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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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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왜 오늘 하나?

이비사의 동굴에서 살며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스페인의 ‘마냐나 정신’을 체험하다
등록 2011-04-01 15:39 수정 2020-05-03 04:26

말리 남자의 집에서 나온 뒤 절벽에 위치한 동굴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이비사 토박이인 살바에 따르면, 이 동굴은 1970년대 히피들이 섬에 들어와 살며 남긴 ‘유적’ 중 하나라고 했다. 섬 곳곳에 있는 ‘히피마켓’에서는 인도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비싸게 팔고 있었다. 히피마켓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30년 전 물 건너온 히피들의 물물교환 장터였기 때문이다. 현재는 본질을 완전히 잃어버린 지 오래다.
다행히 우리가 지내던 동굴은 긴 세월 동안 사람 손을 많이 타지 않았다. 길이 쉽지 않아 찾아올 수 있는 사람도 극히 드물었다. 뭘 하든 돈이 필요한 이 섬에서 유일하게 월세를 내지 않아도 쫓아내지 않는 이 집의 주인은 ‘자연’이었다. 나중에 우연히 스페인 감독 훌리오 메뎀의 영화에 그 동굴이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주인공 아나는 아빠와 함께 동굴에서 살았다. 한번 가본 도시가 텔레비전에 한 컷 나와도 흥분하던 차에 이비사에서 집 삼아 살던 동굴이 영화에 등장하는 것을 보고 나는 감격을 감출 수 없었다.

지와 다리오가 공짜로 지낸 이비사의 동굴집.지와 다리오 제공

지와 다리오가 공짜로 지낸 이비사의 동굴집.지와 다리오 제공

스페인에 온 이후로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말은 힘을 잃었다. 시내와 멀리 떨어진 절벽 위의 동굴에서 우리는 평화로운 생활을 했지만, 섬에 오기 전 생각했던 모든 계획과는 동떨어진 생활이었다. 내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고 큰 소리를 쳐도, 태평한 다리오는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뭐 하러 꼭 오늘 해야 하냐며 내 속을 뒤집어놓았다. 그는 매일 저녁 “내일은 꼭 시내에 가서 요리사 자리를 구해봐야지”라고 말했지만 다음날이 되면 어김없이 또다시 내일로 미뤘다. 그때는 그가 게으른 인생의 패배자가 아닌가 싶었다. 스페인에서 지낸 지 몇 달 뒤 이것이 아주 전형적인 ‘스페인식’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유명한 ‘마냐나(Manana) 정신’이다. 스페인어로 마냐나는 ‘내일’이라는 뜻이고, 이 정신은 ‘내일을 위해 오늘 할 일을 남겨두라’는 스페인만의 독보적인(?) 정신이다. 조지 오웰의 를 보면, 전쟁을 하는 와중에도 내일로 미루는 마냐나 정신은 그대로 성립되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비아냥거리면, 스페인 친구들은 마냐나 정신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했다며 쉴 새 없이 일하는 동양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정신이라고 한술 더 떠 반박했다. 관광객들을 위한 기념품 가게에는 유명 스포츠 메이커의 ‘저스트 두 잇’(Just Do It)이라는 로고 밑에 ‘투모로우’(Tomorrow)를 써놓고 누워 있는 스페인 사람을 그려넣은 풍자 티셔츠가 걸려 있었다. 아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러고 보면 동굴 생활은 스페인에 있는 동안 가장 스페인스러운 생활이었다. ‘무조건 내일 한다’는 정신을 잘도 지켜냈다. 동굴 생활은 자연에서의 원초적인 삶을 의미했지만, 이비사에 처음 도착해 말리 남자 집에서도 전기 없이 지냈으니 밤이 되면 어두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나아진 것은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 태양빛에 물든 지중해가 바로 눈앞에서 나를 반기는 것이었다. 바다는 단 한 번도 같은 색을 내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동굴을 떠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더우면 절벽을 따라서 난 내리막길 밑에 있는 천연 풀장에 가서 몸을 담갔다. 평평한 바위가 오랜 시간 깎여 만들어낸 움푹 파인 모양이 그야말로 풀장 그대로였다. 절벽을 둘러싼 숲 안으로 들어가면 지하수가 솟아나와 시원한 물을 걱정 없이 마실 수 있었다. 가끔 시내에 가서 필요한 것들을 사왔다. 보통 과일이나 통조림으로 끼니를 때웠다. 몸무게를 15kg가량 감량한 다리오의 모습은 그야말로 단식투쟁을 끝낸 간디가 따로 없었고, 그의 긴 머리는 그야말로 산발이었다.

당시 이비사에선 인도 문화와 패션이 유행이었다. 영적 스승을 두는 것도 유행이 되어 부자들은 자신의 구루를 찾기를 원했다. 살바는 다리오를 동굴에 두고 시내에 가서 ‘동굴 안에 남자가 도를 닦고 살고 있다’고 소문을 퍼뜨려 돈을 벌자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다. 이 재미있는 친구는 실속 없고 어리석었지만, 진실한 친구라 함께 있는 동안 언제나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노력했다.

지와 다리오 배꼽 두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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