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번째 고공의 해가 떴다.
추락을 두려워하며 견딘 하루가 300번, 가위에 눌려 밤을 지새운 한 달이 10번, 시간의 속도를 일깨우는 계절의 전환이 4번, 손가락 꼽으며 의미 부여하는 100일이 3번, 득실 정산이 불가능한 회계 분기가 2.5번…. 그 숫자들이 45m의 고도와, 고공의 미세먼지와, 차광호의 하늘살이와 뒤섞여, 그날, 3월22일이 왔다.
스타케미칼 차광호(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대표)의 굴뚝농성이 조우하지 말아야 할 숫자 300과 만났다. 최병승·천의봉(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해고노동자)의 296일 철탑농성 기록은 3월19일(297일째·역대 2번째) 넘어섰다. ‘무참한 숫자’인 310(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최장기 기록 경신일)을 향해 시계는 별일 없다는 듯 재깍대고 있다.
스타케미칼은 2007년 파산한 옛 한국합섬을 2010년 7월 인수(노조와 고용 승계·단체협약·노조 인정 등 ‘3승계’ 합의)해 2011년 4월 재가동했다. 1년8개월 만인 2013년(1월 노사교섭에서 사 쪽 ‘청산 계획’ 공식 언급) 적자와 경기침체를 이유로 공장 문을 닫고 철수(권고사직 거부한 29명 해고 뒤 현재 11명이 남아 해복투 활동)했다. 헐값에 공장을 인수한 뒤 차익을 남기고 팔아치울 의도였다며 해고자들은 ‘먹튀’ 의혹을 제기했다. 300일 동안 굴뚝의 기울기는 조금도 완만해지지 않았다. 해고자들의 ‘3승계 합의 이행’ 요구에 사 쪽의 ‘불가’ 입장은 변함없다. 이 사태를 바라보는 사 쪽의 생각을 들었다. ‘첨예의 날’은 뾰족하고 파리했다.
회사(교섭 담당 전무)는 파산의 주된 원인을 ‘강성 노조’ 탓이라고 했다. 차광호 집행부 출범(2011년 11월) 이후인 2012년 사 쪽은 ‘비정규직 전면 허용 안 되면 회사 문을 닫겠다’며 동의를 요구했다. 노조와 갈등이 확산됐다.
“스타케미칼 인수 때도 노조가 있는 회사를 사면 안 된다며 주위 사람들이 말렸다. 당시 나는 한국합섬의 파산엔 그 회사 사주의 잘못도 있다고 봤다. 그래서 노조가 강성이 된 것이니 우리가 경영을 잘하면 문제없을 거라며 사장님께 보고했다. 요즘 시대는 경영자와 노동자가 일치단결해도 기업이 잘될까 말까다. 무쟁의를 약속했던 집행부가 바뀌면서 노조가 파업을 했다. 수익이 급격히 악화됐다.”
노조 때문에 공장 문을 닫았다는 뜻인가.“물론 경기도 안 좋았다. 다른 회사들 상황도 어려웠다. 파업 전 매달 5억원 규모의 적자가 파업 뒤 20억원으로 늘어났다. 노조 때문이다. 지금 해고자들이 파업을 주도한 집행부 사람들이다.”
‘모기업 스타플렉스로의 고용 승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인가.“노조 때문에 스타플렉스까지 망하면 어떡하나. 노조를 한번 경험해봤기 때문에 이젠 불안해서 못한다. (고용 승계를 요구하는 해고자) 11명은 일할 사람들이 아니다. (고용이 승계되면 노동)운동만 할 사람들이다.”
굴뚝농성이 300일 됐는데 협상의 여지는 없나.“협상 가능한 요구들이면 협상할 수 있겠지만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하고 있다.”
회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안은 뭔가.“권고사직을 수용한 사람들에겐 6개월치 월급을 위로금으로 줬다. 권고사직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은 2개월 월급을 해고수당으로 줬다. ‘4개월치 차액 지급’ 방식의 합의는 언제든 열려 있다. 그 책임까지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공장 철거는 계속 시도(3월10~11일 원료탱크를 철거하려다 해고자들의 정문 봉쇄에 막혀 무산)할 건가.“공장을 재가동할 인수자가 있으면 매각하면 된다. 그러면 해고자 고용 승계도 가능할 텐데 인수자가 없다. 매각 협상이 다 실패했다. 해외 매각도 어렵다. 이대로 가면 모기업 스타플렉스도 문을 닫을 수 있다. 설비를 떼서 고철로라도 팔아야 한다. 철거는 계속할 것이다.”
해고자들은 사 쪽의 태도에 반발했다. 홍기탁 해복투 투쟁단 대표는 말했다.
“대화로 해결 지점을 찾아야 차광호 동지도 굴뚝에서 내려올 수 있다. 회사가 대화는 단절한 채 철거를 시도하면서 고공농성을 지속하게 만들고 있다.”
지난 연말 두 차례의 만남 이후 사 쪽은 1월13일로 예정돼 있던 교섭을 일방 중단했다. 공장 정문 농성팀들이 사용하던 화장실도 단전·단수했다. 사 쪽의 철거 시도에 항의하며 3월16일 교섭 담당 전무를 만난 해고자들은 김세권 사장과의 교섭 자리를 요구한 상태다.
“철거 강행의 의미는 명확하다. 원료탱크를 고철로 판다는 뜻은 공장을 재가동하거나 우리 요구를 수용할 계획이 없음을 외부적으로 공표하는 것이다. 해고자들이 철거를 막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충돌을 빌미로 법적 책임을 묻고 손발을 묶으려는 의도도 있다. 우리는 어떻게든 철거를 막아낼 수밖에 없다.”
굴뚝의 차광호도 “300일째가 되면서 농성 해제를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지금 상태로는 내려갈 수 없다”고 했다.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300일이 될 때까지 굴뚝에 있을 거란 생각도 못했다. 지난해 8월 1차 희망버스가 다녀간 뒤 장기화를 직감했다. 체력운동 열심히 하면서 버티는 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회사는 공장을 다시 돌릴 의지가 없고 우리도 포기할 수 없다.”
그도 “솔직히 힘들다”고 했다. “나도 기복이 있다. 상황이 어려워지면 기분이 처지고 다운된다. 굴뚝에 처음 올라왔을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다잡지만 감정 조절이 예전처럼 안 된다. 김진숙·천의봉 두 분이 내려와서 싸우자고 하신 말씀(제1052호 ‘더 지체하면 위험하다’)에 충분히 공감한다. 그래도 굴뚝에서 할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차광호의 굴뚝은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 기록’이 분명할 310일째(4월1일)를 열흘 남겨두고 있다. 금속노조는 이날 스타플렉스 서울 목동 사옥 앞에서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연다. 해고자 11명이 버티고 있는 스타케미칼은 열악한 조직력 탓에 노동계에서도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날 결의대회는 “금속노조가 조직 차원에서 지원에 나선다는 뜻”이라고 홍기탁 대표는 말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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