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우리의 잘못이 아니었다. 스페인으로 가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거창하게 먹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두 달 전에 미리 예매를 해 2만원도 안 하는 알메리아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평소와 달리 우리는 10분마다 한 번씩 시계를 보며 시간에 유념했다.
영국 공항은 언제나 불쾌감을 주었다. 온갖 질문을 퍼부으며 눈에 힘을 주는 공항 직원들은 나를 주눅 들게 했다. 때 묻은 배낭과 페스티벌에서 팔려고 인도에서 사온 온갖 잡동사니들, 제대로 된 숙소 없이 오래 여행한 우리의 비위생적인 겉모습, 게다가 외국인이기까지 한 우리는 그들이 가로막고 트집 잡고 싶은 승객 영순위였다. 투시 카메라로 손가방을 검사하는 뚱뚱하고 우울해 보이는 백인 아줌마는 우리의 가방이 수상하다며 경찰을 부르겠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저 멀리서 로보캅을 연상시키는, 키가 2m는 될 것 같은 완전무장한 경찰 두 명이 우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우리에게 쏠렸다.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는 순간 범죄자로 오인받게 되었다. 몇 해 전 런던 시내에서 일어난 사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 브라질 남자가 경찰이 부르자 도망치다가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이었다. 그는 결백했고 도망친 이유는 단지 경찰이 싫어서였다. 나는 아무 잘못 없는 그가 왜 도망갔는지 순간 이해가 갔다. 위압감은 결백한 자도 ‘쫄게’ 했다. 경찰은 우리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고 30분쯤 지나 다시 돌아왔다.
“당신들의 가방에는 불법의 소지가 있는 것이 전혀 없으니 이제 비행기를 탈 수 있어요.”
문제는 비행기가 이미 떠났다는 것이다. 그 멍청한 공항 직원은 우리가 경찰과 함께 떠난 직후 승객이 체포(?)되었으니 가방을 비행기에서 내릴 것을 인터폰으로 알렸던 것이다. 그렇게 최저가 티켓은 물 건너갔다. 고맙게도 경찰 한 명이 우리와 함께 공항 내 라이언항공(유럽 저가 항공사) 사무소까지 함께 가주었다.
“세금 포함해서 한 사람당 80파운드예요.” 지갑을 뒤져 페스티벌에서 인도 물건을 팔아서 남긴 비상금 100파운드를 찾았다. 경찰은 우리가 가진 돈이 딱 100파운드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직원에게 사정 얘기를 대신 해주었다. 그가 생각해도 우리의 상황이 딱했나 보다. 경찰의 도움으로 간신히 할인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경찰이 정말 고맙다. 영국의 권위 있는 경찰, 게다가 로보캅 같은 그는 의외로 순경 아저씨처럼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
저녁이 될 때까지 빈속이었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서 허기를 느끼지 못했다. 그 허기는 잠이나 자볼까 하고 그다지 푹신하지 않은 공항의 짧은 소파에 쭈그려 누웠을 때 한 방에 찾아왔다. 공항을 두리번거렸다. 문을 닫으려고 준비하는 한 고급 유기농 샌드위치 가게를 발견했다. 빨간 머리에 창백한 얼굴색이 전형적인 영국인같이 생긴 스무 살쯤 된 아가씨 혼자 카운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내 딴에는 용기를 내서 다가갔다. 그리고 우리의 사정을 짧게 설명하고 만약 버리는 음식이 있으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우리를 탐색하고는 채식주의자인지 물었다.
“아니요.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그녀는 종이봉지를 꺼내 계란 샌드위치와 닭가슴살 샌드위치를 각각 두 개씩 싸서는 냅킨까지 챙겨서 우리에게 건넸다. 덕분에 평소 비싸서 사먹지도 않던 유기농 샌드위치를 배불리 먹고 새우잠을 청했다. 비록 일진이 더러운 하루였지만 우리를 도와준 사람들이 있어서,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행복한 밤이었다.
밤새 고객만족카드에 장문의 불만 편지를 쓰고 스페인에 도착해서 3개월 만에 공항으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그런 몰골로 나타난 네 탓이오.”
“동서양에 걸쳐 모험적인 세계여행을 하던 파이퍼 부인이 고국에 가까운 러시아령 아시아에 도착했을 때 일이다. 그녀는 그곳 관리를 만나러 갈 때는 여행복이 아닌 다른 옷차림을 해야 했다. 그것은 그녀가 이제 ‘옷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문명국에 왔기 때문’이었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에서)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200년 전과 바뀐 게 하나도 없는 듯했다.
지와 다리오 ‘배꼽 두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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