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만의 ‘3월 한파주의보’. 얼굴을 찢어대는 면도날 추위. 바람이 얼려버려 서걱대는 근육. 침낭 말아 돌바닥 기는 누에고치 노동자들. 강풍에 요동치는 20m 광고탑의 두 남자. 땅의 동료들 어깨에 쌓아올린 33일째 고공의 삶. 사람으로 살고 싶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 하늘과 땅을 삼켜버리는 먹물 같은 어둠. 어두운 하늘을 송곳 구멍처럼 뚫고 나오는 고층의 불빛. 그 불빛이 수놓는 거대기업의 화려와 찬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원청과 교착된 교섭. 2015년 3월10일 저녁 서울 한복판의 그로테스크.
SK브로드밴드·LG유플러스 비정규직 장연의·강세웅씨의 고공농성장(서울 중구 서울중앙우체국 앞 광고탑)을 멀리서 지켜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하늘 선배’인 씨앤앰 비정규직 노동자 임정균·강성덕씨였다. 두 사람은 고공농성 50일째인 지난해 12월31일 교섭 타결로 땅을 밟았다. 그들의 ‘착륙’은 정규직·비정규직의 연대, 시민사회의 지원, 원청의 책임 있는 자세가 이룬 드문 성과로 평가받았다. ‘진짜 사장’인 통신 대기업들이 하청노동자들과의 무관함을 강조하며 교섭을 거부하는 현 상황과는 달랐다.
세 사업장 하청노동자들은 모두 희망연대노동조합 소속이다. SK브로드밴드·LG유플러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임정균·강성덕씨의 광고탑(서울파이낸스센터 앞) 농성 때 연대투쟁으로 지원했다. 강성덕씨는 설 연휴 전날 장연의·강세웅씨의 고공농성장을 찾은 뒤 주말마다 광고탑 ‘근처’를 다녀간다. 고공농성장이 보이는 한 커피숍에 앉아 하늘 노동자들의 위태로운 모습을 지켜본다. 그와 임정균씨는 고공농성 ‘이력’으로 아직 경찰 조사 중에 있다. 광고탑 밑에 얼굴을 비치거나 발언을 하면 농성팀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하고 있다. 자신들이 올랐던 하늘만큼 가파른 고공의 벼랑 곁을 맴돌며 그들은 마음의 부채감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강성덕씨는 “우리가 겪어본 공간이지만 얼마나 위험한지, 견딜 만한지, 궁금하고 염려된다”고 했다.
땅을 밟은 임정균씨는 케이블방송비정규직지회 정책부장 자리로 돌아갔다. 강성덕씨는 병원 퇴원(1월20일) 열흘 뒤(2월2일)부터 출근했다. 서울 광진구 군자동 현장에 배치됐다. 설치·수리(해고 전 업무) 일이 구내망 유지·보수(교섭 합의에 따라 해고자 86명을 고용한 씨앤앰 원청의 신규법인 협력사 소속)로 바뀌었다. 그는 “입사 뒤 줄곧 애프터서비스(수리)를 하며 고객 만나는 일이 즐거웠는데, 지금은 비포서비스 쪽이어서 기계만 쳐다보며 일해 아쉽다”고 했다. 임정균씨는 “상여금 계산 등 합의 이행을 두고 노사 간 해석차가 없지 않다”고 했다.
강성덕씨는 땅으로의 ‘하강’을 아버지와 겹쳐 기억했다. “사다리차를 타고 내려올 때 저 아래에서 아버지가 울고 계신 모습이 가장 먼저 보였다.” 개인택시 기사인 아버지가 가끔 광고탑 밑에서 몇 시간씩 서성이다 돌아가는 모습을 하늘에서 아들은 보곤 했다.
모든 장기 고공농성자들은 땅을 밟자마자 극심한 어지럼증을 호소한다. 반백일 만에 땅에 선 그들도 어김없이 ‘땅멀미’를 겪었다. 임정균씨는 “끔찍한 고통이었다”고 했다. “코끼리코를 하고 1만 바퀴는 돈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몸에 새겨진 ‘하늘의 무늬’를 아직 다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고공농성의 후유증은 오래갔다. 병원에서 두 사람은 ‘전자파후유증후군’을 진단받았다. 광고탑 내부에선 사방의 회로판들이 ‘찌지직’ 하며 전자소음을 냈다. 농성 해제 뒤에도 그들은 이명과 두통에 시달렸다. 전자파 피해라고 판단하면서 의료진도 명확한 연관성을 설명하진 못했다. 전자파가 인체에 유발하는 증상이 명확하게 보고되지 않은 탓이다. 광고탑에서 두 사람은 어지럼증으로 일순간 의식이 끊기는 증상을 호소했다. 당시 응급진료를 했던 의사도 전자파의 영향을 우려했다. 사방이 막힌 광고탑 내부에서 50일을 지낸 임정균씨는 “창문이 없는 곳에 있을 때면 지금도 가슴이 답답해 참기 어렵다”고 했다.
3월17일이면 장연의·강세웅씨의 하늘 생활(장시간 노동·수당 착복·다단계 하도급 개선 등 요구)은 40일째가 된다. 열흘 뒤면 임정균·강성덕씨의 고공농성 일수를 채운다. 하지만 통신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사태는 해결의 진전이 없다. 교섭 대리인인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LG유플러스 개통 기사들에게 평일 추가 연장근로를 하지 않으면 임금 15만원을 삭감할 것을 요구해 반발을 샀다. 노사 집중교섭은 3월10일 중단됐고, 노조는 교섭장에서 철수했다. 3월5일 ‘현장복귀투쟁’으로 전환한 SK브로드밴드 노동자들도 내부고발(지난 2월26일 시민사회단체가 고객센터의 개인정보 불법유출을 검찰에 고발)을 이유로 부당한 압박을 받았다. 강북센터장은 복귀 노동자들의 업무지역을 일방적으로 변경한 뒤 철회를 조건으로 노조활동 축소, 휴일근무 거부 불가(토요일 휴일 제외 포함), 센터 이미지 훼손 때 징계 수용 등에 동의할 것을 강요했다. 강북센터 조합원들은 센터장의 요구를 거부하고 파업농성에 재합류했다.
임정균·강성덕씨는 ‘고공농성 조기 종결과 장기화를 가르는 열쇠’를 원청의 태도가 쥐고 있다고 했다. “재계를 이끄는 재벌들이 경총을 앞세워 수수방관하고 있다. 자기 브랜드로 일하는 노동자들이 하늘에 올라가 있으면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하지 않나.”
광고탑에서 견디는 방법도 조언했다. 두 사람은 “고공농성 50여 일 시점은 교섭에 진전이 없을 때 매우 힘든 시기다. 땅의 동료들을 믿고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임정균씨는 돌이켰다. “광고탑 아래 동료들의 단식농성장이 경찰에 강제 철거되는 장면을 본 뒤 마음이 쪼개져 3일 동안 탑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성덕이는 동지들이 삭발하는 걸 보고 오열했다. 하늘에서 싸움 상대는 시간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다.” 강성덕씨는 “일부러 날짜도 세지 않았다”고 했다.
광고탑은 사각형의 전광판이 수직으로 직립해 있다. 바람 받는 면적이 넓어 진동도 심할 수밖에 없다. 임정균씨는 “몸이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흔들린다. 광고탑 위에 올라설 땐 밧줄로 몸을 묶어 지지대에 팽팽하게 고정해야 한다”고 했다. 강성덕씨도 말을 보탰다. “광고탑이 격랑 위의 조각배처럼 출렁거려 뱃멀미 증상이 온다. 배에 누워 파도가 잔잔해지길 기다리듯 가만히 누워 바람이 순해지길 기다리는 게 좋다.” 좁은 공간이지만 가능한 방법을 찾아 최대한 운동을 많이 해야 한다는 말도 전했다.
환절의 문턱에서 ‘봄을 막아선 빙벽 추위’에 광고탑을 지키는 노동자들은 지하도로 피한(避寒)했다. 얼음장 지하 바닥에 침낭을 깐 노숙의 노동자들을 찾아 임정균·강성덕씨가 안녕을 기원했다.
이경재 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지부장은 에 말했다. “고공농성 날짜가 쌓여도 재벌 원청들은 눈 깜짝하지 않는다. 우리도 더 독해질 수밖에 없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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