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당’, 김홍도, 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한국 사회에서는 ‘ 모범생 ’ 들이 좌절하며 열패감을 느끼기 쉽다 .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 모범생의 특징은 대체로 착실하다는 데 있다 . 이들은 의미가 없거나 과하다고 하더라도 주어진 과업을 성실하게 수행한다 . 열심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준 이상의 성과를 내는 데도 익숙하다 .( 때로는 이런 ‘ 과한 ’ 착실함이 이들을 지나치게 체제에 순응하는 문제적인 존재로 만든다 . 순응하면 안 되는 부당한 요구나 과업도 문제를 제기하기보다는 일단 수행하게 하는 태도를 만들기 때문이다 .)
과업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성과도 수준 이상이지만 이들의 결과물이 ‘ 탁월 ’ 하다고 평가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 착실함만으로 내는 성과는 ‘ 충분 ’ 하지 않기 때문이다 . 특히 ‘ 창의성 ’ 이 필요한 문화예술 영역에서는 고유함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 물론 창의성은 지금 모든 영역에서 ‘ 의례적 ’ 으로 요구되고 평가 항목에 들어가 있다 . 심지어 창의적이면 문제가 될 수 있는 관료제에서도 요구한다 .) 제시된 모든 요소를 다 채우더라도 그런 평가를 받는다 . 수행하는 역량으로는 ‘ 충분 ’ 하지만 창작하는 역량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평가다 .
착실한 자들이 고유성이 있는 ‘ 탁월 ’ 한 결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과연 ‘ 재능 ’ 의 문제인가 ? 문화예술 영역에서 재능이 가진 결정적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 그러나 재능의 중요성을 충분히 고려하더라도 한국 교육이 만든 ‘ 모범생의 역설 ’ 을 간과할 수 없다 . 아주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성실하면 성실할수록 자신의 고유함에서 소외되는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 모범생의 역설 ’ 이다 .
이번 학기에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같은 사회적 재난을 작품으로 만드는 수업을 진행하면서 교육 현장이 당면한 이 모범생의 역설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 학생들의 작품 기획이나 스토리 아웃라인을 보면 거의 문제가 없다 . 수업 시간에 만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매우 성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 실제로 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은 피해자의 말을 한마디 도 놓치지 않기 위해 거의 ‘ 전사 ’ 하는 수준으로 이야기를 받아 적는다 .
자료 조사도 매우 꼼꼼하게 한다 . 수업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 학생들은 자기 관심사에 따라 수업 시간에 다루는 참사에 대해 사전조사를 하고 당사자 들에게 어떤 질문을 할지 미리 준비해야 한다 . 해당 수업일에는 당사자 들과 미리 만나 점심을 함께하며 환대한다 . 또 발표할 내용과 질문을 공유하며 조율하는 시간을 갖는다 . 개인의 아픈 경험과 기억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조심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다 . 대부분의 학생은 이런 과정을 성실하게 수행한다 .
이 과정을 거쳐 나온 학생들의 작품은 대부분 무리가 없다 . 만화 연출 역시 잘하는 학생들인지라 콘티에서 보이는 카메라 각도나 연출도 괜찮고 , 대사도 큰 문제는 없다 . 구조적으로도 대부분 학생이 모범적인 이야기의 양식이라고 배운 3 막 15 장에 충실하고, 각각의 막과 장에 필요한 요소가 빠짐없이 들어 있다 . 세계관 설정이나 등장인물의 관계도도 수업 시간에 배운 것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
문제는 학생들이 작가로서 이야기하고 싶은 문제의식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 피해자가 제기한 문제들이 연결돼 흘러가고는 있 지만 , 그것이 엮여서 이야기하는 작가의 문제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없는 경우가 많다 . 이야기 안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없는 상태인 것이다 .
독자의 눈앞에 글자와 이미지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있다 . 그 이야기로만 그치면 그건 이야기가 아니다 . 그 이야기가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 . 예를 들어 동화 ‘아기돼지 삼형제’는 돼지 삼형제와 늑대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 이야기 ’ 를 들려준다 .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 그런데 뒤의 이야기는 잘 만드는데 앞의 이야기를 작가 스스로가 ‘ 아직 ’ 모르고 있는 것이다 .
한 학생과 피드백을 하며 물어봤더니 한숨을 쉬면서 솔직하게 답했다 . “ 다 잘해야 하거든요 . 다 잘하려고 하다보면 정작 왜 하는지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 작업을 시작한 다음 이야기의 양식적인 측면 , 그리고 형식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완성도를 높이려고 하다보면 문제의식에 소홀해지기 쉽다는 것이다 . 그리고 결정적인 말 한마디를 붙였다 . “ 그러지 않으면 입시에 붙지 못하거든요 . 또 강의 평가에서도요 . 알면서도 일단 채워야 할 것을 채우자는 마음이 먼저 들어요 . 그걸 빠짐없이 하다보면 시간이 다 가버립니다 .”
이것이 우리 교육과 입시가 만들어내는 모범생의 역설이다 . 입시를 성공적으로 통과한 모범생들은 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있다 . 이들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되지 않으면 절대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 모든 것을 수준 있게 하려다보니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몰입할 시간이 없으며 훈련도 되어 있지 않다 . 자기가 애초에 무엇을 궁금해하며 해결하려고 했는지를 놓쳐버린다 . 주어진 것에 충실하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벌어지는 일이다 .
그러나 이를 학원에 의한 ‘ 획일화 ’ 혹은 대학의 게으른 입시 문제라고만 보는 것은 매우 게으른 시각이다 . 교육이 창의성을 죽인다고 말하지만 창의성의 바탕에는 반복된 연습을 통해 당대의 양식을 숙련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 기술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것 역시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 과정에 몰입할 때 ‘ 기술적 측면 ’ 에 천착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 문제는 한국 교육이 이것으로만 빡빡하게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
‘ 자기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정에 몰입해 기술적 완성도에 집중한 다음 몰입에서 빠져나와 흐름을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 이야기의 흐름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 구성 요소와 요소를 기술적으로 가다듬느라 흐름 자체를 놓치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봐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가 해야 하는 이야기를 놓치게 된다 . 앞에서 말한 이야기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없는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

2026년 3월17일 서울 종로구 교보생명 사옥 외벽에 이 일대에서 복귀 공연을 하는 방탄소년단과 시민을 격려하는 대형 글귀가 붙어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대화다 . 가르치는 자는 배우는 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집요하게 물어야 한다 . 하고 싶은 이야기가 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또 물어야 한다 . 그 이야기가 충분히 이야기를 통해 전달되도록 이야기 안에 구현돼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 ‘ 모범생 ’ 들이 그 성실함으로 자신의 문제의식을 발견하고 구체화하는 데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끈질기게 대화를 나눠야 한다 . 이게 가르치는 자로서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성실함일 것이다 .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 배우는 자도 , 가르치는 자도 자신의 존재 이유에 성실할 수 없다 . 어디에서나 제도가 요구하는 것을 성실히 맞추기에 급급하다 . 고유함은 현존하는 질서에 대한 문제 제기이며 그 너머에 대한 궁금함에서 태어난다 . 다른 말로 하면 제도가 멈추는 곳에서 고유한 것은 태어난다 . 존재 이유를 찾도록 제도가 멈춘 곳에서 성실함이 빛을 발할 수 있어야 한다 .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에게 제도를 멈출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 멈출 줄 모르는 제도 안에서는 성실함이 존재 이유를 배반한다 .
성실함으로 존재 이유를 배반당한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것은 다름 아닌 소외다 . 첫째는 보상에서의 소외다 . 자신의 착실함이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 특히 사회가 불길해지는 것은 성실함이 운에 비해 충분히 보상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다 . 운이 성실함을 압도해버리면 성실한 사람들은 열패감을 느끼며 사회에 분노하게 된다 . 지금 한국 사회는 모든 사람이 , 심지어 성실하지 않은 사람들조차 자신이 운이 좋은 사람에게 압도당했다며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 . 위험하다 .
둘째는 자신이 수행한 과제로부터의 소외다 . 자신이 한 일이지만 내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 자신이 한 일은 거의 가치가 없는 , 소모적인 것으로만 여겨진다 . 그 결과 사람들은, 셋째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 일을 하면 할수록 존재감이 고양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훼손된다 . 자신이 하는 일에서 아무런 존재감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 활력이 있을 리 없다 .
그 결과 마지막으로 이들은 자신들이 세계로부터 소외됐다고 느낀다 . 물론 이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대부분의 모범생은 여기서 한번 더 착실함으로 사태를 돌파하려고 시도한다 . 이럴 때 모범생들이 제도에 요구하는 것이 ‘ 매뉴얼 ’ 이다 . 자기가 더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어떤 방침을 따라야 하는지를 물어본다 . 매뉴얼은 평균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있는 것이지 그 이상은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한다고 말하면 결국 ‘ 재능 ’ 없는 무능한 자기 자신에게 절망한다 . 이게 재능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교육 현장에서 가르치는 자와 함께 ‘ 성실히 ’ 찾아야 하는 몫도 있는데 말이다 .
사실 모범생들은 재능을 만회할 방법이 없다고 스스로 믿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는다는 비판보다 재능이 없다는 평가가 더 무섭고 절망적이다 . 모범생일수록 재능의 문제라는 말에 ‘ 쉽게 ’ 수긍하는 경향이 있다 . 문제는 모범생들이 직면한 곤경을 이렇게 개인화함으로써 교육 현장과 사회는 파국의 책임에서 비켜난다는 점이다 . 그 대신 한국 사회는 자신의 성실함으로 존재 이유를 반복적으로 배반당한 ‘ 모범생 ’ 들을 끝도 없이 주눅 들게 하면서 환멸로 몰아가고 있다 .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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