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금속이 낀 황사를 헤치고 찾아간 그곳은 강의실이 아니라 마치 병원 같았다. 2009년 애증의 한국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저마다 화를 품고 있었다. 누구는 불면증이 생겼다고 했고, 누구는 이민을 꿈꾸고 있었고, 누구는 눈물을 흘리며 도대체 왜 한국을 사랑해야 하냐고 물었다. 이처럼 담담하지만 뜨거웠던 월요일 저녁. 그날의 연사, 아니 의사 진중권은 ‘대중의 화’를 차근차근 진단했다.
진중권: “대중이 화가 났다”는 명제는 사실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상식 이하의 일들이 더 많이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인터넷 포털 사이트가 댓글이나 토론문화를 위축시키는 쪽으로 바뀌었다. 촛불집회와 미네르바 사건을 거치면서 ‘대중의 화’를 제도적으로 차단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대중은 자주, 많이 화를 냈다. 여기에는 한국인만의 특수성이 내재돼 있다. 첫째로 공과 사의 구분이 남다르다. 수백 년에 걸쳐 문자문화가 정착해온 유럽과 달리 한국엔 구술문화의 전통이 뿌리 깊다. 이에 따라 공동체의 결속력이 끈끈해 내 것과 네 것의 구분이 모호한 경우가 많다. 조금만 유명세를 타면 한국 사회에서는 ‘공인’이 된다. 그리고 대중은 이들을 감시하고 심판하는 역할까지 한다. 이 때문에 연예인의 발언을 두고도 공개 사과를 요구한다. 둘째로 한국 사회의 화는 격정적으로 표출된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사이버 모욕죄’를 비롯해 모욕죄, 명예훼손죄 등은 어느 나라보다 처벌 강도가 세다. 대중은 악플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때문에 이런 법 제정과 관련해 찬성 여론이 높다.
‘대중의 화’는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실례로 최근 보수 언론은 서울 용산 철거민 참사 사건을 놓고 ‘공권력의 위기’를 부각시켜 피해자와 가해자 관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렸다. 대중이 자발적으로 선전·선동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황우석 사태를 들 수 있겠는데, 국가주의와 자본주의 코드를 앞세워 여성 피실험자들의 생명·인격적 희생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무게를 실었다. 마지막으로는 분노를 아예 멎게 해버리는 진공 상태의 경우가 있다. 1990년대 초반에 강준만씨는 냉소주의의 팽배를 두고 “왜 당신들은 분노하지 않냐”며 대중을 꾸짖었다. (냉소주의는) 만만한 데 화풀이하는 ‘수평폭력’으로 이어지거나, 에서 김진 변호사가 말했던 <u>‘주머니병’(751호 ‘노 땡큐!’)</u>과 같은 증상을 보인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자신의 태도가 쿨하다고 생각하고 입으로만 냉소를 내뱉는다.
무턱대고 화만 내서는 계속 화만 날 것이다. 화를 내기 전에 이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 것인지 분명히 하자. 첫째, 내 분노의 표적을 제대로 인식하자. 그래야 경제적으로 집중해 화낼 수 있다. 둘째, 화의 표출을 좀더 승화시킬 필요가 있다. 한 번 ‘버럭’ 하는 것으로 끝낼 화를 내기보다 장기적이고 근거 있는 화의 준비가 필요하다. 마지막 셋째, 풍부한 감성을 가져야 한다. 감성이 충만하지 못하면 사회의 방관자가 되기 일쑤다. 우리 자신은 지금 장기판에 훈수를 두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장기판의 말이 돼버렸을지도 모르는 노릇인데 말이다.
지난해 여름 촛불집회는 즐거운 분노의 장, 화의 축제였다. 다만 즐거움에 경도돼 촛불집회의 성과와 한계를 짚어내지 못한 점이 아쉽다. 앞으로도 우리 대중이 화낼 일은 많다. 가시적인 현상을 넘어서는 화를 내자. 고귀하고, 지속적이고, 창의적이고, 분명한 방향성을 갖는 분노를 일으키자!
청중1: 현재 대한민국에는 대중이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나 정당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진보정당인 진보신당조차도 분열한다. 대중이 기댈 만한 정당이 왜 생겨나지 않을까? 대책은 없나?
진중권: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정당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사회상이나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꼭 강령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좋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혼용된 친근한 전략도 추천할 만하다. 또 ‘노동자’의 개념을 재구조화할 필요가 있다. 21세기의 노동자들은 공장보다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아졌다. 그만큼 노동자가 요구하는 정당의 역할도 바뀌지 않았겠나.
청중2: 영화 개봉 당시 관련 산업에 주식투자를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영화를 둘러싼 논란 때문에 금전적·정신적인 피해가 컸다. 진 교수의 분노 관리 노하우가 있다면?
진중권: 구체적인 전략을 짜서 고차원적으로 승화시켜라. 나는 사소한 일에 짜증을 자주 내지 않는다.
청중3: 대학 새내기다. 첫째, 대중이 프레임에 갇혔다고 생각한다. 대학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과 20대를 옭아매는 프레임을 어떻게 하면 파괴할 수 있는가? 둘째, 촛불시위가 유희적 표출이었다면 그 놀이에 지속성이 있을 수 있나?
진중권: 전적으로 청년들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개인적 차원에서는 획일적인 스펙 쌓기보다 나만의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부속품이 되어 타인과 대체 가능한 나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스페셜리스트로서의 삶과 제너럴리스트로서의 삶의 교차점을 찾아 자신의 가치를 높여라. 이는 당신의 잠재력으로 환원될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이미 오락성과 진지함의 경계가 무너졌다. 그리고 놀이의 힘이 생각보다 굉장히 크다.
오지혜: 진 교수의 책 을 참고하면 좋겠다.
청중4: 한국이 싫다. 영어 특기로 생업을 유지해가는데, 외국어로 밥 벌어먹고 다니는 내 상황도 싫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살고 한국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진중권: 굳이 사랑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청중 웃음)
청중5: 인터넷 윤리교육은 어떻게 실시돼야 하는가?
진중권: 법은 윤리의 극한을 규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은 법 만능주의다. 법으로 욕설이나 비방 등을 처벌할 수는 있어도 결코 사회를 무균실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자정 능력이 생길 수 있도록 배려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청중6: 경기 안양에 사는 학생이다. 최근에 진 교수의 저서 를 지하철에서 읽다가 처음 뵙는 할아버지께 꾸지람을 들었다. 그들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란 어떤 존재인가?
진중권: 거의 ‘종교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1970년대 한국은 거의 북한과 같았다고 본다. (청중 웃음)
청중7: 지난해에 고3이었고, 촛불시위에 참가했다. 이후 학교에서 ‘진보주의자’라는 타이틀을 달게 됐다.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의 자발적 행동을 쉽게 판단해버리는 습성에는 학교도 예외가 아님을 깨달았다. 솔직히 불안했고, 지금도 불안하다. 나에게는 연대할 영웅이 필요하다. 이제 대학생이 됐다. 대학생으로서 지속적으로 화를 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은가?
진중권: 용기를 갖자. 두려워하지 말고, 일단은 부딪혀보고, 싸우고, 또 때로는 타협도 해보자.
오지혜: “교양은 타인에 대한 상상력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회를 둘러싼 수많은 목소리도 결국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서 시작된다. 계속 사회에 화를 내주었으면 좋겠다. 동시에 그 속에서 자기만의 견해도 세워놓길 바란다.
화 좀 덜 내려고 왔는데, 강연 말미에는 다들 더 화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었다. 진 교수는 강연 마지막에 다시 한번 화를 강조했다. “자기 욕망을 고집스럽게 긍정”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여, 문제를 제기하는 차원에서 나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의 화를 내라는 처방전을 건네주었다.
글 이현정 17기 독자편집위원·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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