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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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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마음의 사탕, 소속감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 같은 불법체류 위기를 겪으며 돌아갈 곳 없는 불법체류자의 서글픔에 공감하다
등록 2011-04-15 13:31 수정 2020-05-03 04:26

스페인에서 3개월이 지나갈 무렵 고민이 생겼다. 불법체류자가 될 상황이었다. 돌아갈 여비도 떨어지고, 그렇다고 합법적으로 고용계약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운명을 기다렸지만 모험의 끝은 너무 허무했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페인식 농담으로, 그 많은 불법체류자를 모두 보호소에 감금하기에는 식비가 너무 많이 든다고 했다. 불법체류란 사람을 참 치사하게 만든다. 이 나라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마치 남의 집에 얹혀사는 느낌이랄까? 뭘 해도 불편하다. 게다가 빈털터리라면 더욱 서글프다.

 ‘소속’이라고 쓰인 칸에 채워넣을 단어 하나가 없다는 이유로 나라는 존재가 마치 공중에 붕 뜬 것만 같았다. 진정한 자유인이라는 생각에 잠시 뿌듯하다가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소속이 주는 마음의 안정이 결코 무시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언제나 그렇듯 불러주는 데는 없지만 갈 곳은 많았다. 마드리드 시내에 있는 스쾃 하우스에서 스페인어 강의를 몇 번 들으러 갔다. 그곳에선 나를 증명할 어떤 문서도 필요하지 않았고 돈을 낼 필요도 없었다. 물론 수료증이나 출석 여부 따위를 따지지도 않는다. 누구나 원하는 것을 배우고 가르칠 수 있었다. 전세계에서 온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 뒤섞여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길에서 주워온 고장 난 자전거를 수리하는 기술도 배울 수 있었다. 용접을 마친 개성 강한 튜닝 자전거는 좁은 마드리드 골목에서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개중에는 서커스 기술과 해킹 같은, 보통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수업도 있었다. 그곳을 좋아한 이유는 하루 종일 있어도 돈이 들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에게 필요했던 소속감이라는 달콤한 마음의 사탕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환경이 중요하다고, 불법체류자 사이에서 지내다 보니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생각과 걱정이 어느새 사라졌다. 나야 내 발로 이 나라에 들어와 안 나가는 것이지만, 아프리카 대륙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유럽에 온 불법체류자들을 볼 때면 같은 불법 신분이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낯선 땅에서 집도 없고 가족도 없고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의 상황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서글프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돌아갈 집이 있는, 무늬만 불법체류자다.

한 프랑스 친구는 기발한 방법을 동원해 불법체류자를 법적으로 도와주는 봉사활동을 했다.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온 한 남자는 ‘성적 소수자’인 덕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그의 나라에서는 동성애자를 돌팔매로 죽여도 죄가 아니었으니, 그가 동성애자이고 본국으로 돌아갈 경우 신변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난민 신청을 해서 허가를 받은 것이다. 유럽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특별 케이스다. 대부분의 불법체류자는 유럽연합 국가의 국적을 가진 사람과 혼인신고를 한다. 법은 진정한 사랑도 의심하고 더 많은 서류 증명을 요구한다. 법은 약자 앞에서 더욱 강력하게 발휘돼, 가끔 그들의 사랑조차 거부당할 때가 있었다.

 내가 만난 많은 불법체류자는 자신의 존재가 불법으로 남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단지 신분을 증명할 문서가 이곳에 없다는 것 때문에 그들을 불법체류자로 낙인찍은 사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외국인으로서 신분을 증명할 땐 빵빵한 재산증명서 한 장이면 되는데, 문제는 그 사람들이 하나같이 가진 게 없다는 것이다. ‘돈 없으면 죄’라는 말은 이 경우만큼은 정확하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언제쯤 원하는 곳에 맘대로 짐을 풀 수 있을까, 생각했다.

Me dicen el clandestino Por no llevar papel
(종잇장 하나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내가 불법이라고 말한다네)
Mi vida la deje Entre Ceuta y Gibraltar
(세우타와 지브롤터 사이에 내 인생을 두고 왔어)
Soy una raya en el mar Fantasma en la ciudad
(나는 저 바다의 선 하나, 도시의 유령 같은 존재)
Mi vida va prohibida Dice la autoridad
(내 인생이 금지되었다고 경찰은 말하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스페인 국적에 모로코에 살았던 음악인 마누 차오의 노래 (Clandestino·불법체류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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