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시에서 100% 백수 빈털터리 이방인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정쩡한 정체성을 갖게 했다. 말 그대로 이방인, 눈동자 색도 다르고 입맛도 다른 나는 이곳에 속하지 않으면서 매일 똑같은 곳에서 자고 일어나는 ‘일상’을 가진 사람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정체가 바뀌었다. 지도를 보지 않고도 길을 찾아가고, 마드리드 지하철 노선을 통째로 외워버린 나는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는다. 빛을 발견하지 못하는 ‘무늬만 여행자’는 이 안정감이 불안하기만 하다. 아무 생각 없이 도착한 스페인에서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이미 여러 번 봐서 내용을 뻔히 알고 있는 영화를 다시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 반전은 존재한다. 다 알고 있는 듯 착각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장면이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모든 것에 익숙해지려 할 때 놀라운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긴 여름밤 별다른 일이 없는 동네 친구들은 새롭게 그룹에 합류한 나에게 속성으로 문화 강좌를 해주고도 시험 전날 수험생이 보는 핵심 정리처럼 한 장으로 요약해주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를 보지 않고 스페인 문화를 논할 수 없다는 그들의 주장에 따라 이라는 영화를 반강제로 보았다. ‘아주 전형적인 스페인 영화’라는데 내용에는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지만, 성소수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 영화를 보며 ‘게이’가 문화 선진국인 스페인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된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스페인은 전세계에서 동성 간 혼인을 세 번째로 인정한 나라다. 가톨릭 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법안을 통과시킨 사파테로 총리의 연설은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오랫동안 굴욕당하고 권리가 박탈되고 정체성이 부정되고 자유를 억압당한 채 살아온 사람들에게 그들이 받아야 할 마땅한 대우를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품위를 회복하고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유를 원상태로 되돌려놓을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소수자일 뿐입니다. 그들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이며, 이 법안에 반대하는 자들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자유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연설을 듣고 커밍아웃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른 여름 마드리드 시내를 광란의 도가니로 만드는 유럽 최대 게이 축제가 있으니, 이름하여 ‘동성애자의 자긍심’(Orgullo Gay)이다. 2005년 동성혼인법이 통과된 뒤 해마다 열리는 이 축제는 성소수자의 자존감을 높여주려는 차원에서 시작해 이제는 스페인 관광사업에서 대목이라고 할 만큼 성장했다.
전세계에서 날아온 관광객들 사이에 나도 있었다. 이번에는 사진기를 잊지 않았다. 평소 10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 그랑비아 거리를 한 걸음, 반걸음씩 1시간 걸려 도착했다. 춤추고 북을 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지개 깃발을 휘날리며 퍼레이드에 합류했다. 거리에는 <y.m.c.a>를 열창하는 스머프들이 있었다. 어릴 적 추억의 푸른 생명체가 ‘게이’로 해석된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스페인의 게이 문화는 그야말로 찬란했다. 아무리 경제가 침체됐다 한들 소비하는 큰손인 게이 사회를 얕보는 부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듯 보였다. 세계의 대기업들이 앞다퉈 제공하는 두둑한 후원까지 받으며 즐기는 게이들을 보며, 이것이 사파테로가 말하는 승리인가 싶었다. 자유의 승리를 만끽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진정한 혁명은 기쁨임을 목격하고 나는 다시 마드리드 시내로 ‘뻔한’ 관광을 나선다. 내 주머니에는 5유로가 들어 있다. 저 모퉁이를 돌면 3유로로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아는 내 정체는 ‘무늬만’ 관광객이다.
지와 다리오 '배꼽 두 개'</y.m.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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