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일본도 우리 집이다

기차를 8번 갈아타고 후쿠오카에서 교토까지… 아파트 잔디밭에서 찜통 같은 더위에 캠핑하다 천사를 만나다
등록 2011-05-20 03:01 수정 2020-05-02 19:26
지와 다리오 제공

지와 다리오 제공

무작정 일본에 갈 채비를 했다. ‘청춘18’이라는 티켓을 발견해서, 부산에서 배를 타고 후쿠오카에 도착한 뒤 도쿄까지 싼값에 갈 수 있었다. 문제는 (문제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완행열차뿐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시간밖에 넉넉한 것이 없는 우리에게는 완벽한 여행법이었다. 배 안에서 편안히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오전 10시에 후쿠오카를 출발해서 교토에 도착한 시간이 자정이었으니까 정확히 14시간이 걸렸다. 열차는 수많은 역을 지나쳤다. 짧게는 정거장 세 구역을 지나는 열차부터, 3시간 이상을 가는 열차까지 모두 8번을 갈아탔다. 여행의 설렘으로 가득했기에 그 시간이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작은 역을 수없이 지나쳤는데 이름의 뜻도 알 수 없는 곳들이었다. 밥을 먹으려고 내린 역의 이름 역시 기억나지 않지만, 작은 길이 두 개밖에 없는 마을의 풍경은 내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마을에서 문을 연 유일한 식당에서 다리오는 메뉴 중 가장 싼 ‘야키소바’를, 나는 두 번째로 싼 ‘함바그라이스’를 시켜서 밥 한 톨 하나, 당근 한 조각 남기지 않고 먹어치웠다.

‘오바마’라는 이름의 역을 지날 때 우린 열차 바닥을 뒹굴며 웃었는데, 일본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우스꽝스러운 모양이었다. 힘겹게 웃음을 삼키며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평일 이른 오후 완행열차 안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일종의 ‘열차 오타쿠(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들이었다. 작은 역에서 열차가 잠깐 서는 동안 역의 사진을 찍거나, 100년도 더 되었다는, 차량이 4개밖에 없는 열차의 사진을 카메라에 담느라 바빴다. 풍경은 천천히 지나갔고, 나는 그것들을 놓치기 아까워 잠을 자는 것을 포기하고 열심히 창밖의 영화 같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자정을 15분 넘겨 가까스로 도착한 교토역은 우주선 같았다. 바람 한 점 없고, 후덥지근한 밤공기가 도시를 가득 메웠다. 거대한 비닐하우스에 갇혀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착각까지 들었다. 역 앞에는 노숙자 몇 명이 잠을 청하고 있었다. 절대 홈리스로 보이지 않을 만큼 깔끔했지만 주렁주렁 달린 봉지들이 그들이 집 없는 사람들임을 알려주었다.

치안이 안전한 나라에서 여행할 때 좋은 점은 ‘도시 캠핑’(Urban Camping)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역 앞에서는 결코 여행의 피곤함을 풀어줄 단잠을 잘 수 없다고 판단해 공원을 찾아 무작정 걸었다. 공원까지는 꽤 먼 것 같아 중간에 아파트 단지 사이로 들어갔다. 동네 개들의 화장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작은 잔디밭이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어디든 텐트를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징그러운 밤이었다. 몸은 끈적거리고, 바로 옆에 있는 메마른 강에서 서식하는 모기들은 그날 우리 덕분에 포식을 했다. 자연을 먹여살렸다는 데 의미를 두고 우리는 그 작은 텐트 안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숨이 막힐 듯한 더위 속에서 일어나 모기떼가 모두 사라진 것에 감사하며 텐트 밖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오하요!”(일본의 아침인사)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아줌마가 우리를 보며 먼저 인사를 했다. 아줌마의 포스도 예사롭지 않았다. 한 손에는 어린 개 두 마리를 매단 줄이, 다른 한 손에는 담배 한 개비가 들려 있었다. 개들이 우리를 보고 신나서 발광하는데도 아줌마의 표정은 고요했다. 우리와 대화를 하며 그윽하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전형적인 일본 가정 주부들과 달라 보였다. 분명 그녀는 젊었을 때 놀아본 것 같았다. 그때 2층에 사는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당신, 일본인이야?” 일본인이라고 하면 한 대 때릴 것 같은 눈초리로 우리를 노려보더니, “잠깐 내가 내려갈게”라고 말했다.

잠시 뒤 내려온 아저씨는 봉지 하나를 건네며 날씨가 더워 고생스럽겠다고 무덤덤하게 말하고는 재빨리 돌아갔다. 봉지 안에는 차가운 거봉 한 송이와 우유, 빵이 들어 있었다. 일본의 비싼 과일값 때문에 과일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일본에서 맞는 둘쨋날 내 손에는 한국에서도 못 먹어본 자두만 한 거봉이 들려 있었다. 피로가 싹 가시는 듯했다. 무뚝뚝한 아저씨는 엉뚱한 이방인 둘이 더위를 먹지나 않을까 밤새 걱정한 모양이었다.

지와 다리오 '배꼽 두 개'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