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1월4일 가자지구 북부 자발리야에 있는 파괴된 집 잔해 속에 서 있는 다섯 살 마이아 바다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2025년 10월10일 휴전 발효 뒤에도 10월28일 하마스가 휴전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며 공습을 명령했고, 현재까지도 공습을 이어가고 있다. EPA 연합뉴스
세계가 팔레스타인에서 보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기적이다. 모든 희망을 잃고 완전히 절망한 나머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듯한 저 폐허의 땅에서 끊임없이 무대가 서고, 무대 위에 배우들이 올라가고, 배우들이 말을 한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바깥에 들려준다. 그 목소리가 바깥에 들리는지조차 알 수 없는, 폭탄이 떨어지는 그 무대 위에 청소년들이 올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원이 있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고 무대를 내려가는 것이라 말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도 기적이 아니다. 기적은 자연현상에서 결코 나타날 수 없는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신이 번개를 치며 나타나 전능의 팔을 떨쳐 보이며 모든 문제를 한번에 해결하는 것도 아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기적을 통해 꼬인 이야기를 단번에 풀어버리는 것이지만, 기적이 이야기를 시시한 것으로 망쳐버리며 진정한 기적을 무대에서 제거해버릴 뿐이다. 이런 것은 ‘이야기’도 아니다.
진정한 기적이란 아무런 해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 막혀버린 순간까지도 배우가 무대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이야기하는 것이다. 무대에 선 인물이 아니라, 그 배우를 바라보는 관객이 안쓰러워 이제 소용없으니 그만 내려오라고 절규하는 순간에도 무대를 내려오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물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기적이다. 이 무대에서는 절규가 관객의 몫이고 인물이 말을 한다. 그리고 끝까지 자신의 절망을 응시하며 말하기를 그치지 않는 인물을 보며 관객은 절규를 멈추고 말로 응답해야 함을 깨닫는다. 이런 것이 이야기다. 기적으로서의 이야기이며 이야기가 일으키는 기적이다.
이 기적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청소년들이 보여줬다. 2008년에서 2009년까지 가자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쟁 때 팔레스타인의 독립극장인 아슈타르극장이 청소년 31명과 함께 독백극 ‘가자 모놀로그’를 창작했다. 전쟁의 참상에 대한 고발이자, 그 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용기와 희망의 이야기에 전세계는 크게 감동했다. 전쟁의 폐허에서 빵과 물만 생각하던 바깥 사람들에게 가자의 청소년들은 파괴된 것은 축구와 연극, 그리고 시라는 것을 증언하며 자신들은 바로 그것을 열망한다고 웅변했다.
그 순간 세계는 깨달았다. 팔레스타인 가자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은 것은 단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였음을 말이다. 간신히 생존할 수 있는 물과 빵, 그리고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텐트, 그것을 ‘인도주의’라고 부르는 세계 역시 시와 연극, 축구를 노래하며 불멸을 꿈꾸는 인간을 밀쳐내고 있다는 것을 이들의 독백을 보며 깨닫고 부끄러워했다. 당연히 이들의 생존을 위해 연대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 머릿속에 있는 인도주의,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가 던진 질문을 바깥은 우리가 ‘해법’이라고 부르는 ‘인도주의’에 던져야 했다.(물론 인도주의가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스라엘 베냐민 네타냐후 정부의 학살과 세계의 인도주의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거기에 멈추고 안주하지 말자는 요청이다.)
그리고 2023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으로 시작했지만, 진행은 철저하게 학살이었다. 사람이 죽고 집은 파괴되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번 학살이 철저하게 파괴하고자 한 것은 희망이었다. 팔레스타인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 희망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네타냐후 정부의 이번 전쟁 목표였다. 체제 내에서 존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체제를 뒤집어엎는다면 존재하리라는 희망, 내부가 단결한다면 존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외부와 연대한다면 존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 어떤 희망도 불가능하게 만들어 가자지구를 철저히 절망의 땅, 절멸의 장소로 만드는 것이 이번 학살의 목표였다.
그 목표는 성공한 듯 보인다. 2년에 걸친 전쟁으로 가자는 초토화됐다. 서안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철저히 무력했고 가자지구를 다스리던 하마스도 거의 저항하지 못했다. 말로만 이스라엘을 비난하던 외부와의 연결은 철저히 끊어졌다. 아랍 국가들은 이번에도 말만 보탰다. 이스라엘과 적대하는 이란과 레바논의 헤즈볼라도 자기 코가 석 자였다. 미국은 철저하게 네타냐후의 편(물론 중간중간 조 바이든과 도널드 트럼프 모두 매우 ‘격노’했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말이다)이었다. 유럽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국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네타냐후를 압박했지만,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미국·이스라엘이라는 압도적 힘의 철옹성 앞에 모든 것이 무력해 보였다.
무엇보다 현재 체제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무력감이 지배적이다. 현 세계 내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힘을 모으고, 전세계 시민들이 연대해 정부를 압박하고 움직이면 변화가 있으리라 믿던 때가 있었다. 그 결실이 국제사회가 공식적으로 채택한 ‘두 국가 해법’이다. 1947년 유엔이 지정한 팔레스타인 분할안과 1967년 6일 전쟁 이전의 팔레스타인 국경으로 두 국가를 수립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나란히(side by side) 살아가는 것이다. 네타냐후 정부는 이 ‘희망’을 철저히 조롱하고 파괴했다. 아무도 이 해법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 네타냐후의 목표였다.

‘2010 가자 모놀로그’에서 당시 17살 청소년 아흐마드 루지의 이야기에 만화로 응답한 하랑 작가의 작품 한 장면. 하랑 제공
체제를 통해 더 나은 미래가 있으리라는 희망이 무력화되면 절망한 사람들이 대안으로 찾는 것이 체제를 뒤집어엎는 것이다.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의 저자 바버라 월터의 말처럼, 체제 내에서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펼침막을 들어 ‘시위’하고 파업을 조직하지만, 이 희망이 불가능해지면 총을 든다. 총을 드는 것은, 새 희망을 향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완전히 절망한 몸짓이기도 하다. 그나마 ‘들’ 총이 있을 때나 가능한 행위다. 가자 사람들은 그렇게 ‘들’ 총조차 없는 완전한 절망의 상태에서 철저히 유린당했다. 네타냐후가 제시한 선택지는 오직 하나 ‘절멸’이었다.
이 상태에서 진정한 ‘절망’이 찾아온다. 체제를 통해 바꿀 수 없다는 것, 체제를 바꿀 수 없다는 것보다 더 큰 절망이 도래한다. 무기력과 무력감.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자신에 대한 무력감이야말로 절대적인 절망이다. 감정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경제위기 이후 미국 백인 노동 계급의 자살률이 급증한 것을 분석하며 경제학자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턴이 말한 ‘절망의 죽음’이란 용어를 소개했다. 경제적 파탄으로 사회적 삶이 파괴된 그 근본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이라는 철저한 절망이 있다는 말이다.
아마 네타냐후가 가장 학살하고 싶었던 희망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완전히 무력감에 빠져버리는 것, 그 어떤 말이나 몸짓도 소용없다고 생각하고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운명에 자신들을 맡겨버리게 하는 것 말이다. 문제는 이것이 무력감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완전한 무력감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이는 다름 아닌 ‘죄’다. 종교적 의미에서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자기 자신과 자기 민족에 대해, ‘죄인’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으려 한다.(이런 점에서 네타냐후가 저지른 것은 학살이라는 전쟁범죄만이 아니라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종교적 악행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기에 한마디조차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죄임을 우리는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로 알 수 있다. 아렌트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유대인이 극심한 박해를 당할 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독일인 목사에게 묻는다. 왜 목소리를 내지 않았냐고. 그러자 그 목사가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도 듣지 않을 것이고, 상황은 변하지 않을 텐데요”라고 답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아렌트는 이에 대해 그 목사가 ‘말의 힘’과 ‘정치적 책임’을 모두 포기했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렇더라도 말을 했어야 한다”는 것이 아렌트의 준엄한 심판이다.
팔레스타인 가자 사람들은 이번에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2010년의 모놀로그는 2024년에도 이어졌다. 그나마 있던 무대며, 무대에 올라갈 시간도 다 파괴된 상태에서도 가자의 청소년과 청년들은 무대를 짓고 그 위에 올라 독백을 이어갔다. 청년 19명이 목소리를 냈고 그중 15명은 2010년 모놀로그에 참여한 청소년이었다. 2010년의 파괴에 이어 다시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암흑으로 만드는 구덩이(아흐마드 루지의 이야기에 대한 하랑 작가의 작품)가 되어버린 가자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소원은 이 독백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가는 것(파티마 아하셈의 이야기를 그린 김수연 작가의 작품)이라고 말하며 무대에 오른다. 그 뒤로 떨어지는 폭탄에 의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무대를 말이다.
이들의 독백을 들으며 ‘우리’는 절규를 멈추기로 했다. 보는 내가 슬퍼서 더 볼 수 없으니 그만 무대에서 내려오라는 절규를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들어봤자 아무 희망도 없는 이야기를 듣는 (나의 작은)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아 내 ‘평화’를 위해 그 (큰 고통의) 목소리를 무대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지르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말을 지우는 소리를 멈추고 그들의 ‘말’에 ‘응답’할 때임을 알았다.

14살 팔레스타인 청소년 야스민 자루르가 쓴 ‘가자 모놀로그’에 대한 응답을 만화로 그린 강예나 작가의 웹툰 한 장면. 강예나 제공
그래서 우리가 가장 잘 말하는 방법으로 응답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가족을 굶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아빠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려 오렌지나무를 오르며 우리에게 한 번만 더 상냥함을 허락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는 야스민(야스민 자루르에 대한 강예나 작가의 작품)처럼, 우리 만화가 가자 사람들에게 조금은 상냥한 목소리의 응답이기를 기도했다. 서로 응답하는 우리는 죄에서 일어나 끝끝내 악을 심판할 것이다. 지옥으로 갈 자는 죄인이 아니라 악인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https://h21.hani.co.kr/arti/COLUMN/2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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