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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감촉을 잃은 지 400일

빈 농성장에서 차광호와 함께 보낸 401일로 넘어가는 1박2일… 매일 118배의 염원 “언젠가 땅을 밟겠지만 두려워요”
등록 2015-07-07 16:05 수정 2020-05-03 04:28

한 남자가 45m만큼 먼저 비를 맞았다.
가뭄이 태웠던 구미국가산업단지(경북 칠곡군 석적읍)가 6월30일 늦은 장맛비에 젖었다. 차광호(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대표)의 굴뚝이 검은 구름 안에 갇혔다. 건너편 공장에서 하얀 매연이 솟아 산을 휘감은 운무와 섞여 경계를 흐렸다. 엉성한 굴뚝 천막 안으로 빗방울들이 기어들어와 낙하했다.

고공농성 중인 차광호 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대표가 45m 굴뚝 위에서 분할매각 중단과 공장 재가동 등을 요구하고 있다. 6월30일 그의 굴뚝농성은 400일째를 맞았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고공농성 중인 차광호 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대표가 45m 굴뚝 위에서 분할매각 중단과 공장 재가동 등을 요구하고 있다. 6월30일 그의 굴뚝농성은 400일째를 맞았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오후 6시10분. 해복투 동료 김진원(36)이 차광호의 저녁밥을 챙겨 공장 문 앞에 섰다. 경비원(모기업 스타플렉스에서 파견)이 정문을 열어 그를 들였다. 김진원과 경비원이 공장 건물을 돌아 굴뚝 아래로 다가갔다. 지난해 5월 회사가 철수한 뒤부터 공장의 주인은 잡초였다. 콘크리트 바닥 틈을 뚫고 억누를 수 없는 생명들이 치받아 올랐다.

차광호의 고공농성 400일째 날은 조용했다. 100일, 200일, 300일, 310일, 365일…. 쌓이는 날마다 굴뚝 아래 모였던 연대자들도 보이지 않았고, ‘결의’를 담아 쩌렁하게 울렸던 동료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요와 적막을 찢고 빗소리만 도드라졌다. 해복투는 400일 기념행사를 따로 열지 않았다. 매주 화요일 서울 목동 스타플렉스 사옥 앞에서 여는 투쟁문화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전날 홍기탁(해복투 부대표)은 말했다.

“고공농성이 길어지면서 날짜를 박고 치르는 행사도 한정 없이 늘어났어요. 날짜 헤아리는 건 땅에 있는 우리에게도 고통이에요. 의례적인 행사보다는 차광호가 빨리 내려올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게 더 시급합니다.”

차광호의 동료들이 서울로 올라간 날 은 차광호의 굴뚝 곁으로 내려갔다. 김진원이 혼자 남아 차광호의 밥을 챙기고 있었다. 공장 앞에서 차광호에게 전화를 걸어 도착을 알렸다.

“지금 바빠요. 9시 이후에 전화할게요.”

400일째를 맞은 그는 분주했다. 굴뚝에 묶여서도 목소리에 마음을 실어 자신을 찾는 곳으로 옮겨다녔다. 저녁 7시20분. 해복투의 목동 집회에 불려간 그의 음성은 확성기로 증폭돼 비를 맞는 동료들 위로 뿌려졌다. 저녁 8시. 서울(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사파포럼’(제11회 ‘파업 이후 현장은’) 사회자의 전화기를 빠져나온 그가 참석자들에게 인사했다. “각자의 위치에서 꼭 이겨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말을 ‘고공 동기’ 강성덕(같은 시기를 하늘에서 보낸 씨앤앰 비정규직 노동자)이 현장에서 담아 SNS로 전했다.

차광호는 지난해 굴뚝에서 작별한 장마와 해를 넘겨 굴뚝에서 재회하고 있었다. 1년 전 장마가 닥쳤을 때 차광호의 굴뚝엔 피난처가 없었다. 굴뚝 위에 걸쳐둔 천막도 바닥을 흐르는 빗물까지 막아주진 못했다. 차광호는 속절없이 젖어들었다. 사 쪽은 텐트도 우비도 올리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밥과 물과 제한된 반찬만 ‘검열’을 통과했다. 해복투는 ‘작전’을 펼쳤다. 김덕원이 1인용 텐트를 접어 옷 속에 숨기고 폴대를 주머니에 넣었다. 김진원과 회사 안으로 들어가 밥줄에 묶어 올렸다. 저지하는 사 쪽 관리인을 김진원이 몸싸움하며 막았다.

“가뭄이 풀리려면 비가 많이 와야 하고, 광호 형을 생각하면 비가 많이 오면 안 되고.”

장맛비를 바라보며 김진원이 걱정했다. ‘가뭄 해갈을 위해선 비를 동반한 태풍이 두어 개는 올라와야 한다’고 기상 전문가들은 말한다. 지난해 태풍이 굴뚝을 몰아쳤을 때 차광호는 딸려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었다.

‘400’은 사람의 육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봄에 굴뚝에 올라, 여름·가을·겨울을 보내고, 다시 봄을 맞아, 여름에 이르렀다. 사 쪽이 농성장을 단전·단수했고, 업자들을 보내 공장 철거를 시도했다. 1인당 하루 50만원씩을 사 쪽에 지급하라고 법원은 결정했다. 장모님이 말기암으로 입원했고, 부모님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수없이 울고 절망했으며, 죽음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하루를 더하며 ‘짐승의 수’는 완성됐다.

교섭은 차광호의 고공농성 200일을 넘겨서야 시작됐다. 사 쪽의 교섭 일방 중단과 좁히지 않는 의견차로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400일째를 앞두고 해복투는 사 쪽과 집중교섭을 벌였다. ‘차광호를 더 이상 하늘에 둘 수 없다’는 생각으로 동료들은 마음이 급했다. 400일 전에 의견 접근을 이루고 차광호가 땅을 밟도록 하고 싶었다. 사 쪽은 두 가지 전제를 바꾸지 않았다. ‘한번 철수한 스타케미칼을 다시 가동할 수 없고, 스타플렉스로 고용하면 노조 때문에 스타플렉스까지 망한다.’ 사 쪽은 ‘제3의 법인 설립을 통한 고용’ 안을 제시했다. 새 법인을 만든 뒤 사 쪽이 해산해버리면 스타케미칼과 똑같은 상황에 처할 것을 해고자들은 우려했다. 해복투는 ‘해산 때 고용보장 약속’을 요구했고, 회사는 거부했으며, 차광호는 하늘에서 400일을 맞았다.

“그만하고 내려오라고 몇 번 이야기했는데도 안 내려와요.”

김진원이 말했다. 해복투 11명 중 스타케미칼로 입사한 사람은 그뿐이다. 나머지 10명은 옛 한국합섬(스타케미칼 전신·2007년 파산) 때부터 함께 시간을 견뎌왔다. 김진원에겐 이번달에 두 돌 되는 아이가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들어간다. 부모님껜 “스타케미칼에 잘 다니고 있다”고 말씀드린다. 한 달에 140만여원을 버는 아내는 가끔 “(고용승계 투쟁을)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묻는다.

“굴뚝에 광호 형이 있으니까, 형들이 아직 싸우고 있으니까요.”

밤 9시10분 고민각(45)이 퇴근했다. 그는 ‘마찌꼬바’(소규모 영세공장)에서 아침 8시30분부터 밤 8시30분까지 일한다. 일을 마치면 농성장에 와서 자고 다음날 출근한다. 해복투 11명의 집은 대부분 가압류당했다. 생활고로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고민각은 이자를 못 내 집이 경매에 넘어갈 상황에 처했다. 동료들의 동의를 얻어 일자리를 구했다.

“‘아예 해복투 활동을 접고 일만 할까’ 생각도 해봤지요. 못 그러겠더라고요. 혹시 차광호가 잘못되면 어떡하나 걱정돼서요. 오늘 아침 일어날 때부터 생각했어요. 나 혼자 생계 활동 하는 처지에 뭘 할 수 있을까. 그래도 포기는 하기 싫다, 주저앉지는 말자, 동지들이 버티는데 나도 버텨야 한다고요.”

차광호 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대표가 굴뚝에 오른 지 400일째 되는 날(6월30일), 해고자들이 모기업 스타플렉스 사옥(서울 목동) 앞에서 비를 맞으며 고용승계를 촉구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차광호 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대표가 굴뚝에 오른 지 400일째 되는 날(6월30일), 해고자들이 모기업 스타플렉스 사옥(서울 목동) 앞에서 비를 맞으며 고용승계를 촉구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굴뚝은 하늘에만 있지 않았다. 차광호가 굴뚝에서 400일을 버티고 있을 때 동료들도 400일 동안 ‘땅의 굴뚝’을 살았다. 공장 정문 앞에 비닐하우스 농성장을 짓고 숙식했다. 아침 6시쯤 일어나 차광호에게 올릴 밥을 짓고 공장 앞으로 나가 선전전을 했다. 전국의 농성장을 찾아다니며 연대했고, 화요일마다 목동으로 올라가 집회를 열었다. 먹고 자는 생활이 그들에겐 ‘투쟁’이었다. 회사의 단수 뒤 먹고 씻는 물은 지인들 집에서 길어와 아껴가며 썼다. 화장실 물은 빗물을 받아 사용했다. 서울에서 잘 땐 농성천막(4명)과 봉고차(2명)와 찜질방(1명)으로 흩어져 몸을 뉘었다. 30℃가 넘는 농성장에서 몸을 빼 나무 밑으로 피하면 더위도 따라와 옆에 앉았다.

밤 10시. 서울 일정을 마친 해고자들한테서 다음날 내려온다는 연락이 왔다. 김진원이 비닐하우스 농성장에 모기장을 치고 잠자리를 봐줬다. 그는 회사 화장실 옆에 붙은 외부 면회실로 가서 잤다. 고민각은 ‘오늘은 일이 있다’며 집으로 갔다. 주인들 없는 농성장에 혼자 남아 모기약을 뿌렸다. 비를 피해 농성장으로 몰려든 모기들이 비처럼 떨어졌다. 흠뻑 젖어 떨던 길고양이 한 마리가 김진원이 그릇에 담아준 사료를 먹으며 울음을 그쳤다.

굴뚝도 어둠에 묻혔다. 공장 앞을 밝히는 가로등만 비 오는 밤에 환했다. 비가 ‘투두둑 투두둑’ 비닐 천장을 두드렸다.

“보여요?”

밤 10시15분. 차광호가 전화했다. 농성장 밖으로 나가 굴뚝 쪽을 바라봤다. 차광호가 비를 맞으며 랜턴을 깜빡여줬다.

“45m 굴뚝에도 모기가 올라와요. 전에 없던 사람이 있고, 사람이 먹는 음식물이 있고, 사람이 흘리는 땀이 있으니까요.”

깊은 밤 모기장 안에 누워 그와 오래 이야기했다. 차광호는 “며칠 동안 머리가 계속 아팠다”고 했다. “아팠는데 이제 마음을 비웠다”고도 했다. “땅의 동료들이 회사와 합의안을 만들면 충분치 않더라도 따르겠다”고 했다. 물어봤다.

땅의 감촉을 잊어버리진 않았나요.

“요즘 해가 너무 뜨거워요. 아침엔 해 뜨는 반대쪽에서 해를 피하는데 한낮이 되면 그늘이 사라져 숨을 데가 없어요. 언젠가 너무 힘들어 굴뚝 20여m 지점의 중간 난간에서 쉬다 온 적이 있어요. 난간 폭이 50cm쯤 넓어지니까 운동장 같더라고요. 한나절을 보내고 꼭대기로 돌아왔는데 처음 굴뚝에 올랐을 때처럼 어지러웠어요. 무서웠어요. 이젠 아무리 더워도 안 내려갑니다.”

그는 “겁이 난다”고 했다. “언젠가 땅을 밟겠지만 두려워요. 내려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잠들지 못하고 새벽을 맞았다. 모기장 옆에서 차광호가 사용할 하루치의 휴대전화 배터리(3개)가 충전되고 있었다. 농성장 바닥에선 한 뼘 넘는 크기의 쥐 한 마리가 놀고 있었고, 농성장 밖에선 까마귀 한 마리가 이유 없이 악악댔다. 고양이는 사료를 말끔히 먹고 사라졌다.

7월1일 아침. 장마가 물러나고 태양이 작열했다. 주황색 티셔츠를 입은 차광호가 굴뚝을 빠르게 도는 모습이 보였다. 굴뚝 둘레를 왕복해 걷되 날짜만큼 횟수를 늘려가는 방식에서 목표량을 정하고 달성 시간을 단축하는 쪽으로 바꾼 지 꽤 됐다. 전날 차광호는 쏟아지는 비 때문에 굴뚝은 돌지 못하고 118배만 했다. 그는 13가지 바람을 담아 운동 겸 절을 올렸다.

①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해주세요 ③우리 투쟁 승리하게 해주세요 ⑤우리 동지들 건강하게 해주세요 ⑥이현실(아내)님 사랑하게 해주세요 ⑦세월호 진실 규명되게 해주세요 ⑪모든 노동자들 연대할 수 있게 해주세요….

13배를 9차례 반복하면 117배가 된다. 108배와 비슷한 118배가 되도록 그는 한 번의 절을 보탠다. “부디 이 모든 염원들 이뤄지게 해주세요.”

주황빛 차광호가 굴뚝 둘레를 따라 나타났다 사라졌다. 401일째. 여느 때처럼 그가 굴뚝을 산다.

칠곡=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차광호씨의 고공농성 400일째인 6월30일은 대우해양조선 하청노동자 강병재씨가 조선소 크레인에 오른 지 83일째(복직 약속 이행) 되는 날입니다. 생탁·택시 노동자 송복남·심정보씨도 부산시청 앞 광고탑(노동조합 인정·처우 개선)에서 76일째,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최정명·한규엽씨도 서울 국가인권위원회 옥상 광고탑에서 20일째 ‘하늘 벼랑’에 매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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