹혀 지낸다. 한국과 같은 가족공동체의 오랜 관습과는 무관한, 경제적 이유에서다. 스페인에서 동거는 사랑도 사랑이지만 금전적 이유가 우선이다. 동거를 하면 월세와 생활비를 나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스페인의 대표 일간지 에 따르면 30살을 전후한 스페인 젊은이들 중 63%가 부모와 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1천유로 세대를 짓누르는 것은 단순 독립의 문제가 아니다.
스페인에서 밀레우리스타는 이렇게 정의된다. ‘고학력, 외국어 가능, 전문기술을 취득했지만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며, 집도 없고 차도 없고 저축 없이 다달이 살아가는 젊은이 무리.’ 슬프다.
내 친구 후안은 10년째 대학을 다니고 있다. 부담 없는 등록금이기에 천만다행이지 한국에서 10년 동안 대학을 다니면 평생 빚에 허덕이며 살 것이다. 그가 졸업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적이 받쳐주지 않아서기도 하지만, 10년 동안 네 번이나 전공을 바꿨기 때문이다. 그는 10년째 최저임금을 받는 알바생이다. 정년을 넘긴 그의 부모는 마드리드에 집을 세 채나 가지고 있고 지중해가 접한 해변에도 휴가를 위한 집이 있다(스페인에서는 중산층에 속한다). 그는 부모의 집 가운데 월세를 놓지 않은 집이 있을 때 여기저기 며칠씩 옮겨다니며 살고 있다. 집 한 채만 세를 놓아도 후안이 한 달 내내 일하고 받는 임금보다 많지만, 부모는 아들의 빈곤한 삶을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다. 후안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도 그가 최소의 급여를 받아서 단출한 생활을 하지만 그 나이에도 띵까띵까한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부모가 중산층이기 때문이다. 저축이나 내 집 장만의 덫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부모도 1천유로 남짓을 벌어 근근이 생활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오늘도 후안은 학점 채우랴 일하랴 바쁘지만 절박하지 않다.
하루는 춥지 않은 밤공기를 만끽하며 이 골목 저 골목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삐까번쩍한 클럽 앞에서 뭐 재미난 일 없나 하고 기웃거리는데 한 여자가 나오더니 리스트를 들추며 물었다. “다니엘 친구분들인가요?” 우린 다니엘이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엉겁결에 “네”라고 대답을 했다. 우리를 안으로 안내하고 여자는 돌아갔다. 얼떨떨했지만 최대한 그렇지 않은 척 일부러 자신 있는 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지났다. 우리는 유명한 양주회사가 주최하는 VIP를 위한 공짜 파티에 와 있었던 것이다. 모든 술과 음식이 무료였다. 웬 횡재인가 싶었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며칠 뒤 친구 앙헬라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너희 사진이 그 회사 사이트 메인 화면에 떴어.”
초대도 받지 않은 불청객인 우리가 마치 파티의 주인공처럼 찍힌 사진을 보고 한참 웃었다. 우연은 가끔 초현실적인 장난을 친다. 이 장난이 현실이 되어 우리 사회의 소외된 1천유로 세대와 88만원 세대가 잔치의 진짜 주인공이 되는 날이 온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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