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란죄 피고인 윤석열 지지자들이 2025년 2월17일 아침 서울 종로구의 한 아파트 단지 앞에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 임재희 기자
2024년 12월3일의 계엄령만큼이나 충격적인 것은 서울서부지법에서 일어난 극우들의 폭동이었다. 이 폭동만큼이나 또 충격적인 것은 극우들이 ‘공관’도 아닌 문형배 헌법재판관의 ‘자택’ 앞으로 몰려가 이웃들을 방해하며 시위를 벌인 일이었다. 그곳은 개인의 사적 영역인데 그 공간에서 소란을 일으키며 의도적으로 그의 사적 ‘이웃’들을 방해하고 있다. 더구나 “이웃을 방해하러 왔다”며 이 행위를 공공연하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헌법재판소 근처에서 근무하는 한 친구는 출퇴근길에 심각한 위협감을 느낀다고 호소했다. 지나가면 붙잡고 “이재명, 시진핑, 김정은 ×××라고 해봐”라고 요구하고, 안 하면 “너 빨갱이지”라고 위협한다는 것이다. 문형배 재판관의 자택에서 시위하는 사람들로 인해 차를 타고 집으로 들어오려다 방해를 받은 이웃이 그들을 향해 경적을 울리자 시위대 중 한 명이 이 차를 향해 “빨갱이 ××”라고 외치며 돌진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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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행동들이 충격적인 것은 이들이 추구하는 이념 때문만이 아니다. 이들이 보이는 행태가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매우 기이하고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평판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사회적 평판에 신경 쓰지 않으니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또한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람들을 괴롭히고 질리게 해서 공적 영역에서 사라지게 하고 자기들이 그 자리를 점령하면 그만이다. 정치가 사회적 평판을 둘러싼 경쟁이라면 이들은 완전히 반정치적인 정치를 하고 있는 셈이다.
미시사회학의 상호작용론으로 보면 이들의 행태를 상당히 그럴듯하게 해석할 수 있다. 사람의 행동은 상대에게 내가 당신을 의식하고 존중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상징이다. 몸짓과 같은 의례적 행동을 통해 이런 존중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기대가 충족됐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한다. 대표적인 상호작용론 학자인 어빙 고프먼에 따르면 이것을 ‘처신’이라고 한다. 그렇게 상대의 존중에 맞춰 처신을 바르게 해야 자기 체면이 선다. 상대가 존중을 통해 자기 체면을 살려주면 자신 또한 처신을 바르게 하여 상대와 자기 자신 모두의 체면을 살린다. 체면을 세워주며 자신의 평판을 관리하는 처신이 상호작용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들은 매우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규범에 따라 처신을 올바르게 하여 평판을 얻는 것이 실익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평판에 아랑곳하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자신들을 제재할 법적인 장치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원래 이 영역은 법적인 영역이 아니라 사회적 압력으로 사람의 행동을 규율하는 규범의 영역인데 사회적 압력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니 통제할 방법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면 권리라는 이름으로 명시적인 이익을 위해 돌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더구나 이렇게 할 경우 아무도 그를 통제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에서 그들의 정치적 효능감은 극대화된다. 반사회적 캐릭터인 ‘빌런’이라면 이를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도처에 이런 ‘빌런’들이 나타나 사회의 공공 영역을 점령하고 있다. 얼마 전 수도권에 있는 공공도서관에 가기 위해 광역버스를 탔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다들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었다. 두 명이 앉는 광역버스 좌석은 롱패딩을 입고 앉기에는 매우 좁아서 서로 몸이 부딪히기 마련이다. 다행히 오후 시간대라 버스가 널널했다. 탑승해서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3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타더니 내 옆자리에 앉았다. ‘뒤에도 자리가 많은데, 앞자리여서 그런가보다’ 하며 몸을 창 쪽으로 움츠렸다. 그렇게 몸을 움츠린다고 얼마나 공간이 나오겠느냐마는 옆 사람이 앉는 것을 의식해 자리를 내주겠다는 상징적인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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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과정은 상대의 자아를 존중할 뿐만 아니라 상대가 자신의 자아를 존중할 것을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개인이 개인인 이유는 그에게 다른 그 누구도 침해해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라면 ‘영혼’이라고 불렀을 그 영역은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의 영역을 의미한다. 집이나 자기 방과 같은 영역이다. 이 영역은 부모라고 해도 함부로 침범하면 자아가 침해된 느낌을 준다. 흔히 사생활이라고도 부르는 이 영역은 절대적으로 존중돼야 하는 개인의 ‘자아’를 상징한다.
안타깝게도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몸을 움츠렸음에도 불구하고 옆에 앉자마자 거칠게 내 쪽으로 몸을 밀었다. 자기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비켜달라는 신호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상징적 상호작용론의 입장에서) 내가 충분히 신호를 보내지 못했나 싶어 몸을 좀더 창 쪽으로 붙였다. 그러자 그는 팔꿈치로 나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놀라서 쳐다보니 왜 쳐다보느냐는 눈으로 보더니 그 좁은 좌석에서 아예 다리를 꼬았다. 다리가 내 자리 쪽으로 넘어온 것은 물론이다. 이것은 이 두 자리를 내가 차지하고 갈 테니 너는 뒤로 가라는 신호다.(오후 시간대라 뒤의 자리는 많이 남아 있었다.)
그날 강의 내용이 마침 고프먼의 상호작용에서 존중과 처신에 대한 부분이었다. 도서관에 도착한 다음 강의를 듣는 분들에게 이런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어봤다. 몸으로 싸울지, 말로 항의할지, 아니면 그냥 뒤로 가버릴지. 놀랍게도 강의를 듣는 분 전원이 그냥 뒤로 간다고 대답했다. 잠시 몸으로 실랑이를 시도하거나 노려본다고 한 분들이 있긴 했지만, 그분들 역시 ‘결국은 그냥 뒤로 갈 것 같다’고 말씀했다. 그 이후 다른 강의에서 같은 질문을 해도 사람들 대부분은 뒤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합니까. 더러워서 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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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냥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세상이 무서워져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였다. 그 정도로 대놓고 무례한 인간이면 몸짓은 고사하고 당연히 말이 안 통할 것이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상대에 대한 공포와 함께 또 하나 문제가 되는 점은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정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상대는 처신에 신경을 안 쓰는데 여전히 사회적 평판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은 처신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처신이 작동하려면 존중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하고, 내가 체면을 세우기 위해 택한 노선에 대한 승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상대가 나를 존중할 의사 자체가 없고, 내가 택한 노선을 전혀 승인할 생각이 없다면 내가 처신할 방법이 사라진다. 처신을 통해 한편에서는 자신이 사회적으로 정당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자신의 체면을 세우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자아’를 보호하려는 사람에게는 몹시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처신이 통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기도 제대로 처신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같이 개싸움을 해야 하나?” 그러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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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처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점점 더 공공장소에서 사라지고 있다. 처신을 잘못하는 사람을 만나는 봉변을 당하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는 상황에 부닥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고프먼에 따르면 (미국의 기준이긴 하지만) ‘당황함’이야말로 그 사람의 사회적 역량 미숙을 보여주는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사람의 성숙도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유려하게 대처하는지를 통해서 드러난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야말로 타인이 내가 나 자신을 다스리는 법에 대해 평가하기 가장 좋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신에 신경을 쓰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을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 당연히 공공장소에 저런 ‘빌런’들이 많아질수록 처신을 제대로 하려는 사람들은 사라진다. 최대한 대중교통이 아니라 자차로 움직이려 하고, 공공장소보다는 사적으로 점유할 수 있는 공간에 머무르려고 하며, 타인과의 거리를 이전보다 훨씬 더 떨어뜨리고 서로의 노선에 대해 공유하고 상호 승인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려고 한다. 사회의 최상층뿐만 아니라 중산층, 그리고 그 아래로까지 빗장 건 공동체(Gated Community)가 퍼지기 시작한다.
그 결과 공공장소는 점점 더 처신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 혹은 처신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점령하면서 ‘슬럼화’된다. 전세계에서 가장 깨끗하고 처신이 잘되는 곳으로 알려진 한국의 대중교통이나 공공장소가 ‘슬럼화’되는 현상은 피부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다. 대민 업무를 맡는 경찰서와 주민자치센터나 학교에서 담임을 맡는 교사 등은 점점 이런 ‘빌런’을 더 많이 만나게 되고 해당 업무는 기피 업무가 된다. 사회의 공공 영역이 점차 슬럼화될수록 국가와 시장은 이 영역을 보살필 필요가 없다고 여기며 방치하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공적(공공) 영역의 ‘슬럼화’가 진행될수록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빌런’들이 가지는 효능감은 극대화된다는 점이다. 아마도 버스에서 내 옆에 앉았던 사람은 자기가 앉기도 전에 내가 몸을 움츠리는 것이 저 자식을 쫓아내고 내가 두 자리를 모두 차지할 기회의 신호로 여겼을 것이다. 여기에 몸을 한 번 더 움츠리자 그 정도로는 쫓아낼 수 없음을 감지하고 노골적으로 팔꿈치로 밀고 다리를 꼬았을 것이다. 결국 내가 일어나서 자리를 뒤로 옮기자 쾌재를 부르며 ‘쩍벌’하고 앉았다. 뒤에 타는 그 누구도 자기 옆자리에 앉지 말라는 신호를 준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최고의 효능을 준 것이다. 그에게 가장 즐거운 일은 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한 자기 행동의 효능감을 만끽하는 것이다.

내란죄 피고인 윤석열 등의 방어권 보장 권고 등을 담은 안건이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제2차 전원위원회에 상정된 2025년 2월10일 오후 서울 중구 인권위 건물 1층에서 윤석열 지지자들이 유튜브 방송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영원 기자
지금 한국의 극우들에게서 극대화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효능감이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점령(?)해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내란 행위를 대통령 개인의 인권 문제로 둔갑시켰다. 평소에는 ‘인권이 나라를 범죄 소굴로 만든다’며 ‘인권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다. 광화문 점령을 넘어 이제 자기들이 모이면 어디든 점령하지 못할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공간에서 자신들이 난리를 치면 일반 국민은 대거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피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효능감에 거침이 없다. 서울대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고 광주 금남로로도 ‘진출’했다. ‘자신을 다스리는 법에 대한 타인의 해석’이라는 의미에서의 처신은 안중에도 없다. 사회적 상호작용의 핵심인 처신보다 이익을 극대화하는 효능감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지금 시급한 것은 이런 빌런들의 효능감을 무력화하기다. 법적으로 무력화되어야 하고, 정치적으로 무력화되어야 하고, 사회적으로 무력화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법과 정치에서 저들을 무력화하지 못하고 반대로 시민들이 무력함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사회’의 미래는 없다. 지금이야말로 법과 정치가 사회를 보호해야 할 때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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