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텅 빈 마드리드 시내에는 외국인 관광객만 들끓었다. 스페인 친구들은 시내가 일본인 관광객으로 가득 찼다고 말했지만 정작 내가 가보니 거의 한국인들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동양인 중에 일하는 사람은 중국인이요, 관광하는 사람은 일본인이라고 나름대로 정의 내린 듯했다. 스페인에서 나는 언제나 ‘차이니스’와 ‘재패니스’ 사이에 낀 존재였다.
‘마드릴레뇨’(Madrilleno·마드리드 토박이)들이 모두 여름휴가를 떠나고 이방인들이 도시의 주인인 양 활보할 때, 나도 마드리드에 있었다. 법으로 꼭 휴가를 떠나야 하는 스페인에서 휴가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은 고향에 돈을 부쳐야 하는 외국인 노동자와 가난한 우리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집에만 있을 수 없어서 우리가 찾아낸 곳이 ‘페드리자’였다.
페드리자는 마드리드 시내에서 40km 떨어진 곳에 있는 국립공원이다. 화강암으로 이뤄진 산맥의 능선을 따라 걸으면 2~3일이 걸린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여름날 시원한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려고 이곳을 찾았다. 주말에는 떠나고 싶은데 돈이 없는 10대들이 배낭 가득히 1유로도 하지 않는 시고 떫은 와인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무가 울창한 평지를 찾아서 걷는 모습이 보였다. 싸구려 와인에 콜라를 타먹는 것이 스페인에서 유명한 ‘칼리모초’(Calimotxo)라는 칵테일이었다. 밤새 파티를 즐기려고 침낭까지 짊어지고 산을 오르는 그들을 보면서 술 한번 마시기 참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마드리드의 여름은 지독히 더웠다.
차를 소유하지 않은 우리는 버스로 이동한 뒤 한참을 걸었다. 다리오는 이 산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해주면서 나를 즐겁게 해주려 안간힘을 썼지만, 40℃가 넘는 땡볕 아래 그늘도 드문 산을 올라가는 게 짜증났다. 그럴 때 우리는 음식과 침낭이 든 가방을 던져버리고 옷을 홀랑 벗고 계곡에 몸을 담갔다. 한여름에도 물이 얼음장 같아서 1분을 채 채우지 못하고 나와 따뜻한 바위에 기어 올라가야 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여름의 평일, 우리는 이 커다란 산의 주인이 된 듯했다.
이곳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모라’ 때문이었다. 모라는 스페인종 뽕나무의 열매 오디로, 여름날 페드리자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우리는 산에서 캠핑을 할 때 음식을 많이 가져가지 않고 대신 모라를 질리도록 따먹고 돌아왔다. 손가락 끝 마디와 입술까지 시퍼런 물이 들 만큼 먹고도 달콤한 공짜 과일이 욕심났던 나는 다음번에는 꼭 양동이를 가져와 따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말이 되어도 그곳에 온 많은 사람들이 모라를 절대 가져가지 않았다. 궁금한 마음에 다리오에게 물었다가 핀잔만 들었다.
“여기 와서 실컷 먹고 가는데 왜 또 집에 가져가? 그럼 다음에 오는 사람들이 모라를 못 먹잖아.”
촌스럽다고만 생각했던 스페인 사람들 역시 선진 시민의식을 가졌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욕심을 부린 내가 어찌나 촌스럽게 느껴지던지, 양동이 생각을 했다는 게 창피했다.
모라에 눈독을 들이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페드리자 전역에서 방목하는 건강한 소들은 우람한 근육이 무색하게 혓바닥을 날름거리면서 소심하게 모라 열매를 따먹느라 자신이 땡볕 아래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새까만 소들의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털에 태양이 반사돼 불이 붙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더위였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모라 열매와 잎이 다 떨어지는 사이 계절은 가을을 지나 겨울에 들어섰다. 우리는 라면을 끓여먹을 생각으로 코펠까지 챙겨서 눈 쌓인 페드리자를 찾곤 했다. 서울만큼 춥지 않아 눈이 귀한 마드리드에서 페드리자는 발이 푹푹 들어갈 만큼 눈을 밟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나는 다리오가 누군가에게 얻어온 커다란 등산화를 신고 길에서 벗어나 괜히 눈이 많이 쌓인 곳만 골라 걸어다녔다.
페드리자는 나의 여름을 풍성하게 해주었고, 마드리드의 지루한 겨울 끝을 채워준 오아시스였다.
지와 다리오 ‘배꼽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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