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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집단은 왜 역차별을 말하나

피해 서사와 구원 서사가 결합한 ‘선지자’의 언어… 윤리감정 충만한 ‘소수자 징벌’의 자기최면
등록 2026-01-08 21:53 수정 2026-01-15 06:58
‘민초결사대’ 등 극단적 보수 성향 단체가 2025년 9월25일 저녁 서울 영등포구 대림역 앞에서 연 반중 시위에서 한 참가자가 ‘화교 혜택 들어봤어? 자국민 역차별’이라고 적은 손팻말을 들고 있다. 한겨레 정인선 기자

‘민초결사대’ 등 극단적 보수 성향 단체가 2025년 9월25일 저녁 서울 영등포구 대림역 앞에서 연 반중 시위에서 한 참가자가 ‘화교 혜택 들어봤어? 자국민 역차별’이라고 적은 손팻말을 들고 있다. 한겨레 정인선 기자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가 말했듯, 지금 전세계적으로 그 사회의 주류 집단이 원하는 것은 소수집단과의 사회계약을 다시 맺는 일이다. 국가를 가리지 않고 주류 집단은 소수자의 권리와 이권이 지나치게 많이 보호되면서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되며 원칙이 파괴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이 상태가 지속되면 사회의 권력 구조가 완전히 역전돼 소수집단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이 되리라고 우려한다. 이것이 인구의 다수가 ‘극우화’되는 가장 큰 이유다.

바버라 월터의 책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는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집권하게 된 이유를 정확하게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소수집단이 다수가 되는 미국(majority-minority America)이 등장할 것이라는 깊은 불안”이 백인들이 트럼프를 지지하게 된 결정적 이유라는 것이다. 다른 몇몇 분석자는 미국에서 트럼프가 집권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경제적 이유가 아니라 버락 오바마의 당선 그 자체였다고 말한다. 소수인종인 흑인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미국 사회가 구조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주류 집단의 극우화, 평등에 대한 불만

주류 집단이 자신의 지위가 격하될지 모른다는 위협감을 느낄 때 그들은 인권과 관용으로 요약되는 현재 사회계약의 원칙을 파기하기를 원한다. 먼저 인종이나 성별, 종교 등 그 어떤 정체성과 관련 없이 ‘인간’이라고 한다면 기본 권리를 동등하게 누려야 한다는 것이 인권의 기본적 발상이다. 인권에는 정체성 구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평등이 전제돼 있다. 이런 점에서 극우가 파기하려는 것은 인간의 ‘평등함’이다.

물론 평등만 파기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개념도 폐기된다. 인간은 그저 관념적 범주이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은 한국인, 일본인, 미국인 그리고 난민과 같이 한 국가의 구성원인 시민, 혹은 그 반대급부로서의 ‘난민=비시민’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시민과 비시민을 하나로 묶은 더 큰 범주인 인간은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주장할 수 있는 정치공동체가 부재하다. 말할 수는 있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어줄 의무가 있는 타자와 공동체는 없다. 이런 점에서 시민이 아닌 인간이란 그저 떠드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 떠드는 소리를 들어줄지 말지는 오로지 들어주는 사람 혹은 정치공동체의 ‘자비’에 달렸다. 이런 점에서 인권의 보충 원리로 등장하는 것이 관용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이 지적한 것처럼 제국의 통치 방식에서 핵심 중 하나가 바로 관용이다. 관용은 문화적인 것이지 정치적이거나 법적인 것이 아니다. 관용의 대상이 되는 존재는 전적으로 주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는 수동적 존재이지 결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그가 능동적 존재가 되는 순간 주류의 관용은 정지해버리고 즉각적으로 비난받는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이 바로 관용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말해준다.

그렇다면 주류 집단은 언제 소수집단의 인권을 파기하고 관용을 정지하는가. 첫째로는 인구학적 구조 변화가 있을 때다. 소수집단이 전체 인구의 1% 남짓일 경우 그 집단의 존재는 사회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 진출한 무슬림 인구가 1% 미만이라고 한다면 이들은 한국 도시의 풍경에서 ‘낯설 수밖에 없는’ 모스크를 건축하겠다고 나설 수 없다. 그런 규모의 공간이 필요하지도 않고 돈을 모을 수도 없다. 건물 한 층을 빌려 기도처로만 쓸 수 있을 것이다. 완전히 비가시적인 존재로 머무르게 되고 이들을 향해서는 관용이 작동한다. 그게 사회적으로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과거 발착-현재 진행-미래 완료’ 시제
국민의힘 송언석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가 2025년 7월31일 국회에서 열린 ‘외국인 부동산 실태 점검 및 역차별 방지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 송언석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가 2025년 7월31일 국회에서 열린 ‘외국인 부동산 실태 점검 및 역차별 방지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면 소수집단이 사회적으로 가시화하면 주류 집단은 위협을 느낀다. 가시화한 집단을 향하는 정책을 펼치는 정치가 작동하게 된다. 대학에 중국인 유학생이 많이 유입되면서 총학생회 선거에 중문으로 된 정책자료집이 등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소수’ 유학생들의 편익을 봐주는 동시에 그런 다국어 정책자료집을 펴는 대학의 ‘관용’을 보여주는 장치였다. 그러나 유학생 수가 점차 더 많아지면서 선거의 주요 변수가 되자 적잖은 한국 국적의 대학생이 위협과 불만을 느꼈다. 갈수록 대학의 정책이 소수자에게 ‘지나치게’ 우호적이고 토착민에게 역차별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조건이 나온다. 인구학적 변화와 함께 사회가 성장을 멈추고 나눌 ‘파이’가 고정되거나 축소되는 사회에서 주류가 느끼는 불안과 불만이 증폭된다. “당신의 고통을 나는 압니다. 우리나라는 위대하고 자원은 제한적입니다. 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그것을 공유해야 합니까?”라는 극우 정치인의 말이 정확하게 먹힌다. 위대한 이 나라의 제한된 자원을 인권과 관용의 원칙에 따라 나누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토착민/자국민에 대한 ‘역차별’로 여겨진다.

나아가 ‘역차별’이라는 주장은 단지 현재 상태에 대한 진단이 아니다. 추세가 보여주는 미래의 경향성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역차별을 주장하는 이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수식어가 “이대로 진행된다면”이다. 이대로 계속되면 한국은 중국에 먹혀버릴 것이고, 이대로 진행되면 한국은 무슬림 국가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식으로 말하면 이렇게 곧 다가올 미래를 예언하며 경고하는 존재가 바로 ‘선지자’다.

인간에게 현재보다 더 두려운 것이 미래, 그것도 이미 진행되는 현재에 의해 파국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미래다. 선지자의 시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말이다. 이는 단순하게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말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미 과거에 왔으며, 현재 너희 안에서 진행되고 있고, 가까운 미래에 완성될 것이라는 말이라고 한다. 시제형으로 본다면 ‘과거 발착, 현재 진행, 미래 완료’인 셈이다.

그렇기에 선지자는 이미 과거에 왔고 현재 진행되는 것을 ‘보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이 상태로 진행되면 어떻게 될지를 경고한다. 선지자의 화용법은 여기에서 공포와 희망이 교차한다. ‘이대로 진행된다면’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함으로써 희망의 여지를 준다. 만약 ‘회개’하지 않고 이대로 진행되면 파국이다. 반면 이대로 진행되지 않도록 노력하면 미래는 바뀔 수 있다.

‘지위 하락’ 불안 느끼는 주류에게 특효

역차별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역차별은 이미 도래한 사실이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작아서 아직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추세와 경향으로 볼 때 이미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자신들은 그것을 감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지자다. 또한 이 경향을 멈추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행동이다.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경고한다는 의미에서도 이들은 자신이 선지자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행동의 결과로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그 청사진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도 이들은 선지자의 언어를 쏙 빼닮은 언어를 쓴다.

이런 선지자적 언어는 자신의 지위가 하락하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며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잘 먹힌다. 이런 사람에게는 경험적 지식이 구조적 지식을 압도한다. 현재 상태가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구체적 수치를 제공하더라도 먹히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무엇보다 이들이 느끼는 분노의 핵심에는 이런 역차별 감정을 드러냈다가 엄청난 비난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저’ 자신의 의견을 말했을 뿐인데 도덕적으로 ‘불법적 존재’로 취급받았다는 모욕의 경험이 강렬하게 자리 잡고 있다. 모욕받았다는 피해 서사가 경험적 진실로 광범위하게 이들에게 공유되고 있다.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있고, 이야기가 공유되고, 그 이야기가 확산되는 것만큼 인간에게 강렬하고 짜릿한 경험은 없다. 다른 곳에서는 ‘불법화’된 경험이 나누고 보태질 때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감의 충만을 경험한다. 내 경험이 다른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경험으로 여겨지고, 그 경험을 나누는 것이 다른 사람이 또한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용기를 내게 할 때 사람은 자신이 헛살지 않았다는 존재감이 고양된다. 이런 존재감의 고양을 느끼게 하는 관계와 공동체에 사람은 정말 충실하다고 한다. 이를 단지 맹목적 ‘충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심각하고 치명적인 비하다.

결정적으로 파국적 미래를 경고하며 저지하려는 이들의 경험 나눔은 자신들을 윤리적 존재로 고양한다. 역차별을 주장하는 이들의 서사를 잘 뜯어보면 단지 자신들이 역차별로 피해를 받고 있다는 ‘피해 서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로부터 먼저 ‘계몽’된 우리가 앞장서서 행동하고 고난을 받더라도 세상을 향해 외침으로써 현 상황을 극복하고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구원 서사’가 같이 결합돼 있다.

구원 서사에서 중요한 한 축은 징벌이다. 타락한 자들, 현 상태를 만들거나 즐기기만 한 타락한 자들에 대한 징벌은 구원 서사의 필수적 요소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과도한 이익을 요구하고 향유하며 사회를 타락시키는 소수자에 대한 ‘징벌적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그들의 이익이 철회돼야 자기 몫이 늘어나기 때문만이 아니다. 징벌이 정의이며 이 징벌을 통해서만 다른 존재들이 ‘윤리적’이 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신분제 사회’
미국이 1960년대에 도입한 ‘소수집단 우대정책’(어퍼머티브 액션)은 1970년대 후반 백인 학생 앨런 바키가 소수자 특례입학제도 탓에 대학에서 탈락했다며 ‘역차별 소송’을 내면서 찬반 시위와 대논쟁을 일으켰다. civilrightsmovement 블로그 갈무리

미국이 1960년대에 도입한 ‘소수집단 우대정책’(어퍼머티브 액션)은 1970년대 후반 백인 학생 앨런 바키가 소수자 특례입학제도 탓에 대학에서 탈락했다며 ‘역차별 소송’을 내면서 찬반 시위와 대논쟁을 일으켰다. civilrightsmovement 블로그 갈무리


바버라 월터에 따르면 단적으로 미국의 백인들이 소수집단 우대정책(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 철회를 요구하는 것은 “정부 지원과 보호를 요구하는 흑인들이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와 관련된 가치관”을 파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백인들에게 이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핵심적인 기초다. 근본을 지킨다는 점에서 이들은 자신이 근본주의자라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인종차별적인 극단주의자라는 평가는 거부한다. 오히려 이들에게 인권과 관용의 철회, 소수자에 대한 징벌적 정책의 전면적 도입은 역차별에 맞서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도덕적 후퇴가 아니라 국가의 근본을 지키는 가장 애국적이고 윤리적인 투쟁으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이들 선지자가 감추는 것이 있다. 이들의 이런 윤리적이고 애국적인 투쟁을 통해 어떤 사회가 도래하는가 하는 점이다. 다름 아닌 위계적 사회로 퇴행하는 것이다. 주류 집단이 더 강력했던 옛날 사회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남성이 더 우월하고, 백인이 더 지배적이고, 특정 종교가 더 특권을 누리고 나머지는 주류의 ‘자비’에 맡겨져 살아가는 사회 말이다. 궁극적으로, 그 위계가 완전히 공고해져서 인구의 한쪽이 종이 되고 다른 한쪽은 주인이 되는 신분제 사회가 이들이 감춘 미래의 모습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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