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장기 고공농성.
이처럼 찬란한 계절에 이토록 잔인한 기록이 쓰이고 있다. 4월1일(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309일 최장기 굴뚝농성 기록 경신일)이 온다. 달이 차듯 차광호(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대표)의 ‘310일’이 찬다. 달은 가득 차는 순간 몸을 비우기 시작하지만 차광호의 시간은 끝없이 부풀 뿐이다. 부풀기만 하는 시간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터질지 알 수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봄에 올라간 차광호가 다시 봄을 맞으며 사계절을 완성했다. 땅에서 꽃이 피고 비가 내릴 때, 굴뚝에서도 잎이 지고 눈이 쌓였다. 차광호가 하늘 생활 동안 굴뚝에서 찍은 사진을 에 타전했다. 이 글은 차광호가 내려준 사진에 그와의 인터뷰를 덧대 정리한 ‘300일간의 고공생태보고서’다.
폐업▶ 2014년 5월26일. 스타케미칼 김세권 사장과 금속노조 스타케미칼지회가 ‘청산·매각 합의서’에 사인했다. 노사는 공장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마음이 급했다. 2013년 1월2일 회사가 ‘청산’을 언급한 뒤부터 힘겹게 버텨온 시간이었다. 노조는 분열(1월3일 일부 조합원들이 청산에 반대한 차광호 지회장 불신임 서명→1월4일 조직 분열 우려한 차광호 사퇴→1월8일 사 쪽의 권고사직 안내→2월8일 지회 비상대책위원회가 차광호 등 제명→2월17일 사 쪽이 권고사직 반대자 29명 해고→2월19일 해고자들 해복투 결성)했다.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없었다.
굴뚝▶ 5월27일. 아내에게 “옷을 챙겨달라”고 했다. 굴뚝에 올라간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공장 상황이 나빠져 며칠 못 들어올 수 있다”고만 했다. 바람이 많은 날이었다. 옷 두 벌과 칫솔·치약, 생수 두 병을 챙겼다. 밤 10시가 넘어 집을 나섰다. 아내가 평소처럼 “잘 다녀오라”고 했다. 늘 하듯 짧게 답했다. “간다.” 공장 담을 넘었다. 철제 사다리를 잡고 굴뚝을 올랐다. 발밑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같았다. 하늘만 보고 사다리를 밟았다. 굴뚝 위에 발을 딛자 다리가 풀렸다. 바람이 맹렬했다. 무서워도 숨을 곳이 없었다. 휴대전화 문자를 보냈다. 해복투 동료들이 달려왔다.
45m▶ 5월28일. 밤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어둠이 빠져나간 곳에 45m 하늘이 가득했다. 긴장으로 떨며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굴뚝 바닥에 쓰러져 잤다. 방송사 카메라가 다녀갔다고 동료들이 전했다. 그들이 어떤 하늘을 봤는지 기억에 없었다. 다시 땅을 밟을 날이 가늠되지 않았다. 땅에서 첫 끼니로 삼계탕을 올렸다. 몸 챙기라며 염려 담아 올려준 음식을 다 먹지 못했다.
설사▶ 5월29일. 전날 남긴 삼계탕을 마저 먹었다. 동료들 마음까지 버려질까 아까웠다. 탈이 났다. 설사를 8차례 했다. 화장실을 미처 만들지 못했다. 뒤처리 방법도 익히지 않은 채였다. 무참하고 당혹스러웠다. 굴뚝농성은 생활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공포▶ 앞이 안 보여 하늘에 올랐는데 보인다는 사실이 그렇게 공포스러울 수 없었다. 창살 모양의 난간은 굴뚝의 높이를 고스란히 노출(시멘트벽으로 된 쌍용자동차 굴뚝 난간은 땅으로 향하는 시야를 차단)시켰다. 등을 바닥에 붙여야 안심이 됐다. 밧줄로 몸을 묶어야 발을 뗄 수 있었다. 가지고 올라간 플래카드로 난간을 둘러 ‘너머’를 가렸다. 땅에서 올려보낸 물통(플라스틱 페트병)에 오줌을 모았다. 난간에 오줌통을 쌓아 벽을 만들고 시선을 차단했다. ‘오줌벽’에 햇빛이 내리면 오줌 빛깔에 따라 벽이 화사해졌다.
악몽▶ 악몽이 자주 왔다. 형체 없는 가위가 덮칠 때도 있었고, 선명한 형상으로 육박할 때도 있었다. 농성 기간이 길어지면서 악몽의 내용도 달라졌다. 최근(농성 300일 전후) 꿈에선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식을 마친 뒤에야 땅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굴뚝을 다시 오르려는데 친구가 “이젠 됐다”며 막았다. 친구를 죽이고 굴뚝으로 되돌아갔다. 끔찍했다.
불효1▶ 고공농성 한 달이 못 돼 장모님이 암 선고를 받았다. 입원 중 몸무게가 40kg으로 줄었다. 체력이 항암치료를 감당할 수 없어 최근 퇴원했다. 장모님께 전화를 걸어 “출장이 길어져 죄송하다”며 용서를 구했다. “귀국하는 대로 찾아뵐 테니 잘 버티셔야 한다”고도 했다. 충격을 받으실까봐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장모님을 생각하며 삶과 죽음을 고민했다.
아내▶ 아내도 속였다. 굴뚝에 올랐다는 사실을 한동안 알리지 않았다. 매일 통화하면서도 고공농성 중임을 숨겼다. 열흘쯤 지나 소식을 들은 아내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11월2일은 18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함께하지 못하는 첫 번째 기념일이었다.
생계▶ 한국합섬(스타케미칼 전신) 파산(2007년) 이후 9년 동안 일한 시간이 1년8개월(스타케미칼 가동 기간)뿐이었다. 아내가 어린이집을 다니며 생활을 책임졌다. 하늘에서 가장 힘든 일은 땅의 동료들의 생활고였다. 아내들의 고통이 컸다. 공장을 다니거나 부업을 하며 남편 역할까지 떠맡았다. 금속노조에서 나오는 생계지원금(6개월 한시)이 3월 말로 끝난다. 마음이 타고 있다.
운동▶ 굴뚝에 오른 첫날 코피를 쏟았다. 마음보다 몸이 앞서 힘들어했다. ‘하늘 선배’ 이정훈(금속노조 유성기업 영동지회장·259일 충북 옥천 광고탑 농성)으로부터 운동법을 전수받았다. 굴뚝에 맞는 운동법(제1043호 ‘안지름 6m, 1m의 난간대, 한 번 돌면 25m, 이 거리를 매일 고공농성 일수만큼 돈다’)도 개발했다. 35인치였던 허리둘레가 30인치로 줄었다. 배가 들어가고 왕(王)자가 새겨졌다. 운동도 시간을 당할 순 없는 것 같다. 고공농성 300일이 넘어가면서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 마음의 근육도 처음 같진 않다.
고비1▶ 2014년 8월. 여름 열기 속에서 지쳐갔다. 80여 일을 하늘 벼랑에 매달려 있었지만 스타케미칼 사태는 알려지지 않았다. 연대자도 많지 않았고, 회사는 미동하지 않았다. 농성을 계속해야 할지 회의도 들었다. 그 무렵 1차 희망버스가 왔다. 굴뚝 아래 모인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고립감을 이겨냈다. 좀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름▶ 여름은 겨울보다 무서웠다. 천둥·번개가 짐승이라면 태풍은 이빨 세운 괴물 같았다. 굴뚝의 인간은 바람 앞에 무력했다. 비를 가리던 비닐과 천막이 모두 날아갔다. 핏줄 불뚝한 바람이 옷을 걷어가고 용기도 걷어갔다.
생일▶ 하늘에서 생일을 맞았다. 생일상을 3일 연속 받았다. 12월13일엔 2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본래 생일인 12월14일엔 가족이, 12월15일엔 경남 밀양·경북 청도군 삼평리 어르신들이 굴뚝을 찾아 생일 밥상을 올렸다. 45m 하늘에서 생일을 만난 것도 처음이고, 이날만큼 뜨거운 생일 축하를 받은 것도 처음이었다.
일상▶ 2014년이 2015년으로 바뀌었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와도 뜨고 지는 매일의 해는 변함없었다. 굴뚝농성이 생활이 되고 있었다. 농성이 생활이 될 때 가장 위험하다고 김진숙 지도위원이 말했다. 극한의 농성에 무감한 사회가 무서웠고, 극한의 일상에 젖어드는 스스로가 아찔했다.
고비2▶ 1월13일로 예정됐던 교섭을 회사가 일방 중단했다. 고공농성 200일 넘어 시작된 대화의 끈이 허무하게 잘려나갔다. 회사는 굴뚝 아래 동료들이 사용하던 화장실도 단전·단수했다. 하늘살이는 대책 없이 길어지고, 회사는 ‘3승계’(고용승계·노조승계·단협승계) 요구 거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자꾸 눈물이 났다.
대화▶ 하늘엔 대화 상대가 없었다. 굴뚝에 쌓인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고 말을 걸었다. “나 외로운데 곁에 있어줄래?” 다음날 아침 눈사람은 녹아서 가버렸다. 동료들이 올려준 홍시 하나를 남겨 굴뚝 난간 앞에 뒀다. 까치가 한번 찍어먹더니 다시 오지 않았다. 기러기들이 굴뚝 위를 줄 맞춰 날아갔다. 굴뚝을 벗어나 새처럼 날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겨울 45m 굴뚝 천막에 모기가 나타났다. 먼저 죽은 동지의 기일이었다. 동지가 찾아왔다고 믿고 혼잣말을 했다. 말벌 한 마리가 날아왔다. 포도 껍질을 벗겨 벌 앞에 놨다. 벌이 포도물을 빨아먹었다. 손가락에 포도즙을 묻힌 채 10여 분간 있어봤다. 손가락에 말벌이 앉았다. 말벌은 이튿날에도 손가락에 올라왔다. 사흘을 같이 놀다 말벌도 날아갔다. 인간이 살 수 없는 하늘에 인간이 살면서 음식이 따라 올라왔다. 음식이 출현하면서 음식을 먹는 곤충이 나타났다. 곤충이 생기면서 곤충을 잡아먹는 거미가 줄을 타고 내려왔다. 굴뚝에서 생태계가 태동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보고 있기만 해도 그리웠다.
철거1▶ 1월23일. 공장에 전기를 공급하는 송전탑을 사 쪽이 철거했다. 굴뚝만큼 가파른 송전탑에 매달려 전기노동자들이 탑을 해체했다. 그들에게도 송전탑은 고공이었을 것이다. “내 살점을 뜯어내는 아픔”이라고 기록했다.
철거2▶ 3월11일. 사 쪽이 원료탱크(사일로·3천t급) 철거를 시도했다. 원료탱크들이 철거되면 공장 재가동은 불가능해진다. 동료들이 정문을 막고 차량 진입을 차단했다. 담을 넘은 철거업자들이 사일로 천장에 올라 철거 작업을 했다. 오줌통을 집어 사일로 지붕 위로 던졌다. 폭탄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철거업자들이 철수했다. 오줌통의 쓸모 하나를 더 찾았다.
불효2▶ 3월12일. “오늘은 사적인 일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일찍 쉬어서 죄송합니다.” 페이스북에 짧은 글을 남기고 휴대전화를 껐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태우고 오토바이를 몰다 트럭과 부딪혔다. 어머니가 중환자실로 이송됐다. 부러진 갈비뼈 4대가 내장을 찔러 장출혈을 일으켰다. 아버지는 갈비뼈 1개가 부서졌다. 소식을 듣고 굴뚝의 높이감이 사라졌다. “부모가 죽어가는데 안 내려오고 뭐하냐”며 아버지가 호통쳤다. 가슴이 갑갑하고 숨이 막혔다.
기록▶ 3월22일 고공농성 300일이 됐다. 4월1일이면 310일째가 된다. ‘간절하게’ 309일 기록을 깨고 싶지 않다. 진전 없이 내려가고 싶은 마음은 더욱 없다. 지금 내려가면 남은 것이 무엇일지 알 수 없다. 공장을 다시 돌리지 못할 때 동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답을 얻지 못했으므로 데드라인도 보이지 않는다.
얼굴▶ 짧은 스포츠머리로 굴뚝에 올랐다. 날짜가 더해지면서 머리가 길고 수염이 자랐다. 그 길이만큼 착륙의 길도 열릴 거라 믿고 싶었다. 길은 열리지 않았는데 얼굴은 백발의 할아버지가 돼 있었다. 하늘 생활 300일째 머리를 밀고 수염을 잘랐다. 목욕을 하고 옷도 갈아입었다. 그리고 썼다. “새로이 하루를 시작하며. 좋은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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