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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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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하늘에 새털처럼 걸려 있다

‘복직 약속 이행’ 요구하며 두 번째 고공농성 중인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강병재… 얼굴 못 알아볼 거리에서 아빠를 보고 온, ‘아빠 없는 200일’ 맞는 딸
등록 2015-07-29 14:23 수정 2020-05-03 04:28
*2013년 7월 은 잡지 내 특별 섹션으로 을 ‘창간’했습니다. ‘하늘 노동자들의 무사 착륙을 지원하며 땅을 밟는 순간 자진 폐간하는 고공농성 전문지’를 표방했습니다. 노동자들이 하늘에 오르고 내릴 때마다 은 ‘폐간’과 ‘복간’을 거듭했습니다. 차광호 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대표의 착륙 인터뷰(제1071호)를 끝으로 ‘시즌2’도 마무리됐습니다. 하지만 고공은 계속 솟고 있습니다. 전국 3곳(대우해양조선 하청노동자 강병재, 생탁·택시 노동자 송복남·심정보,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최정명·한규협)에서 하늘은 여전히 날카롭습니다. 그들을 하늘에 두고 폐간을 이야기할 순 없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이 ‘시즌3’을 시작합니다.
강병재 대우조선해양하청노동자조직위원회 의장의 딸이 80m 높이의 타워크레인에서 고공농성 중인 아버지를 바라보며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강병재 대우조선해양하청노동자조직위원회 의장의 딸이 80m 높이의 타워크레인에서 고공농성 중인 아버지를 바라보며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마흔여덟 살 섬 남자의 집은 멀었다. 겨울의 기운이 문턱에 어른거리던 2011년 11월이었다. 늦은 여름휴가를 거제도로 갔다. “휴가 왔다 들렀다”고 처음 만난 섬 남자에게 말했다. 그를 만나려 휴가지를 거제도로 정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남자는 그해 봄부터 여름 초입(3월7일~6월2일)까지 45m 송전탑에 올랐다. 15만4천 볼트가 흐르는 ‘전기의 성채’에서 살아 내려온 남자의 얼굴이 궁금했다. 그날 그의 집에서 중학교 2학년 딸을 봤다. 바닷바람이 따끔거렸다.

쉰두 살이 된 섬 남자의 크레인은 높았다. 지난 4월9일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남자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다시 하늘에 있었다. 이번엔 타워크레인이었다. 4년 전 그는 ‘약속’ 하나를 믿고 송전탑에서 내려왔다. 4년이 흐르도록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4년 전 아빠 없이 홀로 88일을 견뎠던 딸(18)은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 돼 다시 아빠를 하늘에 뒀다. 남자는 “혼자 남겨진 딸에게 미안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의 목소리가 지하철 소음에 쪼개졌다.

“아빠 보이는 데 왔어.”

7월15일 강병재(대우조선해양하청노동자조직위원회(하노위) 의장)의 딸과 80m 크레인을 올려다봤다. 고공농성 98일 만에 아빠와 딸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거리에서 서로를 봤다. 하늘과 땅에서 손을 흔드는 것으로 두 사람은 아빠와 딸임을 확인했다.

“밥 먹었나?”

아빠가 하늘에서 전화로 물었다. 아빠의 가장 큰 걱정은 딸의 밥이었다.

“아직. 아빠는 먹었나?”

딸이 땅에서 답했다. 딸의 가장 큰 걱정도 아빠의 밥이었다.

크레인에서 내려다보는 아빠에게 딸의 땅은 자신의 하늘만큼이나 뾰족했다. “내가 아빠를 보며 짠한 것보다 아빠가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더 짠한 것 같다”고 통화를 마친 딸은 말했다.

바다와 살을 맞댄 조선소는 거대했다. 거대한 조선소에서 거대한 배들이 만들어졌다. 거대한 배를 만드는 거대한 크레인들이 조선소 곳곳에서 솟아 숲을 이뤘다. 조선소에 꽂힌 바늘처럼 보이기도 했고, 하늘을 찌르는 가시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대한 것들 사이에서 가장 작은 존재는 사람이었다. 육중한 배(GENER8 NEPTUNE)를 건조하는 육중한 크레인(TTC-06호) 위에서 강병재는 보일 듯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하늘에 새털처럼 걸려 있었다.

강병재가 오른 송전탑과 크레인은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안에 있다. 그는 2005년 5월부터 대우조선의 배를 만들었다. 컨테이너선이나 액화천연가스(LNG)선에 전기를 연결했다.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은 자꾸 죽었다. ‘위험의 외주화’ 속에서 하청노동자들은 가장 먼저 죽었다. 강병재는 2007년 하청노동자들의 연대조직 결성을 주도했다. 2009년 그가 소속된 하청업체가 폐업했다. 폐업과 해고에 ‘원청 개입’을 주장하며 송전탑에 올라 복직을 요구했다. 천막도 치지 못한 채 “빗방울이 고압 전류에 차르륵차르륵 타는” 공포를 견뎠다. 사내협력사협의회 대표에게 ‘2012년 12월까지 채용’을 약속받고 88일째 땅을 밟았다.

4년이 흘렀다. 복직을 ‘확약’했던 협력사협의회 대표는 약속 이행 없이 임기를 마쳤다. 신임 대표는 “내가 한 약속이 아니어서 이행 의무가 없다”고 했다. 강병재는 두 번째 고공농성을 시작하며 썼다. “하청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활동하다 해고된 지 7년째다. 지인에게 생활비를 빌리고 새벽에 인력(노동)을 나가지만 이마저 일이 떨어져 힘들다. 딸아이 용돈을 줄 수 없어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을 보며 더 이상 하노위 활동도 생계도 해결할 수 없는 상태에 놓였다.”

크레인 위에 위태롭게 선 강병재 의장이 점심 식사를 하러 나온 노동자들에게 직접 선전전을 하고 있다.

크레인 위에 위태롭게 선 강병재 의장이 점심 식사를 하러 나온 노동자들에게 직접 선전전을 하고 있다.

7월17일 강병재의 크레인 고공농성이 100일을 넘겼다. 88일 송전탑 농성을 합하면 7월29일엔 하늘살이 200일째가 된다. 그날은 그의 딸이 ‘혼자 200일을 견딘 날’이기도 하다. 아빠를 두 번이나 하늘에 둔 딸은 혼자 밥 먹고, 혼자 공부하고, 혼자 잠잔다. 닿을 수 없는 아빠의 하늘 아래서 딸은 혼자 견디는 일에 익숙하다.

딸은 아침 6시5분께 집을 나선다. 아침 식사는 거른다. 6시15분에 출발하는 통학버스를 타고 등교한다. 학교 급식으로 점심과 저녁밥을 해결한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뒤 버스를 타고 밤 10시30분께 돌아온다. “왔나” 묻던 아빠가 없어 썰렁하던 집도 익숙해졌다. 밤엔 밀린 빨래를 하거나 1천 조각짜리 퍼즐을 맞춘다. 가벼운 운동을 하고 밤 12시쯤 잔다. “공포영화를 보지 않는 한 혼자 있어도 무섭지 않다”고 딸은 생각한다. 이혼 뒤 부산에 사는 엄마한텐 아빠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생활비는 아빠가 주고 간 통장에서 빼 쓴다. 통장에 남은 아빠의 전 재산(하노위 후원금)은 300만원이다.

아빠가 올랐던 송전탑은 집 앞에서도 보였다. “어린이날 혼자 있을 딸이 눈에 밟혀” 아빠는 송전탑에서 “미안하다”고 소리쳤다. 아빠의 목소리는 딸에게 닿지 못했다. 아빠의 고공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15살 딸은 빈집에서 사춘기와 싸웠다. “어렸을 때라 아빠가 왜 송전탑에 있는지도 몰랐고 창피하기도 했다.”

파괴된 노동자의 삶은 가정을 깨고 관계도 흔들었다. 아빠는 ‘활동’이 필요했고, 딸은 아빠가 필요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가 끝나면 다른 애들은 엄마가 데리러 왔다. 나는 엄마도 아빠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 비가 와도 우산 들고 마중 올 엄마·아빠가 없었다. 아빠는 내가 할 일을 알아서 하는 아이가 되길 바랐다. 그때 나는 할 일을 알아서 하기보다 돌봄을 받을 나이였다.” 딸에겐 “다른 집의 모든 것”이 부러웠다.

몇 달 전부터 “아빠가 잘해주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놀러가고 싶은 데 없냐”고 물었다. “평소 안 그러던 아빠가 바다 가자면 바다에 가고 영화 보자면 같이 영화를 봤다. 사달라는 것도 사줬다. 이상하고 불안했다. 아빠가 나한테 뭘 잘못했나 싶었다.” 아빠가 어느 날 “혼자 지낼 수 있겠냐”고 물었다. “지난번엔 88일이었지만 이번엔 언제 내려올지 모르겠다”고 했다. 딸은 “걱정도 되고 짜증도 나서” 울었다. 아빠는 “비정규직의 삶과 절망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해해달라”며 울었다.

“아빠한테도 아빠 생활이 있는데 존중해줄 수밖에. 나도 사춘기는 지났으니까.”

하늘 벼랑에 다시 매달린 아빠를 생각하며 딸이 말했다. 아빠가 없어 불편한 건 있다. 얼마 전 학교에서 졸업 앨범을 촬영했다. 하복과 동복을 입은 모습을 따로 찍었다. 동복을 집에 두고 온 딸은 집에 전화해도 가져다줄 아빠가 없어 아쉬웠다. 딸은 다만 아빠의 건강을 걱정했다.

크레인 위에서 아빠 강병재는 위태롭다. 농성 시작 직후 회사는 크레인의 전기를 끊었다. 밤마다 작은 랜턴 하나에 의지해 허공의 암흑과 대결했다. 시력이 많이 나빠졌다. “눈곱이 끼고 이물감이 심하다. 머리가 자주 아프고 잇몸이 모두 헐었다.” 태풍으로 붐대(좌우로 움직이는 크레인의 가로축)가 심하게 흔들렸다. 멀미가 따라왔고 추락의 공포가 밀려왔다.

태풍은 농성지원 천막을 주저앉혔다. 쓰러진 천막을 하청노동자들은 다시 세울 여력이 없다. 신분을 드러내고 하노위 활동을 하는 노동자는 극소수다. 강병재는 크레인 위에서 직접 선전전과 대외 홍보까지 하고 있다. ‘크레인 벼랑’ 위에서 강병재가 핸드마이크로 외쳤다.

“우리는 점점 가난해지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노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소형 핸드마이크는 80m 높이와 조선소 소음 앞에서 무력했다. 그의 목소리는 잘게 찢겨 흩어졌다. 허약한 마이크를 보완하려 붐대 끝으로 걸어가 외치는 위험도 감행했다. 붐대에 묶인 4장의 플래카드는 태풍에 다쳐 누더기처럼 펄럭였다. 걷거나 자전거를 탄 노동자들이 크레인 아래로 무심히 지나쳤다.

교섭은 미궁이다. 두 차례 열렸으나 진척이 없다. 협력사협의회 쪽은 사내하청으로의 복직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약속을 지키라는 것뿐이다. 지켜야 할 약속을 지키지 않아 두 번째 고공농성마저 107일(7월24일 현재)을 넘기고 있다. 합의도 마음대로 깰 수 있는 게 한국의 노동 현실이다. 하청노동자도 사람이다. 약속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그의 딸은 음식 만들기를 좋아한다. 누군가 자신의 음식을 먹고 맛있어할 때 딸은 행복하다. “요리사가 되려면 자격증을 따야 하는데 여건이 안 돼” 마음속 희망을 꺼내지 못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엄마가 있는 부산으로 가고 싶다. “졸업할 때까지 아빠가 크레인에서 못 내려오는 건 아닌지” 딸은 걱정이 많다. 아빠는 “복직 이행 전엔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다. 딸에겐 말하지 못한 말이 있다. 아빠는 “1년을 각오하고” 하늘에 올랐다.

7월21일 법원 집행관이 아빠의 승합차를 압수해 경매에 넘겼다. 농성 직후 대우조선해양은 퇴거 단행 가처분을 신청했다. 법원은 하루 30만원의 이행강제금을 부과(5월14일)했다. 법원은 그의 차 위에 “집행관의 허가 없이 이 자동차를 사용하지 못하며 위반했을 시에는 형벌을 받게 된다”는 ‘자동차 인도 공시’를 붙였다. 딸이 혼자 있는 전셋집과 살림살이까지 법원이 강제집행할까 아빠는 두렵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아빠의 고공이 자란다. 새파란 독이 돋는다.

거제=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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