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불법 파견 최전선에서 정몽구 회장과 싸우고 있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사무장 천의봉입니다. 현대차 비정규직지회는 2010년 25일간의 CTS(도어탈착 공정) 점거 파업으로 불법파견 철폐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한 이후 집단 해고와 징계로 어려움을 겪다가 2012년 다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쉽지 않은 투쟁이 이어졌고, 그해 가을 정 회장과 승부수를 띄워야 했습니다. 제가 결심했어도 설득해야 할 사람은 또 있었습니다. 바로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말문을 열고 “한 달만 올라가 있으면 대선 국면에서 뭔가 해결될 것”이란 거짓말로 어머니를 설득했습니다. 쉽게 허락해주지 않을 것 같던 어머니는 오히려 “네가 하는 일이 옳다”며 뜻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13년 전 외동아들인 저를 군대에 가둬두지 않으려고 공익근무요원으로 보내려 했던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저는 군대를 택했습니다. 제 군 생활은 서울 도심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성난 민중을 진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길거리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는 군중을 무참히 짓밟고 지금 와서 제가 비정규직이 되어 어디를 올라간다 하니 “내가 못 배워서 널 고생시킨다”며 한숨을 내쉬는 어머니를 똑바로 볼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날이 밝아왔습니다. 전날까지만 하더라도 자신만만 하던 제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습니다. 가을 하늘에 비친 철탑은 왜그리도 높아 보이던지요. 올라가다 지쳐 추락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한발 한발 올라갈 때마다 쿵쾅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고, 애써 담담하려 했지만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습니다.
한 차례 몸싸움 끝에, 처음 목표치까지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올라왔다는 사실을 밑을 내려다보고 알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긴장한 터라 몸의 근육이 굳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음날부터 정치권 유명 인사들은 마치 자기들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처럼 얘기했고, 저 역시 들떠 있었습니다. 8월 투쟁 이후 중단된 교섭이 열린다는 얘기도 들렸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진행된 교섭은 대선 후보들이 관심을 보이니 어쩔 수 없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내하청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3천 명 신규채용 계획에서 고작 500명 늘어난 3500명을 신규채용하겠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대선에선 자본친화적인 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현대차는 본격적인 신규채용으로 우리 비정규직지회의 목줄을 조여오고 있었습니다.
“한 달만 올라가 있으면 달라질 거예요”어머니한테 거짓말하고 올라간 철탑
다음날부터 유명인사들이 찾아왔지만
신규채용이 불법 파견을 피해가기 위한 꼼수라는 걸 알고 있는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을 믿었기에 대거 이탈은 없었습니다. 현대차는 사내하청 대상의 신규채용을 유례없이 남발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스럽게 장기전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지난겨울 몇 년 만에 몰아닥친 한파로 제 몸에는 동상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아픈 것은 현장에서 싸우는 조합원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으니 그냥 괜찮다고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픈 상처는 치유되지만 조합원들의 마음에 난 상처는 어떻게 치유될까요. 세상은 노동자 서민이 살기에 더욱 팍팍해졌고 자본에 항거하는 자들이 할 수 있는 건 목숨을 던져서라도 싸우는 것뿐이었습니다.
추위를 느낄 겨를도 없이 꽃피는 봄을 맞아야 했습니다. 꽃은 누구나 설레게 하는 묘한 마법 같습니다. 이제까지의 싸움이 결실을 맺어 정규직 쟁취란 꽃망울이 터져주길 바랐지만, 우리 희생이 부족했는지 어떤 성과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봄이었나 느낄 틈도 없이 어느새 제 옷차림은 다시 여름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다가오는 여름의 뜨거운 태양만큼이나 더욱 아프게 타들어가는 것은 마음이었습니다. 여기 철탑에 원래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처럼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철탑은 잊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법 파견에 맞서온 10년의 시간을 신규채용과 바꾸지 않으려는 조합원들의 치열한 싸움마저 사람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는 듯했습니다.
현대차가 요구해서 특별교섭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지난 6월26일 열린 16차 교섭은 지난해 5월의 첫 교섭 때와 마찬가지였습니다. 회사가 대법원에서 이긴 병승이 형 혼자만 불법 파견이라고 우기며 마치 선심 쓰듯 제시한 신규채용 옵션은 비굴한 생각까지 들게 했습니다. 현대차에게 법은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기에 잘 이용하면 되는 도구인 듯합니다. 서울고등법원의 판결도, 중앙노동위원회의 결정도 현대차에는 휴지 조각인가봅니다. 정말 뻔뻔합니다. 회사가 교섭을 통해 신규채용 인원을 조금 늘리고 이들의 경력을 일부 인정해주는 방식으로, 정 회장은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존재는 역사 속에 묻어버린 채 불법 파견을 마치 다 해결한 것처럼 찬사를 받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살자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다른 노동자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가면 뒤에 감춰진 삼성전자 서비스 노동자들의 눈물과,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동행’이란 말 뒤에 숨겨진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 수백만 명에 이르는 전국의 사내하청 및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우리의 정규직 전환 투쟁을 지켜보고 있는데, 우리가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그들의 권리를 신규 채용 수용으로 강탈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걱정스럽습니다. 우리 조합원들이 과연 얼마나 더 버티며 싸울 수 있을까요. 저희는 많이 지쳐 있습니다.
병승이 형 혼자만 불법 파견이라 우기는 회사선심 쓰듯 제시한 신규채용은 비굴감 들게 해
우리들이 얼마나 더 버티며 싸울 수 있을까요
희망버스가 울산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공농성을 했던 분들이 ‘철탑은 사람이 살 곳이 아니다’ ‘우리가 희망버스로 저들을 구하자’며 기자회견을 했다는 소식은 철탑을 비추는 태양보다 빛나는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제가 본 희망버스는 ‘시대를 역행하는 불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바로잡는 횃불’이었습니다. 2011년 부산 한진중공업으로 향하던 희망버스에 저도 함께한 이유였습니다. 절망의 영도대교는 희망버스로 인해 희망의 영도대교가 됐습니다.
지금 어렵지 않은 사업장이 없을 것입니다. 정리해고에 맞서싸우는 사업장, 어용노조에 맞서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 싸우는 사업장, 저희처럼 고공농성을 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찾아오는 희망버스가 150만 평의 절망뿐인 공장에서 희망의 불씨를 만들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불씨가 현대차 비정규직만의 정규직 전환이 아니라 전국의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타오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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