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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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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인권OTL] 3만2372, 3만2373… 반인권을 고발합니다

등록 2008-08-01 00:00 수정 2020-05-03 04:25

이주노동자 강제 연행, 쪽방촌 밀어내기 등의 문제에 맞서 진정서를 내민 시민들

▣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홍보협력팀 사무관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일어나라, 인권 OTL ⑪]

김인흥(56)씨는 1990년대부터 이주 노동자들을 고용해 조그만 공장을 꾸려가고 있다. 영세업체의 특성상 이따금씩 불법체류 노동자들이 드나들었으나 법률이 정한 등록 절차를 모두 밟았기 때문에 단 한 번도 당국의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불시에 들이닥친 출입국 단속반원들이 두 명의 이집트 출신 노동자들에게 수갑을 채우고 강제 연행을 시도했다. 김씨는 단속반원들의 행동에 완강히 저항하며 거친 입씨름을 벌였지만 단속반원들은 김씨를 완력으로 제압하고 이주 노동자들을 끌어냈다.

단속반원에 맞서다가 수개월 병원 치료

고질적인 디스크를 앓고 있던 김씨는 이때의 후유증으로 수개월간이나 병원 치료를 받았다. 몸은 몸대로 축나고 사업은 사업대로 고전하는 와중에도, 출입국 단속반원들이 영장 제시나 동의 절차를 무시한 채 이주 노동자를 연행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시민의 권리는 시민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국가인권위는 “출입국 단속반원들의 행위가 출입국관리법이 규정하고 있는 재량권을 넘어선 행위”라고 판단하고 법무부 장관에게 무단 진입에 대한 법적 근거 마련 등을 권고했다. 곧이어 법무부는 인권위 권고를 수용해 관련 지침을 개정했다.

“권리 위에 낮잠 자지 마라.” 김씨가 살아오면서 가슴에 깊이 새겨둔 말이다. 공학도답게 ‘세상은 시스템에 맞게 상식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밝히며 살았다. 이번에도 원칙을 앞세운 김씨의 끈질긴 싸움이 국가기관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김씨가 ‘인권 지킴이’라면 임명희(51) 목사는 ‘인권 도우미’다. 그는 자신의 문제도 아닌 사안에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까지 들여가며 힘을 보탰다. 임 목사의 열정은 우리 사회에서 인권이 가장 취약한 계층을 향하고 있었기에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임 목사는 노숙자와 빈곤층이 밀집한 서울 영등포역 근방에 산다. 그는 이곳에서 3~4평 남짓한 쪽방에 머무는 주민들을 돌보고 있다. 2003년 말부터 이 지역이 녹지로 조성되면서 쪽방 거주자들의 쉼터가 사라질 처지에 놓이자 임 목사는 구청을 상대로 주거대책 마련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구청에서는 관련 규정을 내세우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임 목사는 주민들의 생활 근거지가 사라지는 만큼 종전의 주거환경에 상응하는 이주대책 마련을 주장했고, 구청 쪽은 “예외를 인정할 경우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친다”며 맞섰다.

교회의 힘만으로 대응하는 데 한계를 느낀 임 목사는 인권위에 진정을 냈고, 인권위는 광범위한 실태조사를 거쳐 구청 쪽에 “이주 보상비를 지급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구청 쪽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이주비를 지급하지 않았다. 이에 임 목사는 인권위 권고를 토대로 법정 소송을 벌였고, 서울행정법원은 2007년 9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쪽방촌 거주자들이 이주비에 이자까지 얹어서 보상받았음은 물론이다. 임 목사의 단호한 선택이 쪽방촌 사람들에게 값진 승리를 안겨준 셈이다.

살색->연주황->살구색 변천의 힘

3만2373건. 2008년 7월22일 현재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된 진정 사건 수다. 진정은 인권위가 인권 현장에 접근하는 통로이자, 인권침해 당사자가 국가기관의 구제를 요청하는 절차다. 인권위 진정이 공권력으로부터 시민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간편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진정 사건의 꾸준한 증가는 바람직한 일이라 할 것이다. 특히 과거에 비해 진정 내용이 다양해지고 있는 현상은 인권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방증일 듯하다.

인권위 설립 초기인 2001년 11월 이주노동자 지원활동을 해오던 김해성(48) 목사와 외국인 4명이 “크레파스의 색상 중 ‘살색’은 피부색에 의한 차별”이라는 내용의 진정을 내자 기술표준원은 KS표준에서 살색을 없애고 ‘연주황’을 사용한 일이 있다. 이후 초·중등학생 6명이 “연주황은 어려운 한자어이므로 어린이에 대한 차별”이라는 진정을 추가로 제기했고, 기술표준원은 2005년 5월 최종적으로 ‘살구색’으로 변경했다. 어찌 보면 사소할 수도 있는 색깔 명칭이지만, 우리 사회에 잠재해 있는 인종차별 문제를 대중적으로 드러낸 의미 있는 진정이었다.

CF의 성 상품화 문제를 비판한 봉현숙(28)씨의 진정도 눈길을 끌었다. 봉씨는 2004년 농림부와 농협, 한국마사회 등이 만든 우유 광고 카피에 주목했다. 지하철 4호선의 한 객차에 6개나 부착된 광고는 ‘하얀 우유의 힘, 남자는 강하고 건강하게, 여자는 날씬하고 매력적이게’라는 문구와 함께 날씬한 여성과 근육질의 남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인권위가 봉씨의 진정 사건을 조사하는 동안 문제의 광고는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엔 전혀 새로운 광고 카피가 등장했다. ‘우유는 힘! 마시자. 114가지 각종 영양소의 완전식품 하얀 우유, 우유 한 잔으로 온 가족이 건강하게.’ 처음부터 이렇게 만들어졌다면 논란은 아예 없었을 테고 예산도 낭비되지 않았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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