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성형 인공지능(AI) 퍼플렉시티에 ‘해리 포터 덕후와 머글의 차이를 일러스트로 그려줘’라고 지시어를 입력해 생성한 이미지.
“인공지능(AI) 발전이 더 가속화하면 니체는 ‘덕후’야말로 진정한 위버멘슈(초인)라고 말하지 않을까? 세상은 덕후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시대에 도태된 ‘최후의 인간’이라고 조롱하겠지만 말이야.”
AI가 발달한 시대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야기는 사라지고 메시지, 즉 짧은 글만 남았다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글은 메시지로 시작해야 한다. 즉, 선명한 두괄식이어야 한다. 독자의 주목을 끌기 위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먼저 강하게 밝혀야 한다. 순식간에 첫 문장과 문단을 보고 계속해서 읽고 소비하기 때문에 ‘뜸’ 들이는 것으로 시작하면 바로 사장돼버린다. 문장까지 갈 것도 없다. 글이라면 제목을 선명하게 지어야 하고, 웹툰이나 유튜브라면 섬네일이 결정적이다.
‘AI 이후의 교육’을 다루는 이 글의 시작점은 교실의 한 풍경일 수도 있고, 여파가 무엇이라고 선언하는 말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AI 등장은 배우는 자의 ‘과정’을 생략해버렸다는 선언으로 시작할 수도 있고, 배움의 과정이 생략된 좋은 사례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종이 매체에 실리는 긴 글이라면 풍경 묘사에서 시작할 것이고 원고지 5장 내외의 짧은 칼럼이라면 선언, 즉 메시지를 천명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긴 글이건 짧은 글이건, 궁극적으로 종이 매체에 실리는 글이건 혹은 인터넷에만 ‘발간’되는 글이건 최종적으로 인터넷 게시를 전제로 글을 쓴다. 인터넷, 특히 모바일을 통한 글 읽기는 전통적인 글 읽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종이책은 신문부터 단행본에 이르기까지 읽기에만 집중하는 독자를 전제로 한다. 이 독자의 읽는 속도는 무엇보다 느리다. 절대적 속도가 느리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독자는 가속하지 않는다. 이 독자는 간혹 건너뛸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읽기의 ‘흐름’을 따라가지 이 흐름을 가속하지 않는다. 이 독자가 즐기는 것은 흐름이다. 이야기가 구성되는 방식과 그 구성이 얼마나 촘촘하게 흐르는지를 즐긴다. 이야기 구성의 탄탄함은 오직 흐름을 통해서만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사람들이 이야기를 견디지 못하는 이유는 짧지 않아서가 아니라 가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게시된 글을 가속하지 않고 읽는 독자는 없는 것과 반대로, 종이책을 읽으면서 가속하는 독자는 없다. 인터넷 글을 가속해서 읽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종이책을 가속해서 읽으면 그건 돈 낭비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가속해서 읽을 것이면 왜 굳이 돈을 주고 책을 샀냐는 것이다.
‘낭비’의 개념 자체가 완전히 정반대다. 한쪽은 시간을 들이는 것이 낭비이고 다른 쪽은 시간을 들이지 않는 것이 낭비다. 한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게 낭비이고 다른 쪽은 완독하지 않는 것이 낭비다. 한쪽은 가속하지 않으면 낭비라 생각하고 다른 쪽은 반대로 감속하지 않으면 낭비라고 생각한다. (종이책을 읽을 때 감속하며 자신이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감속하는 공간에 머무른다. 이를테면 화장실 같은 곳 말이다.)
이는 낭비를 절대적인 비판의 대상에서 선택의 문제로 전환한다. 낭비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어떤 낭비를 선택할 것이냐고 묻는다. 어떤 개념이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예: 모든 낭비는 나쁜 것이다) 내가 선택하는 문제(예: 어떤 낭비를 선택할 것인가)가 되었을 때 인간은 비로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 즉, 어떤 삶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지 말이다.
이에 대해 뚜렷한 사람들이 바로 ‘덕후’다. 글의 첫머리에 차라리 덕후가 이 시대 초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이유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좋아하는 것을 가속하는 것이 아니라 감속한다. 감속해야지만 디테일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디테일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 과정에서 겪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이들이 덕후다. 덕후는 가속에 지배되는 ‘생산’이 아니라 감속으로 향유하는 삶을 지향한다. 그러니 이 디테일을 추구하는 덕후는 말할 것이 풍부하다. 이야기가 넘쳐난다. 세상은 덕후가 시간을 허비한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덕후는 세상이 삶을 낭비하고 있다고 본다.
흔히 사람들은 덕후가 현실이 힘들어서 이야기의 세계로 도망쳤다고 말한다. 현실의 냉정함과 가혹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야기라는 판타지에 빠졌다고 본다. 그래서 제발 그 ‘상상계’적 충만함이라는 판타지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오라고 말한다. 자기들끼리만 교류하고 즐거워하는 그 상상계적인 동일자의 세계에서 나와 타자들로 구성된 현실 세계로 돌아오라고 말이다.
한편으론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돌려보면 우리는 덕후가 아니라 ‘머글’(덕후가 아닌 ‘일반인’)의 실상을 알 수 있다. 오래전 교류하던 트위터의 한 현자가 말한 것처럼, 머글이야말로 어떤 가능성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존재이기 때문이다. 머글은 이야기를 견디지 못하고 현실로 도망쳤다. 자기 생애를 이야기로 만드는 것도 견딜 수 없고, 인류의 역사를 ‘실현’하는 것도 견딜 수 없다. 이야기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디테일’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디테일이 반드시 수반하는 고통과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이야기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한다.
이런 점에서 머글이 지독한 현실주의자인 것은 정확하다. 그들은 현실이 허무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현실의 이야기 가능성에 대해 냉소한다. 허무주의의 극단에서 이들이 발견한 유일하게 삶에 허락된 것은 쾌락이다. 허락된 것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니체가 말한 것처럼 최후의 인간이다. (물론 그 쾌락마저 허무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초인적 면모도 가진다. 그렇기에 이들은 허무를 견디는 이야기가 아니라 “허무를 견뎌라”와 같은 강력한 메시지를 선호한다. 그 ‘강력함’이 마치 견디는 초인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보면 우리는 그저 짧은 글이 긴 글을 압도하는 시대를 사는 것이 아니다. 메시지가 물신화된 시대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짧은 글이 세계의 모든 진실을 다 포착하고 포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한 문장으로 압축된 말이 유행하면 그것이 모든 담론의 공간을 압도하고 온갖 곳에서 다 사용하며 모든 상황을 다 규정한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감정이나 상황, 그리고 맥락과 상관없이 다 ‘긁힌 것’으로 규정되며, 그 순간 그는 이성을 자제하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로 취급된다.
나머지 디테일은 이야기돼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알아서 견뎌야 한다. 나약함이란 메시지가 요구하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메시지는 물신화돼 있다. 신앙에서는 언제나 신이 문제가 아니라 믿는 쪽이 문제다. 물신화에서 겪음은 개인적인 것이며 오직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성공한 자만이 자신이 겪은 것을 ‘간증’할 수 있다.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은 피해자의 경우에도 고통을 물신화하는 것이 바로 ‘증언’을 통해 드러난다고 우려한 바 있다.) 증언할 수 없는 겪음은 침묵돼야 한다.
이야기는 정반대 길로 간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은 주인공(즉, ‘나’)이 무엇을 하는가를 넘어 무엇을 겪는가에 달려 있다. 주인공은 무엇을 하면서 그것을 겪는다. 그 겪음을 통해 주인공은 연속적으로 자기 경험을 갱신하며 성장한다. 주인공은 분주하게 ‘겪’으며, 그 겪음을 사유하고 말하면서 자기 삶을 이야기로 ‘엮’어나간다. 이런 점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은 행동하는 존재이자 동시에 말하는 존재다.
겪음은 즐거운 것도 있지만 대체로 당황스럽고 고통스럽다. 그렇기에 안전한 삶을 위해서는 되도록 삶에서 겪음을 제거해야 한다. 오래전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가 지적한 것처럼 겪음 없이 결과물만 향유하는 것, 이것이 최후의 인간이 지향하는 삶인 편안함과 안온함일 것이다. 겪음 없이 즐길 수 있다. 겪음 없이 즐겨라. 이 최후의 인간이 허무주의를 초극한다고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비겁한 쾌락주의자인 이유다.
미국의 교육 사상가인 존 듀이는 인간의 배움과 성장은 겪음을 통해 이뤄진다고 말한다. 우리가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의 실체는 겪음이다. 불에 손을 넣으면 화상을 입는다. 손을 넣는 행위가 해봄이면 화상을 입는 것이 겪음이다. 이 겪음을 통해 사람은 불 속에 손을 넣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는다.
겪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며 배움을 구성한다. 겪고 나면 단지 행동 교정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왜 불에 데면 화상을 입는지 알고 싶어 한다. 여기서 생물학과 화학에 대한 배움, 나아가 이 고통을 다른 고통과 비교하면서 화상에 대한 문학적 비유까지 배우고 이해하게 된다. 배움은 겪음에서 시작되고 겪음을 엮으며 인간은 성장한다.
AI 등장은 이런 배움의 과정을 가속하고 압축하는 것을 넘어 블랙박스로 만들고 있다. 빨리 과제를 내야 하는 학생들은 내가 프롬프트로 ‘주문’한 것이 생산물로 나올 때까지 어떤 과정을 겪는지를 알지 못한다. 학생이 겪는 것은 없다. 학생은 AI가 대리하는 동안 다른 것을 한다. 다른 것을 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 배움의 과정에서 수행해야 하는 작업을 겪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겪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수행하는 동안 내가 겪는 것이 달라지니 배우는 것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발터 베냐민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겪고’ 돌아온 병사들이 전쟁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참호 속에 갇혀 있으며 죽음만 경험했던 그들은 전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고전적 의미에서 전쟁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용담이 아니라 참호 안에서의 비참함밖에 없었다. 겪음의 부재라는 경험의 빈곤은 곧 이야기의 빈곤이다.
겪은 것이 다르니 말할 수 있는 것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겪는 것이 없다면 말할 것도 없다. 앞에서 말한 듀이의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겪은 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AI 이후 교육 현장의 관건은 다시 배우는 자를 말하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겪음을 다시 교육 현장으로 불러와야 한다. 많은 교육 현장에서 AI 이후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물신화된 메시지에 저항하며 (다른 한편 덕후 쪽으로 말한다면 취향을 물신화하는 것에 저항하는) 이야기하는 존재를 탄생시키는 경험 말이다. 언제나 물신화에 저항해온 것, 그것이 교육이 아니던가.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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