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섞어야 맛있다, 새롭다


복잡한 자신들의 혈통처럼 와인에 ‘기타 등등’을 섞어서 맛있는 칵테일 ‘칼리모초’ ‘상그레’ 등을 만든 스페인
등록 2011-04-22 08:01 수정 2020-05-02 19:26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즐긴 ‘틴토 데 베라노’ 너머로 지중해가 보인다.
 지와 다리오 제공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즐긴 ‘틴토 데 베라노’ 너머로 지중해가 보인다. 지와 다리오 제공

누가 시작했는지 몰라도 와인 칵테일의 신세계를 발견한 것은 중요한 사건이다. 그 누가 이 오묘하고 기똥찬 맛을 상상할 수 있을까? 우선 커다란 유리잔 가득 얼음을 채우고 그냥 마시기에는 너무 시고 떫은 싸구려 와인을 반쯤 부은 뒤 콜라를 섞으면 그 이름도 유명한 ‘칼리모초’가 된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간절히 원하는 스페인 북부의 바스크 지방에서 시작된 칼리모초는 독립은커녕 맛으로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까지 통일해버렸다. 가난한 자들의 ‘쿠바 리브레’, 일명 ‘리오하 리브레’(Rioja Libre)라고 불리기도 한다. ‘리오하’는 와인으로 유명한 스페인 지명이다.

다리오의 친구들 여럿이 모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10여 년 전으로 돌아가 고등학생 시절 그들이 살던 동네를 방문한 미국인 교환학생 ‘크리스’의 이야기다. 다리오와 친구들 열댓 명은 주말에 크리스를 데리고 동네 공터에 모였다.

“말도 안 돼!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와인에 콜라를 타 마신다고?”

저마다 집에서 가져오거나 훔쳐온 조리용 와인을 커다란 컵에 붓고 칼리모초를 만들어 마시는 것을 본 크리스는 맛만 보겠다고 했다가 그 맛에 반해버렸다. 주스같이 달착지근한 맛에 취하고 일탈의 환희에 취했다. 싸구려 와인이 주는 심한 숙취는 나중 문제였다. 새벽까지 퍼마신 그들은 밤새워 달린 사람들을 위한 단골 음식점으로 향했다.

“크리스! 스페인에서는 뭐든 섞어 마셔. 숙취에 뭐가 좋은지 알아?”

칼리모초에 만족한 크리스는 스페인 친구들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시작했다.

“블랙커피에 소금을 한 숟갈 넣어 마시면 숙취에 직빵이야.”

순진한 크리스를 위해 친구들은 ‘카페 콘 살’(Cafe con sal·소금 넣은 커피)을 주문해주었다. 웨이터는 이 청년들의 속셈을 알아차렸지만 제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불쌍한 미국인 교환학생이 받을 사약을 조용히 준비했다.

밤새워 빈속에 싸구려 와인과 콜라를 들이부은 그의 위장에 이름만 들어도 역한 ‘소금 에스프레소 커피’가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그는 식당을 박차고 나가 뱃속의 모든 것을 길가에 내버렸다. 크리스는 스페인에서 안 좋은 추억을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스페인에서 섞어 먹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적포도주는 짙은 색을 의미하는 ‘틴토’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뜨거운 태양 아래 마셔야 제맛인 ‘틴토 데 베라노’(Tinto de verano)는 말 그대로 ‘여름의 와인’이다. 와인의 붉은색이 레모네이드와 섞여 핑크빛으로 물든 유리잔에 레몬 한 조각을 띄우면 스페인의 삼복더위도 피해간다는 틴토 데 베라노가 된다.

상그리아는 피를 의미하는 ‘상그레’(Sangre)라는 단어에서 왔다. 비하인드 스토리로 전쟁 중에 포도 농사가 망해 질 낮은 와인을 생산했는데, 그냥 마시기에 떫은 와인을 어떻게 마실까 궁리한 끝에 만들어냈다고 한다. 오렌지의 상큼함과 계피의 깊은 맛에 설탕의 달콤함이 핵심인 이 붉은 물은 집집마다 장맛이 다르듯 만드는 사람마다 각자의 레시피가 있다. 맛에 정답은 없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것저것 섞으면 된다.

맥주도 예외가 아니다. 섞어야 한다. 맥주와 레모네이드를 반반씩 섞으면 ‘클라라’가 된다. 생각보다 맛이 괜찮다. 섞으면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섞는 것’이 스페인의 정체성임을 대변하듯 술도 피도 마구 섞어버린다. 그들을 음식으로 표현하면, 새로운 향신료가 적절히 섞인 풍미 넘치는 퓨전이다. 뭐든 섞는 스페인 음식을 맛보며, 다양한 민족의 복잡한 족보를 유난히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스페인 사람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음식에서도 그렇듯 서로 다른 재료가 섞여 새로운 맛이 되기도 하고, 겉도는 맛이 되기도 한다. 스페인은 전자의 경우다.

지와 다리오 ‘배꼽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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