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는 지낼 곳이 있었다. 스웨덴인 사이먼과 아내인 요시는 3년 동안 무소식을 깬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원룸 아파트의 작은 거실을 기꺼이 우리에게 내주었다. 그들의 집이 있는 고엔 지역에 내리자 동네가 떠들썩한 것이 축제가 한창이었다. 그 틈에 여비나 좀 벌어볼까 하고 우리가 만든 장신구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좁은 길바닥에 깔았다. 장신구는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가던 길을 멈춘 사람들이 한동안 우리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하는 장사는 언제나 그렇듯 대성공을 거두지 못하지만 실속이 없지는 않았다.
축제가 끝나고 거리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고, 사람들은 다시 남의 일에 신경 쓰지 않는 사무적인 얼굴로 변신했다. 우리도 장사를 접고 다시 본업인 여행으로 돌아왔다. 후지산에 오르기로 했다. 신주쿠에서 후지산의 다섯 번째 신사까지 가는 버스가 있지만 수십 세기 동안 성스럽다고 여긴 순례길을 밟기로 했다. 첫 번째 신사가 있는 후지요시다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슈퍼에서 파는 도시락으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신사로 향했다. 1천 년은 되었을 것 같은 커다란 나무들이 길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맞이했다.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긴 시간을 한자리에서 지켜온 나무들 곁을 지나며 마음이 경건해짐을 느꼈다. 3시간을 걷고 어둑해질 무렵 두 번째 신사에 도착했다. 다리오는 후지산 신화에서 유일한 여자 신을 섬기는 신사라고 읽었다며, 나에게 좋은 기운을 줄 것이라고 했다. 나름 페미니스트인 다리오는 후지산의 첫날 밤을 페미닌 에너지로 가득한 신사 옆에서 보낼 것을 강추했다.
좋은 기운이나마나 어두워지자 그곳의 분위기는 공포스러워졌다. 거의 무너진 신사 뒤편에 색동저고리가 나무 사이에 걸린 모습에 귀신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날 밤 나는 깊이 잠들지 못하고 좁은 텐트 안에서 엎치락뒤치락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선선한 한여름 숲 속의 밤공기는 기분 좋았다. 다음날 아침 텐트를 접고 배낭을 신사 안에 숨겨놓았다. 벼락 맞은 듯 천장이 무너진 신사 안은 낮에도 어두컴컴했다. 짐을 잘 부탁한다고 알 수 없는 신에게 말하고 후지산에 올랐다. 후지산 정상은 해발 3776m이고 우리가 실제로 올라야 할 거리는 2천m 이상, 그리고 다시 내려와야 하니까 고된 하루가 되리라 짐작했지만 걱정하지는 않았다. 힘들면 그냥 내려올 생각이었다.
후지산을 오르던 한 일본인 아저씨는 후지산은 멀리서 봐야 아름답지 정작 오르려면 못난 산이라고 했다. 그 말이 옳은 듯했다. 돌밭에 경사도 심했다. 하치고메(8번째 신사)에 도착했을 때 가져온 물을 다 마셔버려 내려갈까 생각하는 찰나, 누군가가 사서 열지도 않은 생수 한 병이 바닥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후지산은 우리가 내려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 물을 한 모금 마시자 힘이 불끈 솟았다. 그 힘으로 정상에 올랐다. 9시간을 쉬지 않고 걷고 밤이 되어서야 배낭을 숨겨놓은 신사에 도착해 어둠 속에서 텐트를 쳤다.
산에서부터 자꾸 눈에 밟힌 것이 하나 있었다. 산에 오르기 전 들른 슈퍼에서 본 바나나…, 그게 왜 그리 먹고 싶던지. 마을에 내려와서 슈퍼마켓으로 직행했다. 다리오는 차가운 우유 1ℓ를 샀고, 나는 과일 코너에서 한참을 서성이었다. 그토록 먹고 싶던 바나나가 가치 없어 보였다. 멍이 들었지만 달콤한 향을 풍기는 복숭아 2개의 가격이 더 쌌다. 복숭아는 언제나 바나나보다 비싼 점을 고려하면 어느 쪽이 탁월한 선택일까? 결국 생각을 바꿔 복숭아를 샀다. “잠시만요.”
가게를 나가려는데 슈퍼마켓 주인이 우리를 불렀다. 그리고 후지산에 올라갔다 와서 힘들겠다며, 내가 한참 동안 비교 분석한 바나나 뭉치를 건네며 가는 길에 먹으라고 했다. 아마 그 바나나는 내 선택을 받아야 할 운명으로 태어나 필리핀에서 자라 일본까지 배를 타고 왔나 보다.
지와 다리오 ‘배꼽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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