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센트 반 고흐의 ‘선한 사마리아인’. 네덜란드 크뢸러뮐러미술관
지인에게서 캣타워와 고양이 물품을 구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이사하게 됐는데 ‘마당냥이’들을 그대로 두고 갈 수 없어 아무래도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아 물건이 많이 필요하다고 한다. 마당냥이들을 데리고 가는 것은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새로 이사 올 사람에게 마당냥이들을 돌볼 수 있는지 물었더니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고 한다. 이사 가기로 한 집의 이웃도 문제였다. 옆집은 동물을 무서워하니 마당에 나오게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마당냥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됐다. 사실 지인도 고양이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무서워하는 편이다. 인연이 되어 돌보기는 하지만 집안으로까지 들여올 수는 없었다. 결단을 내렸다. 새로 들어가는 집 옥상 일부에 지붕을 씌우고 아예 고양이들의 실내 마당으로 개조하기로 했다. 두고 갈 수도 없고, 데리고 가 마당에 둘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법에 따라 곧이곧대로 사는 성격인지라 건축 허가를 받아야 했다. 건축 설계를 하고, 관공서를 다니며 허가를 받아야 했다. 돈도 많이 들었다. 지인 역시 처음 계획한 다음 비용을 알아보고 갈등이 많았다고 한다. 각오는 했지만 돈은 엄청 많이 들어갔고, 건축 설계부터 허가까지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동물에게 이 정도까지 해야 하냐는 이야기도 들었다. ‘돈××’이라고 수군거리는 소리도 있었다. 지인에게 괜찮았냐고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다. “어쩔 수 없잖아. 애초에 안 돌봤으면 모르겠는데 내 손 닿는 곳에 거두었으니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지.”
책임. 지인의 이야기는 정확하게 책임의 의미와 그 조건이 무엇인지를 새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영어에 책임을 뜻하는 단어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책임(responsibility)이고 다른 하나는 좀더 엄격하게 ‘책무’라고 번역하는 ‘accountability’이다. 책무는 자기에게 부여된 역할과 규정에 맡게 행동했는지를 따지는 일이다. 주로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 그 일에 대해 책임을 물을 때 쓰는 용어다. 이 때문에 책무는 따지면 따질수록 행위자들이 책무를 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거대한 면피 시스템을 만드는 역효과가 벌어진다.
반면 책임은 ‘responsibility’라는 문자가 의미하는 것처럼 응답(response)하는 역량을 말한다. 이 말에는 애초에 그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 그 사람의 책무인지를 따지는 것은 그리 들어가 있지 않다. 대신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고통이 발생한다면 그 고통을 보거나, 듣거나, 그 장소에 있었다면 응당 고통받은 이에게 응답하는 것을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다. 한 사람이 노상에서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상처를 받은 채 쓰러져 있다. 율법을 하늘처럼 받드는 율법학자도,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제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외면한다. 반면 당시 지배자들에 의해 오염된 이로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 그를 치료하고 노잣돈까지 보태준다. 이에 대해 예수는 누가 강도 만난 이의 이웃이 되었냐고 묻는다. 이웃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아무런 책무는 없지만 고통에 응답하는 이, 책임을 지는 자이다.
이 이야기에서 책임의 조건이 드러난다. 바로 ‘손이 닿는 곳’에 대한 감각이다. 내 손이 닿는 곳에 있는 고통에 대해서는, 손이 닿는 한 응답하려는 것, 그것이 책임이다. 반대로 말하면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그 고통이 내 손이 닿는 곳에 있다는 감각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가까이 있는 것이더라도 그 고통이 내 손이 닿는 곳에 있다는 감각이 없다면 응답할 수 없다. 반면 멀리서 발생한 고통이더라도 지금 내 손이 닿을 수 있다면 응답하는 책임을 지려고 한다. 책임의 크기는 손 닿는 곳에 대한 감각이다.
손 닿는 곳에 대한 감각은 이웃이 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피해자에게도 절실한 감각이다. 피해를 ‘당’하는 순간에는 내 몸과 마음마저 내 손 닿는 곳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고통이 발생하고 가해자가 그 고통을 즐기고 착취하고 난 다음, 그 몸과 마음은 내 손 닿는 곳에 남겨진다. 피해자가 피해자로 각성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피해에 응답한다는 말이다.(이것은 자신의 피해에 자기도 책무가 있다는 말이 전혀 아니다. 자신의 고통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응답하는 책임을 지는 것을 통해 피해자는 피해자로서 피해 서사를 넘어 그 고통 서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주인공은 응답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주인공으로 서가는 과정에 다시 이웃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자리가 생긴다. 이웃이란 또한 그 피해자가 손 닿는 곳에 있기에 그가 자기 손 닿는 곳에 있는 자기에 대한 감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응답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응답하는 자로서 이웃 역시 고통 서사의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의 책무가 아님에도 응답을 통해 이웃이 되는 것을 ‘선택’한 자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책임지는 응답을 하는 자이다.
이처럼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손 닿는 곳에 대한 감각이 필수적이다. 손 닿는 곳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다면 우리 삶에 주체가 들어설 여지가 없어진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삶에는 내 손 닿는 곳에 대한 감각이 점점 더 무뎌지고 있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내 혀가 닿는 곳이다. 온 종일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내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에 혀를 댄다. 혀를 대면 댈수록 ‘말하는 존재’, 즉 정치적 존재로서의 희열을 느낀다. 도파민이 폭발하는 정치적 효능감에 우리는 이웃이 되는 사회적 기쁨을 잃어가고 있다.
내 손이 미치기에 응답하는 책임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는 자리, 이 자리를 지역(local)이라 말한다. 지역은 서울이 아닌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감각이 살아 있는 사람끼리 서로 응답할 수 있는 범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서울도 충분히 지역일 수 있고, 지역도 지역이 아닐 수 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책임을 나누며 응답하는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손이 미치기에 응답하는 자리로서의 지역은 사람이 아니라 철저하게 장소 개념이다. 응답할 수 있는 자리에 머무는 존재라고 한다면 사람을 넘어 대상의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내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삶의 터전으로 본다면 응답의 상대 역시 복합적이다. 저 지인은 마당냥이들에게 응답해야 했고, 마당냥이를 거두기를 거부한 양쪽 모두의 이웃들에게도 응답해야 했다. 그 결과가 자신의 옥상을 고양이에게 새로운 마당으로 내주는 것이었다.

존재를 선별하고 ‘선민’ 의식을 부추기는 극우의 지역 정치는 사실상 자신들이 선별한 이들에 대해서만 책임의 의무를 지겠다는 것이다. 극우 성향 전직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한겨레 최현수 기자 emd@hani.co.kr
여기서 극우가 지역의 문제를 어떻게 비틀어버렸는지를 생각할 수 있다. 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극우가 진보와 좌파를 비난하며 정당성을 획득하는 가장 탁월한 방식이, 진보가 보편을 명분으로 지역을 버렸다는 고발이다. 난민이나 이주민들을 수용하며 자신들의 인류애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지역의 고통을 외면했다고 고발한다. 극우는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며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에 책임의 범위를 지역으로 국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전세계의 많은 극우가 내거는 구호가 ‘향토애’다. 이들에게 진보란 향토를 깔보고 외면한 배신자다.
그러나 사실 극우가 강조하는 ‘항토’의 지역이란 삶들이 어울리는 생태계로서의 장소, 즉 터전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들에게는 지금 여기에 있는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기를 대대로 ‘소유’했다고 믿는 ‘주인’으로서의 토착민만이 지역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당연히 이 토착민들에게만 응답해야 한다. 이 자리에 있더라도 토착민이 아닌 존재들에게, 그것이 고양이이건 사람이건, 응답하는 것은 주인의 것을 손님의 것으로 뺏어가는 강탈 행위로 여긴다. 이처럼 지역이 터전이 아니라 사람이 될 때, 지역민은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존재에게 응답해야 하는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빼앗긴 존재, 즉 피해자가 되며 극우는 바로 이 ‘피해 서사’로 토착민을 유혹해 그들의 정서를 착취한다.
장소(터전)는 그 자리에 있는 응답해야 할 존재를 무차별적으로 본다. 지금 강도를 만난 이가 사마리아인이건, 제사장이건, 율법학자건, 이방인이건, 혹은 당나귀라 하더라도 상관없다. 사건에 응답해야 하는 이 역시 마찬가지다. 사건이 발생한 그 자리를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그가 사마리아인이건, 율법학자건, 제사장이건, 이방인이건 상관없이 응답해야 한다. 그것이 손이 미치는 범위, 터전으로서의 지역이기 때문이다.
반면 로컬이 사람을 의미할 때 존재는 선별된다. 구해야 하는 자와 구하지 않아도 되는 자, 외면해도 되는 자와 나아가 버려야 할 자로 사람(나아가 존재)은 선별된다. 그리고 ‘선민’으로 지역민들을 유혹한다. 선민의 유혹만큼 달콤한 것이 없다. 선민으로서 당신만이 ‘주인’이라고 속삭인다. 한편에서는 지금 나를 피해자로 주체화함으로써 응답해야 할 책임을 면제해주고, 다른 한편에서는 ‘선민’으로서 모든 자원을 독점할 수 있게 한다. 나아가 선별되지 못한 이들을 법 밖의 존재로 쫓아내어 노예처럼 부려먹을 수 있게 한다. 이것이 극우의 지역 정치다.
존재를 선별하고 ‘선민’ 의식을 부추기는 극우의 지역 정치는 사실상 자기들이 선별한 이들에 대해서만 책임의 의무를 지겠다는 것이다. ‘선민’이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어떠한 응답도 불온한 것으로 여긴다. 손이 미친다고 하더라도 책임지지 못하고 외면하게 한다. 누구도 응답하는 이웃이 되지 못한다. 이때 지역은 그저 선민들의 ‘소유’가 될 뿐이다. 여기서는 서로서로 응답하는 주체로서의 이웃이 되는 터전인 지역이다. 선민이 되고 싶은가 아니면 이웃이 되고 싶은가. 솔직히 많은 이가 선민의 유혹에 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마당냥이와 옆집 모두에게 이웃이 되려고 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지인과 같은 사람이 한두 명만 있어도 여전히 이야기는 이어질 것이다. 이야기란 원래 그렇게 지극히 비관적인 작은 가능성에서 모두의 보편성을 보려고 하는 낙관적인 고군분투이니까 말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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