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굴뚝 위에서 지구가 공전을 완성했다.
연두가 초록이 됐고, 뙤약볕은 태풍을 동반했으며, 낙엽은 눈에 묻혔다. 연두가 다시 솟아 초록으로 우거지고, 뙤약볕과 태풍은 다시 근육을 키우는데, 그는 아무 일 없이 하늘에 매달려 있다. 100일이 되고 200일이 넘고 300일이 지나도 그는 굴뚝에 있고, 여전히 굴뚝에 있으며, 아직도 굴뚝에 있다. 지구가 무감하게 365바퀴를 도는 동안 그는 스타케미칼 45m 굴뚝에 못처럼 붙박여 있다. 새들도 오래 머물지 않는 곳이다. 5월26일 차광호(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대표)는 끝내 하늘에서 굴뚝농성 1년을 채운다. 그는 말했다.
“1년이 됐다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다. 하루아침에 끝날 싸움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나를 걱정해주는 가족과 동지, 친구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지난 4월 차광호는 굴뚝에서 내려올 생각을 했었다. ‘희망’이 그를 고문했다. “교섭이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기대와 좌절을 오갔다. 설 연휴 뒤 특히 힘들었다. 많이 우울했고 감정기복이 심했다. 부모님의 교통사고도 나를 괴롭혔다(굴뚝 올랐던 봄이 다시 왔다).”
차광호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내려와서 싸우자’며 그를 설득했다(더 지체하면 위험하다). 생활고는 해복투 가족들의 삶을 군마처럼 짓밟았다. 내려가겠다는 뜻을 3월 말 동료들에게 전하고 의견을 물었다. 거기까지였다. 그는 몸과 마음을 다시 굴뚝에 묶었다.
“1년 전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하늘에 올랐다. 1년이 됐지만 하늘을 올라야 했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성과 없이 내려가면 힘들게 버텨온 해복투의 앞날마저 장담할 수 없다.”
그는 “한 차례 고비가 더 지나갔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의 착륙은 다시 기약이 없다. 4월1일 ‘김진숙의 309일’을 넘어선 뒤부턴 ‘날마다 쓰는 최장기 기록’을 세는 일도 무의미해졌다.
“공장에 새겨진 시간들을 생각할 때마다 다시 일하고 싶어진다.”
45m 굴뚝 위에서 차광호는 기억과 싸운다. 기계가 멈춘 텅 빈 공장 곳곳에 그와 동료들의 시간이 배어 있다. 공장은 본래 과수원이었다. 과수원 옆은 논이었고 논을 따라 개울이 흘렀다. 2km 거리에 차광호의 고향집이 있었다. 중·고등학생 시절 차광호와 친구들은 과일 향을 맡으며 지금의 굴뚝 아래서 뛰놀았다. 25살 때(1995년) 한국합섬(스타케미칼 전신)이 과수원을 밀고 공장을 세웠다. 서울에서 일하던 차광호는 고향으로 내려와 공장의 노동자가 됐다.
좁고 가파른 굴뚝을 규모 있게 쓰는 일은 100평 방을 채우는 것보다 어렵다. 굴뚝에 오른 첫날 차광호는 긴장 속에 새벽을 보낸 뒤 의식을 잃듯 쓰러져 잤다. 그는 잠에서 깬 자리에 텐트를 쳤다. 작은 1인용 텐트는 추위·더위와 대결하는 그의 최전선 참호다. 텐트를 제외한 공간에 살림이 배분됐다. 텐트 왼쪽 굴뚝 난간엔 비닐을 덮었다. 먹을거리를 두는 부엌이자 볕 좋은 날 하늘을 쪼이는 거실로 쓴다.
부엌·거실의 출입구는 굴뚝에 올라오는 사다리 구멍과 잇닿아 있다. 사다리 구멍 아래에서 1년 동안 밟지 못한 땅이 아득하다. 굴뚝 난간의 넓이는 1m 정도다. 난간 한쪽에 밥을 올리고 내리는 밧줄이 걸려 있다.
“최근 아침밥을 먹고 빈 그릇을 내렸는데 굴뚝 중간에서 밧줄이 엉켜버렸다.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아 20m 지점의 중간 난간까지 내려가 꼬인 줄을 풀었다. 45m의 난간보다 폭이 30~50cm 넓었다. 운동장 같았다. 땅에서 올려다보는 동지들 얼굴도 더 잘 보였다. 조금 더 낮아진다는 것이 그렇게 안도감을 줄지 몰랐다.”
지름 8m의 굴뚝 안엔 지름 6m의 내경이 있다. 굴뚝 내경 꼭대기에 걸쳐진 사다리는 차광호의 운동기구다. 사다리를 철봉 삼아 그는 턱걸이를 한다. 상체 강화운동을 새로 시작했다. 윗몸일으키기와 다리 들어올리기도 운동에 추가했다.
걷기운동 방법을 바꿨다. 굴뚝 둘레를 왕복해 걷되 농성 날짜만큼 횟수를 늘려가는 방식에서, 목표량을 정하고 달성 시간을 단축하는 쪽으로 전환했다. ‘굴뚝 222바퀴 주파’ 시간이 45분에서 현재 35분까지 줄었다.
굴뚝을 1년 동안 돌며 그의 몸을 지탱해준 운동화 뒤꿈치가 굴뚝 난간처럼 둥글게 닳아 밑창을 드러냈다. 1년 새 두 켤레의 신발 밑창이 못쓰게 됐다. 아내한테 새 운동화 사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4월에 내려간다’는 이야기를 동료한테 듣고 기대했을 아내였다. 한국합섬 가동 중단(2006년) 이후 1년8개월밖에 돈을 벌지 못한 남편 대신 아내는 어린이집을 다니며 가정을 꾸렸다. ‘아직 내려갈 수 없다’고 말하며 차광호는 단어를 잇지 못했었다.
새 운동화는 해복투 동료들이 사서 올렸다. 10명의 동료는 차광호에게 ‘또 다른 자신’이었다. 박성호(전 해복투 대표), 정병옥(정책기획), 고민각(법률), 홍기탁(농성단 대표), 박준호(상황), 김덕원(조직), 손남호(법률), 김옥배(대외협력), 김진원(농성장), 조정기(총무).
막내 김진원(스타케미칼 시절 입사)를 제외한 10명이 한국합섬 때부터 서로의 곁을 지켜왔다. 그들 모두가 생존 위기에 직면해 있다. “대부분 아파트 전세를 담보 잡거나 빚을 낸 돈으로 견딘다. 적금이나 보험은 헐어 쓴 지 오래다. 기혼자의 경우 아내들이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하며 ‘최저생계’를 꾸린다. 전기세·수도세 납부가 밀린 적도 많다.” 홍기탁은 전했다. 아파트가 빚으로 넘어갈 상황에 처한 한 동료는 주간엔 하청업체에서 돈을 벌고 야간엔 농성장에서 잔 뒤 출근한다. 6개월간 지원되던 금속노조의 생계지원비도 지난 2월치를 마지막으로 끊겼다.
굴뚝 내경을 사이에 두고 텐트 반대쪽엔 쓰레기장이 있다. 쓰레기장 오른편은 텃밭이자 화단이다. 굴뚝에서 빛을 가장 잘 받는 공간이다. 차광호는 콩과 열무, 상추와 수박을 심어 ‘굴뚝 농사’를 짓는다. 상추와 열무는 싹을 쑥쑥 올려 두어 차례 솎아냈다. 땅에서 올려준 비빔국수에 섞어 먹거나, 된장과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는다. 땅의 노동자가 ‘굴뚝 농부’가 돼가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텃밭부터 둘러본다. 내 손길이 필요한 것들이 굴뚝에 있고 나와 교감할 수 있는 생명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받는다. 살아 있는 것들을 돌보며 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놓지 않게 된다.”
콩은 각별하다. 강낭콩은 지난해 굴뚝에서 수확한 8알 중 4알을 다시 심었다. 나머지 4알은 이 내려받아 서울 사무실에 심었다(‘굴뚝콩’이 삶의 뿌리를 내리도록). 지난해 생장 시간이 짧았던 강낭콩은 작고 얇고 허약했으나 죽지 않고 싹을 틔웠다. 바람에 잎이 찢긴 채로 굴뚝콩은 씩씩하게 자라고 있고, 시들어 기력을 잃었던 땅의 콩도 최근 다시 생기를 찾았다.
“잘 자라줘 대견하다. 심을 땐 싹이나 올릴까 싶었는데 뿌리를 내렸다. 굴뚝에서 태어난 콩을 보면서 우리 해복투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몸에 상처를 안고도 견뎌주는 콩이 나 같고 내 동지들 같아 안쓰러우면서도 고맙다.”
바람은 계절마다 방향을 바꿨다. 낙동강을 쓸고 지나며 냉기를 더한 겨울바람이 북서쪽에서 불었다. 빈 페트병에 오줌을 채운 병으로 벽을 쌓아 막았다. 계절이 바뀌자 바람은 남동쪽에서 불어 굴뚝으로 진군했다. ‘겨울 방풍 장비’가 돼준 플래카드(“공장가동 실시하라”)를 떼어 봄바람의 길목 앞에 붙였다.
회사(모회사 스타플렉스)는 완고하고 교섭은 교착돼 있다. 5차례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사 쪽은 ‘제3법인(스타케미칼 재가동이나 스타플렉스로의 고용은 절대 불가) 신설을 통한 고용’안을 제시했다. “사업성을 알 수 없는 새 법인을 세워 고용한 뒤 언제든지 해산시켜버릴 수 있다. ‘해산 때 스타플렉스로의 고용승계’ 약속을 요구했으나 사 쪽이 거부(5월7일)했다.”(홍기탁)
하늘에 오른 삶이 일상이 될 때 그들의 삶은 날마다 절벽이다. 하늘의 삶이 무관심의 대상이 될 때 땅의 삶도 더없이 위험하다. 한 인간을 하늘에 두고도 주름 없이 매끈한 세계에선 땅에도 하늘이 팬다. 땅의 횡포만큼 난망하고 아득한 하늘에서 차광호는 말했다.
“맑든 흐리든 아직은 하늘에 희망을 걸겠다. 굴뚝은 내게 남은 마지막 승부처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스타케미칼 해복투 투쟁기금 마련 후원 행사: 6월12일 오후 2시부터 서울 남영역 ‘슘’. 문의 010-8378-1055. 후원 대구은행 508-12-002749-0(오승미)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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