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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병풍 세운 대통령의 비참한 엔딩

주인공이 되고 싶을수록 조연이 되는 역설
등록 2026-04-16 21:45 수정 2026-04-23 11:26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 전쟁도 관세처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부활절에 쌍욕을 섞어가며 호르무즈해협 봉쇄를 풀라고 공개적으로 말한 것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한 ‘분노’ 때문이다. REUTERS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 전쟁도 관세처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부활절에 쌍욕을 섞어가며 호르무즈해협 봉쇄를 풀라고 공개적으로 말한 것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한 ‘분노’ 때문이다. REUTERS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완전히 착각한 것이 있다.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였지만 끝내는 것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거의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데, 왜 전쟁을 끝내는 것은 그렇지 않은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 그는 자기 마음대로 해왔다. 관세를 올리고 내리고 하는 것에서 보듯 변덕을 부리고 잘못된 이야기를 한다. 그동안 전세계 모든 지도자가 자기 앞에 비굴하게 조아렸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대 위에 오른 다른 사람들이 ‘행위자성’(agency)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 혼자만 행위자다. 타인의 행위자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받아서 자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한다. 말을 듣고 받아서 말해야 하는 것은 상대방이지 자기가 아니다. 그러니 트럼프 대통령이 서 있는 무대에서는 ‘장면’(scene)이 안 만들어진다.

 

‘행위자성’ 가진 세계 지도자들

 

연극 연습을 할 때 배우들이 상대 배우에게 하는 가장 흔한 불만이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말을 못 받잖아. 제대로 해줘”이다. 자신이 해석한 자기 대사와 상대가 지금 자기에게 하는 대사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을 “왜 하필 나야?”라고 받기 위해서는 상대방 배우가 그렇게 말을 받을 수 있도록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상대 배우가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라고 대답하게 하는 방식으로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왜 하필 나야?”라는 말로는 받을 수 없다. 그러면 ‘스토킹’이라는 사건이 펼쳐지는 장면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은 결코 장면을 만들 수 없다.

이야기를 가르칠 때 가장 어려운 것이 ‘장면’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장면은 하나의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말한다. 사건이 연속적인 하나의 시공간에서 의미 있게 시작해서 의미 있게 전개돼야 한다. 즉, 사건이 벌어져야 하며 무대 위에 등장한 인물들은 사건을 둘러싸고 말과 행동을 통해 긴장감 있게 의미 있는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심지어 사물 하나라도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등장한 인물의 감정이나 기억, 행동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무대 위에 올라와 있어야 한다. 사건의 의미를 구성하거나 다른 존재에게 긴장감 있는 영향력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 인물이나 사물은 장면 연출에서는 완전히 불필요한 존재다. 이른바 의미 없는 존재인 ‘병풍’도 조롱이나 웃음을 유발한다면 얼마든지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무대는 행위자성을 가진 존재들이 얽혀 있는 곳이다. 그 얽혀 있음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서 역동성을 만들어내고 이 역동성에 의해 무대에서 펼쳐지는 사건은 흥미진진해진다. 만약 무대 위 존재들에게 행위자성이 없다면 관객은 막이 오르자마자, 책으로 친다면 책을 펼치자마자 독자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주인공 혼자만 행위자성을 가지고 있어 그가 욕망하고 생각하는 대로 이야기가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욕망과 행동을 방해하거나 촉발하고 변화시키는 다른 영향력이 없기 때문에 혹 이야기에서 변화가 생긴다면 오로지 주인공의 ‘변덕’에 의해서일 뿐이다.

 

어그러지는 종전 계획

 

트럼프 대통령을 특징짓는 것이 바로 이 ‘변덕’이다. 이야기에서 변덕은 압도적 힘을 가진 존재들의 특징으로 나온다. 예를 들어 중국 무협지에서 순간순간 변덕을 부리면서 이야기를 뒤흔드는 것은 압도적인 무공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들의 행동은 기분에 따라 움직이며 종잡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고통받으면서도 그들의 힘이 워낙 압도적이라 대항하지 못하고 휘둘리기만 한다. 그들은 또 사람들의 ‘비굴함’을 보고 비웃으며 변덕을 부린다. 때로는 자기의 그 변덕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것을(반대로 그 변덕에 의해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대량으로 학살할 수도 있다) 자비로 해석한다.

문제는 이 압도적 힘을 가지고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이 존재는 결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주인공이 주인공인 이유는 이야기를 의미 있게 하나의 주제가 관통하도록 꿰어가기 때문이다. 이야기에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고 그 주제가 실현되는 과정이 있으며 주인공이란 바로 그 주제를 실현해가는 인물이다. 변덕스러운 존재는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지 결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무협지에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고수들이 주인공이 아닌 이유다.

이번 이란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 마음대로 시작했지만 끝내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전쟁의 의미를 수시로 바꾸고 있다. 언제는 이란의 정권과 체제를 바꾸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가 그게 여의찮게 되자 원래 목적이 핵무기 제조 능력을 없애는 것이라고 했다가 그것도 달성할 수 없게 되자 또 말을 바꿨다.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없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고 있으며 그런 모순을 지적하면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그 결과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트럼프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에 심오한 의미를 추정하고 분석했으나 지금은 “그냥 나오는 대로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렇게 된 이유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란 당국이나 이란 시민,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 같은 동맹국의 행위자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가 결심하고 명령하면 다른 모든 존재는 그 말에 머리를 조아리며 복종하고 그대로 ‘수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자 무대 위의 모든 존재는 트럼프 대통령의 명령을 ‘수행’하기보다는 자기 ‘존재감’을 걸고 ‘활동’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의 계획은 모두 다 어그러졌다. 그야말로 그에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벌어지는 ‘장면’이 펼쳐졌다.

 

‘세이렌’의 다른 버전

 

이야기의 무대에 올라오는 모든 존재는 자기 존재감을 걸고 올라온다. 역할이 ‘병풍’이더라도 말이다. 그러면 그는 병풍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병풍으로 ‘활동’, 즉 다른 존재들과 의미 있게 상호작용하며 자기 존재감을 드러낸다. 대사 한마디 없고 변변한 행동 하나 없더라도 빛을 발하는 조연, 심지어 엑스트라가 있고 관객과 독자의 눈에 확 들어오는 이유다. 그는 살아 있는 존재로 주인공에게 영향을 미치며 사건의 의미와 흐름도 바꾸어낸다. 이게 이야기의 역동성이다.

무대 위에 등장하는 타인의 존재감을 무시한 자의 외로움에 대해서는 세이렌의 바다를 건너는 오디세이 이야기를 통해 이미 많이 이야기됐다. 잘 아는 것처럼 세이렌의 노래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 바다를 건너던 수많은 배가 노래에 홀려 빙빙 돌다 난파하고 만다. 그래서 그 바다를 건너는 배는 아무도 없다. 오디세우스는 그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싶어 꾀를 낸다. 노를 젓는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틀어막고 자기를 돛대에 밧줄로 묶은 채 바다를 건너는 것이다. 항해하는 내내 그는 세이렌의 노래를 고통스럽게 향유하며 자기를 풀어달라고 말하지만 듣지 못하는 선원들은 묵묵히 노를 젓는다. 오디세우스의 배는 바다를 통과하고 그를 죽음으로 유혹하지 못한 세이렌들은 절망하여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다.

무대와 장면, 행위자성을 설명하며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에서 무시되고 있는 선원들과 세이렌의 행위자성을 생각해보며 이야기를 다시 한번 짜보게 한다. 선원 중에서 노래를 듣고 싶은 사람은 없었을까? 오디세우스를 밧줄로 묶고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배를 보며 세이렌은 과연 존재감도 없는 노래를 불렀을까? 만일 세이렌의 노래가 모두를 다 죽음에 빠뜨렸다면 그 노래가 그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이렇게 해서 무대 위의 존재들에게 상상력을 자극하면 재밌는 ‘대안적’ 이야기가 다양하게 펼쳐진다. 그 노래가 궁금했던 한 선원이 밀랍을 빼서 노래를 듣고 홀리게 되고, 그 모습을 본 다른 선원 중에서도 밀랍을 빼는 선원이 있다. 그러면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고 좌초 위험에 처한다. 밀랍을 빼지 않은 선원들은 필사적으로 배에서 탈출하고 세이렌들은 노래를 부르는 것을 그만두고 바위섬으로 돌아간다. 다른 존재의 행위성을 무시한 채 자기만 행위자인 줄 알고 혼자 노래를 듣고 싶어 했던 오디세우스는 홀로 좌초하는 배의 돛대에 묶인 채 서서히 바닷속으로 가라앉으며 최후를 맞게 된다는 이야기도 만들어진다. 이렇게 된다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가 되는가?

 

“내 맘대로” 오판의 대가

 

이런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다. 동국대 다르마칼리지 최경아 교수는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 dukkha)를 ‘마음대로 되지 않음’이라고 해석한다. 아무 고통이나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핵심에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고통의 실체이며 이 고통의 실체에 의해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가 나온다. 무엇을 탐하는 것이 왜 분노로 이어지냐면 그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이란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부활절에 쌍욕을 섞어가며 호르무즈해협 봉쇄를 풀라고 공개적으로 말한 것이 바로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한 ‘분노’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탐진치를 만들어내는 고통의 실체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교과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분명해진다. 이 이야기가 펼쳐지면 펼쳐질수록 그는 주인공이 아니게 된다는 점이다. 자신의 존재감을 빛내는 다른 주인공들이 나타나는 장면들이 나올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인권의 보편성을 근거로 홀로코스트를 고립화해 그 절대성을 오히려 무너뜨리고 있는 이스라엘을 비판한 것 역시 그런 새로운 장면의 출현이기를 기대한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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