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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고쳐 쓸 수 없다”고 말하는 그대, 자신은 고쳐 쓸 수 있는가

진보도 불 지핀 혐오와 환멸… ‘양극화 정치’로 극우 자생력 키워
등록 2026-04-30 21:50 수정 2026-05-06 17:43
SBS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의 한 장면. SBS 제공

SBS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의 한 장면. SBS 제공


요즘 사람들이 가장 못 참는 것은 사람 자체다. 동시대의 ‘우리’는 무엇보다 사람에 대해 환멸을 느끼며 사람을 혐오하고 사람을 부딪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피하고 싶어 한다. 지하철과 길거리 등 잠시 스치는 곳에서도 무례하고 뻔뻔한 사람을 만나며 사람에 실망한다. 내밀한 친밀성의 관계라고 다르지 않다. 감정사회학자 에바 일루즈가 말한 것처럼 사랑에서조차 배신한 자가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충실성을 기대한 사람이 멍청한 존재로 여겨진다. 사람됨을 믿고 기대하는 자는 반드시 실망하고 상처받는다. 이전에는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을 피했다면, 지금은 사람이라서 피한다. 이 실망과 불신은 한마디로 표현된다. “사람 고쳐 쓰는 것 아니다.”

 

응징과 처벌로 무장한 극우

 

양극화된 정치는 인간에 대한 환멸에 기름을 붓는다. 정치인도 문제지만 유튜브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한 정치 스피커는 더 문제다. 이들은 상대가 얼마나 상종 못할 구제 불능의 뻔뻔하고 생각 없는 ‘무뇌’의 존재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은 여기에 환호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들이 퍼트리는 조롱과 환멸의 언어에 환멸을 느낀다. 저쪽의 ‘행동’만큼이나 이쪽의 ‘언어’에 질려버린다.

이런 환멸의 정치는 양비론과는 다르다. 양비론이 정치에 환멸을 느끼게 해서 대중이 정치에 무관심하게 만든다면 환멸의 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증오와 원한이다. 좋은 삶이 가능한 세계를 만드는 행동(act)에 나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환멸(이라는 상처)을 심어준 세력을 처벌하고 응징하는 반응(react)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환멸의 정치다. 복수와 반동의 정치인 것이다.

이렇게 “사람 고쳐 쓰는 것 아니다”란 말은 환멸을 증폭하는 정치를 하며 극우가 자라는 자양분이 된다. 심지어 극우가 얼마나 환멸스러운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말조차 극우가 자라는 자양분이 된다. 그 환멸은 ‘극우’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인간 존재 전체를 향하게 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환멸을 느낄 때 응징과 처벌의 언어로 무장한 극우는 꽃핀다. 극우는 인간을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지배의 대상으로만 본다는 점에서 인간을 구제 불능의 존재로 환멸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극우가 자라는 가장 최적의 토양이 된다.

극우의 기반이 되는 환멸의 정치가 허무는 것은 근대문명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근대문명의 모든 장치는 ‘계몽’의 가능성에 대한 의지와 확신 위에 만들어졌다. 사람이 계몽되지 않는다면 학교를 왜 만들었겠는가. 사람이 고쳐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격리를 통해 교화하는 교도소는 왜 있겠는가.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면 왜 이렇게 열심히 토론하고 논쟁하는 공론장이 근대사회의 핵심을 이루겠는가. 학교부터 언론을 거쳐 감옥에 이르기까지 근대의 모든 제도와 장치는 계몽의 가능성 위에 서 있다.

계몽의 도구이자 지표가 읽고 쓰기였다.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은 자기를 스스로 계몽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자기 이야기를 읽고 쓸 줄 아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이 세계 안에 있는 자기 삶을 생애사적으로 성찰하고 기획할 줄 안다는 말이었다. 그 역량을 갖춘 인간은 자기 삶의 주인공이자 그 삶이 펼쳐지는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모두가 자기 삶과 세계의 주인공이기에 신분제가 철폐되고 모두가 ‘개인’이자 ‘시민’으로 평등해졌다.

이 과정에서 계몽은 포획과 배제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폭력적으로 수행했다. 대표적으로 제국주의는 식민지를 혹독하게 지배하고 포획하며 ‘계몽’의 이름으로 합리화했다. 식민지의 ‘미개인’들은 스스로 계몽할 역량이 없으므로 강제적으로 계몽돼야 했다. 사실 이런 점에서 극우는 계몽주의에 반하는 것이자 동시에 계몽주의의 가장 어두운 측면이다.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 기간 중 찍은 요제프 괴벨스의 모습. 앨프리드 아이젠스타트 사진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 기간 중 찍은 요제프 괴벨스의 모습. 앨프리드 아이젠스타트 사진


극우 등장 경고한 예언자들

 

계몽의 역사에는 이런 계몽의 어둠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을 경고한 ‘예언자’가 항상 있었다. 대표적으로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신화학’에서 ‘미개인’들은 “지옥은 우리 자신이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지옥인 우리 자신으로부터 세계를 지키고 공경하기 위해 여러 가지 터부(금기)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서구 ‘근대인’들이 외부로부터 자신이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고 보호하기 위해 터부를 만든다면, 이 ‘미개인’들은 오히려 지옥인 우리 자신이 타자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알고 경계하며 자기를 절제하기 위한 기술로 터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계몽과 나란히 있었기에 계몽이 야만이라는 통찰과 주장은, 계몽을 폐기하자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계몽이 주술이 된 것을 경고하면서, 계몽을 계몽하려는 기획이기도 했다. 계몽이 자기를 돌아봐야 하며 스스로 돌아보지 못한다면 계몽 역시 그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는 ‘미개함’이 본질이라는 점을 고백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따라서 계몽은 미개인의 미개함이 아니라 자신의 폭력성을 돌아보며 ‘겨우’ 계몽인 척했기에 근대문명을 만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계몽에 대한 계몽’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며 근대문명의 기초를 허물고 있다. 그 첫 단추는 ‘냉소주의’였다. 형식적으로 계몽은 말로 이뤄진다. 말이 힘을 가지려면 말이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마법적 힘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말이 그저 말에 불과하다는 것, 말을 지키지 않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그래서 말할 때 아무렇게나 나오는 대로 ‘지껄여도’ 전혀 문제가 없다.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말처럼 이 시대는 말의 힘에 대해 계몽됐다. 그 결과가 냉소주의다.

그리고 다시 ‘계몽에 대한 계몽’은 냉소를 넘어 인간에 대한 환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여기서 매우 기이한 역할을 하는 것이 (나를 비롯해) ‘진보’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소수자 혐오에는 단호히 반대한다고 말한다. 혐오를 중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쓰는 글과 말을 보면 그 안에는 묘하게도 인간 자체에 대해서는 깊은 실망과 불신, 나아가 환멸이 묻어난다.

 

위선자로 폭로되는 이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우리 시대에 사람들이 왜 사람에 실망했다고 말하는지를, 그를 통해 인간성의 어떤 면을 불신하게 되었다고 말하는지를 보자. 무엇보다 우리는 인간들이 자기를 절제하고 규율하지 않는다는 것에 깊이 실망하고 있다. 화가 난다고 아파트 주차장 입구에 차를 박아놓고 배 째라고 나오는 입주민의 이야기에 실망한다. 그 입주민에게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설명하는 나이 든 경비 노동자에게 반말하고 폭행하는 젊은 입주민에게 분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실망하고 분노하는 것은 이런 자들을 통제할 수 있는 장치와 제도가 없다는 점이다. 민원을 제기해봤자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무능력하게 한 발 빼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행정권력이다. 여기에 대처할 유일한 길은 인간의 자발성이나 사회적 압력 따위가 아니라 처벌과 응징을 중심에 둔 ‘국가’ 권력의 강력한 개입이다. 대중이 강력한 국가를 요구하는 것만큼 극우가 발흥할 수 있는 좋은 토양은 없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인간 환멸은 그 토양의 가장 좋은 자양분이다.

이 땅에서 여전히 인간의 계몽 가능성을 주장하는 사람들, 주로 진보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위선자로 폭로된다. 정말 사람을 고쳐 쓸 수 있다고 믿느냐고 물었을 때 당황하지 않고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진보’는 사실 많이 없다. 인간에게 환멸감을 느끼며 문득문득 사람 고쳐 쓰는 것 아니라는 말을 내뱉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해봤자 그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SNS와 녹취록, 그리고 과거의 증언을 통해 도처에서 발견된다. 자기도 믿지 않는 것을 사람들에게 믿자고 말하는 자, 위선자다. 인간을 혐오하며 응징하자고 말하는 ‘악당’으로서의 극우가 ‘위선자’로서의 진보를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토양이 바로 인간 혐오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심각하게 돌아봐야 한다. 지금 내가 ‘비판’이란 이름으로 하고 있는 말과 글이 구제 불가능한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환멸을 더 부추기고 확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인간을 구제 불능의 존재로 여기며 나 홀로 고독한 비판자인 양 비장미에 젖는 나르시시스트가 아닌지를 돌아봐야 한다.

더구나 이 인간에 대한 ‘환멸’은 전혀 ‘좌파’적이지 않다. 누군가는 우아한 언어와 태도로 타자에 대한 경멸과 환멸을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감출 수 있는 고상함을 갖춘 인간들은 감추었기에 더 잔인하고 뻔뻔해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드러내고 미안해한다. 감추지 못하는 자들을 감추지 못했다고 환멸을 느낀다면, 그것은 진보가 아니다. 계급을 잊은 ‘좌파’라니. 때마침 우리는 이 이야기를 김애란 작가의 ‘안녕이라 그랬어’에서 만날 수 있다. 계급을 잊은 우리의 ‘인간 환멸’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가 실망해야 할 것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깊이 실망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인간 고쳐 쓰는 것 아니라고 말하며 인간 환멸의 토양을 만들어가고 있는 ‘나 자신’에게 실망해야 한다. 나조차 믿지 않는 것을 마치 믿는 것처럼 대중에게 이야기하며 기만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환멸을 느껴야 한다. 레비스트로스가 만난 고귀한 미개인들처럼 실망과 환멸의 방향을 세계와 타자, 특히 고상할 수 없는 자들에게 돌리고 있는 나 자신으로 돌려야 한다.

계몽이 타자를 위험시한 것에 맞서 야만으로부터 나 자신이 타자와 세계에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정말 고쳐 쓰지 못하는 것은 인간 고쳐 쓰지 못한다는 나 자신의 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인간은 고쳐 쓸 수 있다고 믿기 위해 노력하자는 말이 아니다. 어쩌면 인간은 정말 고쳐 쓸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그런 말을 하는 나 자신은 고칠 수 있는가를 실험해야 한다. “실망했다”는 말을 하는 나 자신에게 실망하며 그 말을 고치려고 할 때, 역설적으로 ‘고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 실재하는 것이 된다. 세상은 언제나 세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말)에게 깊이 실망한 자들이 구원해왔다. 그들을 통해 좀더 나은 말이 세상에 내려오는 것이니까.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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