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시▶ 땅이 버린 자들은 하늘에서 기상한다. 광고탑(서울 중구 소공로 서울중앙우체국 앞) 안엔 3개층이 있다. 강세웅(LG유플러스 비정규직 노동자)과 장연의(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 노동자)는 지붕으로 통하는 3층에서 자고 먹는다. 1.5m는 나란히 누울 수 있는 폭이 아니다. 두 사람은 10여m를 사이에 두고 광고탑 양 끝에 침낭을 편다. 목디스크를 앓는 장연의는 자고 일어나면 손이 저리고 쥐가 난다. 그들이 밤새 굳은 몸을 스트레칭한다. 몸의 무게가 실릴 때마다 광고탑이 흔들린다. 20m 광고탑에서 고공의 일상이 무심한 하루를 보탠다.
09시▶ 세수와 양치는 2층에서 한다. 세수는 물티슈로 한다. 아침은 컵라면으로 대신한다. 컵라면은 땅의 동료들이 먹는 음식이다. ‘현장복귀 투쟁’으로 전환한 뒤부턴 동료 10여 명이 번갈아가며 광고탑을 지키고 있다. 식후 장연의는 당뇨약을 먹는다. 땅에선 한동안 먹지 않던 약을 하늘에 올라 다시 먹기 시작했다.
10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로 고도 0m의 세상을 살핀다. 세월호 1주기 날(4월16일)이다. ‘자식 죽은 이유가 알고 싶다’는 부모들을 ‘돈 밝히는 자들’로 만든 국가에 분노한다. 땅도 하늘만큼이나 가파르다. 눈을 두는 곳에 추락이 있다. 광고탑에 설 때마다 눈앞과 발끝이 직각으로 떨어진다. 그 수직의 세계를 119에서 올려준 밧줄로 몸을 묶고 70일을 견뎠다. 구미 스타케미칼의 차광호는 324일째 굴뚝에 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위안 받고 절망한다.
12시▶ 동료들이 올려주는 점심밥을 먹는다. 밥은 스티로폼 밥상에 차려 먹는다. 먼지가 주인인 영토에 사람이 기거하면서 먼지를 먹는 것인지 밥을 먹는 것인지 모를 식사를 한다. 참치캔 빈 깡통을 버너에 올리고 몇 숟가락씩의 국을 데워 먹는다(장연의). 한겨울엔 가스가 얼어 음식을 데우려면 가스부터 데웠다.
14시▶ 광고탑 지붕에 앉아 책을 읽는다. 탑 위에 설 때마다 공포로 떨었는데, 이젠 두려움을 깔고 앉아 문자를 인식한다. 20m 높이와 1.5m 폭에 적응해버린 자신의 몸에서 그들은 위험을 감지한다(강세웅). 탑이 흔들리고 내장이 따라 흔들릴 때마다 고도 20m에 엎드려 고도 0m를 꿈꾼다(장연의). 지나가는 사람들이 광고탑을 올려다본다. 그들의 눈에 고공은 ‘구경거리’인 듯했다. 그들을 ‘구경’하며 강세웅은 땅과 하늘처럼 나뉜 두 세계를 생각했다.
16시▶ 땅의 집회를 하늘에서 참여한다. 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지부는 최근 협력사들과 교섭을 타결했다. 조합원 총투표도 가결됐다. 개별 센터와의 보충교섭에선 고용승계와 재하도급 해결 등을 두고 파행이 일고 있다. 파행이 있는 한 장연의의 고공농성도 끝을 볼 수 없다. 억울한 자는 행진한다. 명동 거리를 지나는 행진을 지켜보며 ‘행진이 필요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8시▶ 동료들이 올려준 저녁밥을 먹는다. 대변과 소변은 1층에서 처리한다. 대변은 종이박스에 비닐봉지를 깔고 본 뒤 봉해서 내린다. 1층, 2층, 3층의 용도를 구분하는 것으로 그들은 인간다운 삶을 갈망한다.
19시▶ 하늘에서 땅의 집회에 참여한다. LG유플러스 사 쪽 대표단은 비정규직지부와의 교섭을 중단했다. 형식적으로 진행되던 교섭마저 멈췄다. 애프터서비스(AS) 기사 임금안을 두고 합의했던 내용을 뒤집었다(강세웅). 시민사회단체들과 ‘진짜 사장’ 구본무 회장 면담에 나섰으나 거부당했다(4월15일).
21시▶ SNS를 열어 고도 20m의 하루를 고도 0m의 세상으로 타전한다. 교섭에 진전 없는 날들이 쌓이면서 농성 60일째 전후 마음에 고비가 왔다(강세웅). SK브로드밴드의 타결 소식을 들은 뒤엔 더 그랬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 시작한 싸움인데 싸울수록 사는 게 더 힘들어졌다. 한겨울 노숙, 삼보일배, 오체투지, 단식…. 땅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더는 없어 오른 하늘이었다. 해가 사라지면서 광고탑 안에도 어둠이 짙었다. 환풍기 구멍 너머로 파란 불빛이 들어왔다. 무엇을 더 해야 할까.
22시▶ 발도 물티슈로 씻는다. 따뜻하게 덥힌 물에 티슈를 적셔 밤마다 발을 닦는다. 무엇인가 깨끗해지기 위해 무엇인가 더러워져야 하는 이치는 괴롭다. 물은 최대한 쓰지 않는다. 광고탑에 물을 버리면 탑 아래로 흘러 땅을 지키는 동료들이 힘들어진다. 그들의 고생에 비하면 고공농성의 하루는 편하다고 생각한다.
23시▶ 땅이 버린 자들은 하늘에서 취침한다. 3층에 들이치는 비를 비닐 비옷과 비닐 쓰레기봉투를 감아 막았다. 바람이 쿵쿵 때리는 철제 광고탑 안에서 수면과 각성 사이를 오간다. 다시, 24시간이 흘렀다. 본래 사람 사는 곳이 아닌 하늘에서, 그만큼 다시, 사람이 살았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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