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밝히는 태양은 분명 하나뿐인데도 왠지 스페인의 태양은 출처가 다른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유럽 전역의 사람들은 스페인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을 그리도 사랑했다. 스페인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이 특별한 태양이었다. 우울증이 드문 이유를 태양이 자기네 나라를 편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까지 했다. 분명 스페인의 태양은 근심·걱정까지 태워버릴 만큼 강렬했다. 태양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정신적 건강뿐만 아니라 엄청난 관광 수입까지 가져다준다.
1년 365일이 모자랄 만큼 놀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이 뿜어내는 ‘향락 에너지’와 ‘태양’이 적절히 결합된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 이비사는 1970년대부터 유럽에서 좀 논다 하는 사람들이 찾는 휴양지였다. 스페인에 도착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비사로 갈 것을 강추했지만 ‘사치’나 ‘향락’이라는 대명사는 우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다각도로 이비사로 갈 수 있는 길을 연구한 끝에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요리사인 다리오는 이비사에서 가정집보다 수가 많은 레스토랑 주방에 단기 무계약 취직을 하고, 나는 관광객이 많이 다니는 광장에서 우리가 만든 장신구를 팔 계획이었다. 한국에서 대학까지 나온 딸이 남의 나라 길바닥에서 불법 장사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굶어 죽진 않을 만큼 생활력 강한 딸이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말로 나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우리가 이비사에 왔다는 것이 중요했다. 슈퍼마켓에서 밥 먹고 친구의 봉고차 안에서 잔다 해도 그다지 상관없었다.
몇 해 전 인도에서 만난 이비사 출신 친구 살바는 토박이답게 자기의 후진 봉고차에 우리를 태우고 여기저기 구경을 시켜주었다. 관광객이 쪽빛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하얀색 지중해식 건물 카페에서 우아하게 와인을 한 잔 들이켤 때 우리도 살바의 차를 타고 도착한 아름다운 절벽 아래서 똑같은 바다를 보고 와인을 병째 돌려 마셨다.
며칠 뒤 살바는 카포에이라(브라질 무술)를 하는, 말리에서 온 친구를 소개해주었다. 살바는 그 친구가 불법 체류자일 때 도움을 많이 주었다며 이번에는 그가 자신을 도와줘야 할 차례라고 맘대로 결정했다. 살바의 부탁으로 우리는 말리 남자의 집에서 잠시 신세를 지기로 했다.
이비사에도 이런 곳이 있다니…. 모든 것이 사치스럽고 비싼 이 섬에도 전기와 수도가 없는 집이 있었다. 말리 남자의 집이 그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집의 반은 허물어졌고 땅이 깊게 파여 있어서 잘 모르는 사람이 발을 헛디뎠다가는 2m 아래로 떨어질 수 있었다.
밤에는 캠핑 때처럼 촛불을 썼고 물은 옆집 마당에 연결된 호스에서 끌어다 썼다. 옆집에는 집시 가족이 살고 있었다. 이런 집도 한 달에 200유로의 월세를 낸다고 하니, 이비사에서 지내는 일이 얼마나 비싼 것인지 피부로 느꼈다. 게다가 말리 남자는 얼마나 눈치를 주는지, 마치 처음 스페인에 도착해 이민자로서 받은 편견에 대한 한을 우리에게 돌려주겠다고 작심한 사람처럼 우리를 무시했다. 겪어본 사람이 더하다는 말이 딱 맞았다. 물질적으로 부족하고 갈 곳이 없던 경험을 지닌 그는 오히려 더 매정했다. 아마 그는 그다지 착한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루는 사기도 당했다. 광장에서 3유로짜리 싸구려 팔찌를 한 이탈리아 남자에게 판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20유로를 나에게 건넸고 나는 17유로를 거슬러 주었는데, 알고 보니 20유로가 위조지폐였다. 그는 생돈 17유로를 날로 먹은 셈이다. 이비사에 온 신고식 한번 제대로 치렀다. 그래도 이 섬을 떠날 수 없던 이유는 그놈의 태양이 너무 찬란하게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와 다리오 ‘배꼽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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