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일본을 떠나 여행한 지 2년이 넘었어. 돌아가려고 생각하니 두렵군. 가장 두려운 것은 아무도 나를 기다리는 친구가 없다는 거야. 난 친구가 없어.”
에콰도르에서 만난 도미에가 나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그처럼 멋진 사람에게 친구가 없다니, 이상했다. 도미에는 교토의 시골에서도 그야말로 ‘깡촌’에 사는 외로운 괴짜였다. 그는 27살에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재니스 조플린, 커트 코베인이 죽은 나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이제 28살이고 28살이나 29살에 죽는 것은 그다지 멋지지 않아. 오래 살아봐야지.”
내 관점에서 도미에는 웃긴 사람이었지만, 그의 유머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통했다. 그는 처음 보는 우리를 다짜고짜 자기가 사는 일본 시골마을로 초대했다. 그로부터 2년6개월 만에 우리는 그에게 전자우편을 보냈다. 그의 답변은 이랬다.
“나의 좋은 친구 지와 다리오, 이 집은 당신들에게 열려 있어. 원하면 1년을 살아도 돼.”
그는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것을 법보다 철저히 지키는 일본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든 멋진 친구였다.
도미에가 사는 시골마을에는 버스가 다니지 않아서 그가 우리를 데리러 역까지 마중을 나왔다. 도미에의 집은 전형적인 일본의 시골집이었다. 나무로 만든 이층집에는 미로 같은 방이 9개나 있었고, 밭에는 토란대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다음날 그를 따라 동네 호숫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나기를 만나 비를 쫄딱 맞았다. 어릴 적 소나기가 내릴 때 일부러 집 밖으로 나갔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하늘에서 내리치는 거대한 빗방울을 얼굴에 맞는데 웃음이 났다. 어쩌면 비가 내리는 이유는 사람들을 웃기려는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앞이 안 보일 정도의 집중호우에 자전거를 타고 달렸으니, 빗물은 눈으로 코로 귀로 맘대로 들락날락했지만 우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비에 젖어도 상관없는 세계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도미에의 누나네 가족이 빌려준 자전거를 타고 이 동네 저 동네 쑤시며 다녔다. 인사를 해도 우리 모습에 넋이 빠져 답을 하지 못하는 동네 어르신들을 지나 학교 앞 공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환호를 받으며 자전거를 굴렸다. 쌀농사를 짓는 근방의 논을 지날 때 벼 냄새가 얼마나 향기로웠는지, 나는 그 냄새가 내 몸에서 배어나길 바랄 정도였다. 땡볕을 피해 대나무 숲으로 숨어 들어갔다가 모기떼를 만나 실컷 물어뜯겼지만 대신 대나무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로 저리로 흔들리며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도미에가 사는 마을은 내가 다시 아이가 될 수 있게 해주었고,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소박한 즐거움을 되돌려주었다. 일터에서 돌아온 도미에가 물었다.
“이곳은 볼 것도 없고 할 것도 별로 없고, 하루 종일 심심하지 않아?”
“네가 사는 이 마을은 일본에서 최고야.”
그는 우리의 대답에 의아해했다. 곧 우리가 근사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임을 깨달았다.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이국적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곳에 살고 있다. 그러니 진짜 여행의 고수는 떠나지 않고도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매일 작은 일탈을 해내는(?) 사람이다.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우주는 계속 움직이고 있으니, 지구에 무임승차한 우리는 그야말로 우주의 히치하이커들이다. 잠시 삶을 즐기러 온 우주의 여행자들인 것이다. 고개를 들어 주변 여행자들을 바라보고 한마디 인사를 건네보자! 좋은 여행 되세요!
지와 다리오 '배꼽 두 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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