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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 이름으로 야만이 올 수도 있다… ‘올공’은 어떤가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불러낸 주권 훼손의 분노, 극우는 어떻게 정치를 중단시킬 기회로 획책하는가
등록 2026-06-25 21:40 수정 2026-06-26 09:48
2026년 6월10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학생회관 들머리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규탄하는 대자보가 붙어 있다. 한겨레 최현수 기자 emd@hani.co.kr

2026년 6월10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학생회관 들머리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규탄하는 대자보가 붙어 있다. 한겨레 최현수 기자 emd@hani.co.kr


다시 시민들이 주권을 요구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극우와 음모론 집단을 제외하더라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 모인 청년들이 요구하는 것은 주권 회복이다. 이들은 이번 사태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6·3 지방선거 부실 관리로 참정권이 방해받는 소란 행위가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국가기관에 의해 참정권이라는 시민의 가장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주권이 훼손됐다고 여긴다. 이는 2026년 6월17일 14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의 중앙선관위 항의 방문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주권 훼손은 이번 사건으로만 촉발된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주권은 매우 긴 기간 동안 훼손되거나 무력화됐다. 국가의 중요한 정책이 시민의 손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 심지어 국가마저 결정을 내리는 주체가 아니었다. 초국적 자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결정됐다. 이 ‘어디선가’는 음모론의 결정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투표는 마지막 남은 주권의 의례

 

주권이 시민들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과 그로부터 느껴지는 무기력감. 그나마 ‘선거’는 이 무기력감을 감추는 상징적 의례 행위였다. 몇 년에 한 번 투표하는 행위를 통해 시민들은 그래도 이 국가의 주인이 우리라는 것을 형식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권력을 싹 갈아치우는 것을 통해 뭔가 권력이 시민의 손에 있는 듯한 위안을 느꼈다. 무기력감이 깊을수록 투표로 효능감을 확인하려는 힘은 강해졌다. 길게는 100년 넘게 이어지던 정당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완전히 새로운 정당이 들어서는 경우도 많았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현상을 ‘정치와 권력이 이혼한 상태’라고 불렀다. 재미 저널리스트 안희경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바우만은 권력을 “일이 되게 하는 능력”이며 정치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정치는 권력을 갖고 있을 때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고 그것을 되게 할 수 있다. 투표는 지금 무엇을 하겠다는 공약을 보고 그 일이 되게 하는 능력인 권력을 몰아주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봤자 그것을 되게 하는 능력은 다른 데 있었다. 그렇기에 권력이 정치를 떠난 상태에서 투표는 사실상 정치에 화풀이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선관위의 부실 관리에 따른 투표용지 부족에 의한 참정권 침해 사태는 그나마 시민들이 누리던 그 알량한 ‘권력’마저 국가기관에 능멸당한 사건이었다. 아무리 허깨비가 됐다고 하나 국민의 ‘주권’을 오죽 우습게 봤으면 이렇게 부실하게 관리하고 별일 아닌 것처럼 임기응변으로 넘어가려고 했는지, 사태의 국면 국면마다 ‘주권자’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결정짓지 못한 ‘주권자’였지만 정말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자들로 여겨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민들이 주권으로부터 소외됐고 껍데기만 남았다고 느낀 가장 큰 점은, 경제적 주권의 문제일 것이다. 바우만은 금융과 무역을 중심으로 한 자본이 금융화됐다고 말한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한 지역에서 자본이 명령을 내렸는데 듣지 않는다면 그 자본은 곧 다른 지역으로 떠나버린다고 했다. 공장을 두고 떠나기도 하지만 공장을 통째로 뜯어서 떠나기도 한다. 자본이 떠난 자리에 일자리는 없고 산업과 삶의 터전은 폐허가 된다. 무엇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가 하는 일이 아니라 자본이 하는 일이었고 정치는 거기에 충실히 따라야 했다. 지역의 반발이 있으면 설득하거나 억누르면서 말이다.

 

2026년 6월10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학생회관 앞에서 6·3 지방선거 참정권 침해를 규탄하는 시국선언이 열리고 있다. 한겨레 최현수 기자 emd@hani.co.kr

2026년 6월10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학생회관 앞에서 6·3 지방선거 참정권 침해를 규탄하는 시국선언이 열리고 있다. 한겨레 최현수 기자 emd@hani.co.kr


 

빼앗긴 건 경제만이 아니었다

 

이 세계화 시대에 시민들이 소외된 주권에는 다른 층위가 하나 더 있다. 선과 악을 구별하고 정하는 주권이다. 사실 주권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가 아니라 문화와 도덕이다. 무엇이 옳고 그르며, 어떤 일을 해도 되고 하면 안 되는지, 정의(正義)가 무엇인지를 정의(定義)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이고 내밀한 주권자의 힘이다. 정의에 대한 정의가 있기 전에는 죄도 없고 벌도 없으며 도덕도 없다. 정의를 통해 비로소 무엇이 죄인지가 정해지고 그에 따라 벌이 정해진다.

주권자가 선과 악을 정하는 자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비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아들 야곱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야훼의 명령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이다. 아무리 이것이 아브라함의 굳건한 믿음을 보여주기 위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비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어떤 경우에도 ‘선’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절대적인 ‘악’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선과 악을 정하는 주권자가 바로 신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권자로서 신은 선과 악을 정하는 존재이지 자기가 정한 선과 악을 따르고 그에 따라 판단‘받는’ 존재가 아니다. 굳이 신이 아니더라도 세속적 주권자의 표상인 로마의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법을 만드는 존재이지 정해진 법에 구속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결과 법의 원천인 그는 필연적으로 선과 악, 즉 정의를 정의하는 법을 초월한 존재다. 이게 주권자의 본모습이다.

선와 악을 정의하는 도덕과 정의에 대한 주권에서 지구화되지 못한 ‘보통’의 시민들은 자신이 소외됐다는 것을 모욕적으로 경험했다. 감정사회학자 에바 일루즈에 따르면 이들은 “자신들이 이해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새로운 도덕률”에 의해 일방적으로 낙후된 인간으로 취급됐다. 주권의 장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아야 하는 존재로 취급되며 굴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의 땅에서 도덕적으로 불법화된 존재로 여겨진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이들의 분노와 반발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규범을 함께 만드는 것에 기여하기보다는 자신들을 ‘선’으로 규정하던 이전의 규범에 ‘상처받은 애착’을 강하게 느꼈다. 당연히 새 규범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분노가 커지면서 무조건적인 적대적 태도를 갖게 되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진보와 좌파가 보여준 태도였다. 이들의 태도를 ‘미개’하다고 여기면서 “공부는 셀프”라고 비꼬기만 했다. 그렇게 하면 이들이 낙후돼 도태되리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유행했던 “공략하기보다는 낙후시켜라”는 구호(한때 나도 동의하고 종종 사용했던)는 식민지 선주민을 미개와 야만으로 규정하며 체계적으로 도태시킨 것과 매우 닮은 잔인한 식민주의적 언어였다. 문화를 전면에 내세워 선주민을 야만인으로 몰아간 것처럼 지구화된 규범은 이들을 미개인으로 몰아갔다. 선주민에게 주권이 부재했던 것처럼 이들 역시 도덕적으로 주권이 부재한 삶이었다.

 

‘우리가 주인’이라는 말의 폭력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황혼 녘에서 그 틈을 파고든 것이 극우였다. 극우는 이들이 잃은 것이 바로 ‘주권’이라고 또렷한 언어로 말했다. 그들이 되찾아야 하는 것은 ‘전세계’가 아니라 ‘주권’이라고 선을 그었다. 당신들이 미개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을 ‘미개’한 자연 상태로 밀어넣은 것은 진보와 좌파라고 고발했다. 그들이 정한 규범을 따를 때 ‘야만’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자연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선후를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통해 이들은 ‘자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 아니 주권자로의 지위 회복은 선과 악, 미와 추의 규정을 넘어서는 ‘거리낌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임을 확실히 보여줬다. 대표적 인물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그의 말과 행동은 기존 정치인들이 보이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악과 미추를 간단하게 무시하는 것, 그것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주권자의 본모습이며 자유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해방감을 선사했다. 그런 도덕과 ‘문화’를 따르며 고상한 척하는 것이야말로 역겨운 위선이라고 고발했다.

선과 악을 초월해 존재하는 자, 주권자의 모습은 매우 기괴하고 추악할 수 있다. 이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자가 있다. 이스라엘 극우 정치인 이타마르 벤그비르 국가안보장관이다. 그가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로 향하던 구호 선박에서 나포된 활동가들이 구금된 시설을 방문할 때였다. 그는 무릎 꿇리고 땅에 머리를 박은 활동가들 사이를 이스라엘 국기를 흔들며 지나가면서 이렇게 외쳤다. “이스라엘에 온 것을 환영한다. 우리가 이곳의 주인이다.”

주인이란 선함과 악함, 아름다움과 추함을 넘어서는 곳에 있는 자라는 것을 이보다 더 확실하게 보여줄 수 없다. 규정하는 존재이자 초월적 존재인 주권자는 그 규정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부끄러움조차 그가 정의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래 자체는 ‘야사’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군왕은 무치(無恥)’라는 말은 결과론적으로 맞는 말이다. 주인은 자신의 영토 안에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존재, 추악한 존재다.

 

2026년 6월21일 오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서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촉발된 ‘개표소 봉쇄 시위’ 집회에 참여한 시민이 벽보를 붙이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2026년 6월21일 오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서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촉발된 ‘개표소 봉쇄 시위’ 집회에 참여한 시민이 벽보를 붙이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지금 필요한 건 정치의 시간

 

올림픽공원에서 벌어지는 일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6월8일에는 핸드볼경기장에서 훈련 물품을 찾으려던 유소년 선수들이 ‘주권자’들에 의해 가로막혔다. 아까 다 검사했다고 해도 자기는 모른다며 선수들이 공 안에 뭘 숨겨서 갖고 나올지 아느냐며 막무가내였다. 말리던 시위현장 자원봉사를 하는 대학생에게는 마스크를 벗으라고 위협하고 기자들은 폭행을 당했다. 주권자야말로 ‘야만적’이다.

주권이 야만적이 될 수 있으니 훼손된 주권의 문제를 무시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주권의 양면성을 인식하고 그 야만의 고삐가 풀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주권이 훼손됐을 때 국가와 정치세력이 회복에 나서는 ‘정치’가 작동할 때 가능해진다. 정치가 작동할 때 주권자는 시민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다행히 우리는 정치를 폐하는 것이 아니라 작동해야 한다고 인내심을 가지고 요구하는 현명한 목소리를 만나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총학생회장단과 같은 청년들이다. 정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에게 일이 되게 하는 능력, 권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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