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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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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병

등록 2009-03-12 10:59 수정 2020-05-03 04:25
주머니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주머니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병명: 만성 바이러스성 주머니병

주요 증상: 무슨 일이 있으면 직접 나서지는 않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구경하면서 삐딱하게 흉보고, 유행하는 이론서를 기웃거리며 모든 일을 평론가처럼 봄

합병증: 중증의 고질적 퇴행성 자기 체념- 종종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이야”라는 섣부른 자기 규정으로 나타남

어차피 안 돼

발병 시기: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 졸업 직후(남들이 말하는 ‘어른’이 되거나 ‘철’이 들면서)

우려되는 발전 경로: 주머니와 자기 손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며, 주변 사람에게 전염되는 경우 ‘백마 타고 오는 초인 기다림 증후군’으로 사회화할 수 있음

이환 경위(구체적으로): 워낙 ‘운동권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지라 대학에 들어가서는 늘 경계 모드였음. 괜히 친한 척하는 선배들은 모두 수상했고, 광장에서 집회라도 있을라치면 멀리 돌아서 기숙사로 갔고, 세미나라도 할라치면 단골 멘트는 “꼭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니지 않냐”여서, “만 보면 너처럼 된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음(실제 당시 구독 신문이 ). 그럼에도 보고 듣는 것은 있는지라, 주변에 벌어지는 일들이 하 심난하여 도서관을 나와 집회 자리에 앉아 있으면, 일찌감치 사수대원으로 활약(?) 중이던 동기가 “집회 구경하러 왔냐”며 의아해함. 그즈음으로 추정.

…전염성이 강하다고 하더니, 요즈음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아진 듯하다. 둘러앉기만 하면 대통령, 야당, 진보 정당 그리고 민주노총까지 정말 전방위적으로 욕하거나 또는 걱정하는 척하면서 흉을 본다. 블로그에서, 택시 안에서, 시장에서, 웬만한 기자 뺨 몇 대는 칠 날카로운 비판과 분석에 깜짝 놀랄 때가 많다. 특히 대통령이야 워낙 잘하는 일이 없으니 그 욕만 해도 술자리 몇 시간은 가는 줄 모르고 보낼 수 있고, 그런 대통령을 ‘나는’ 찍지 않았으니 비판할 수 있는 스스로를 뿌듯해하면서 얼큰 기분 좋게 취할 수도 있다. 지난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러하였듯, 대통령 욕에 핏대를 세우면서 남은 ‘미래 4년 고난’도 보낼 수 있을 태세다. 오히려 무언가를 하려는 사람이 옆에 나타나면 “그걸로 되겠어?” 또는 “어차피 이런 지형에서는 아무것도 안 돼”라며 구박하고, 그동안 이뤄온 성과가 무너지는 것은 대통령 탓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별다른 감흥이나 흥분도 없다. 이 병에 감염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누군가 너무도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어지간히 어설프게 사는 사람들도 너무나 쉽게 선인이 되고 정의로울 수 있게 된 사회의식의 하향화”도 빠르게 진행된다.

꽤 긴 시간을 이 병과 토닥토닥 싸워오며 정든 투병 경력자로서 감히 말하건대, 이 병, 한번 정 들면 정말 오래간다. 증상과 함께 아드레날린 분비 촉진이 나타나서 그런지, 금세 중증이 되는데도 통증을 못 느끼고, 워낙 자연스레 내면화해 곪아 터져도 모르기 십상이다.

은근히 모범적인 치유 사례

치료 방법: 기본적 처치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는 것. 일단 빼고 보면 의외로 튼튼한 두 손이고,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음에 놀라면서 빠른 치유 속도를 보임

치료 성공 사례: 공무원 시험 준비에 열중하다가 구립 도서관의 식당 운영에 문제를 느껴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열람실의 여론을 수렴해 문제 제기하는 수험생, 적어도 자기 일터에서 일어난 부조리가 이대로 유지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 판사, 줄 세우기 일제고사는 안 된다는 믿음으로 불이익을 감수하고 목소리를 낸 선생님, 청소용역은 외주라서 어쩔 수 없다는 마이동풍 학교에서 시설관리 노동자들의 고용승계 약속을 받아낸 여대생들, 진짜 일자리 나누기가 뭔지 빤히 알면서도 신입사원 월급 삭감으로 문제를 막으려는 회사에 슬그머니 동의해주려는 노동조합에 ‘그건 아니다’며 태클 거는 조합원, 더 많은 시간을 따뜻한 아랫목에서 드라마를 보며 보내지만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는 법을 막기 위해서는 며칠 저녁 퇴근길에 국회 앞으로 촛불 들고 나가는 직딩. 은근히 모범적인 치유 사례도 많이 보고되고 있다.

김진 변호사

*이번호로 ‘김진의 노 땡큐!’는 마칩니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필자와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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