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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매주 열리는 ‘작은 월드컵’

등록 2024-09-21 09:39 수정 2024-09-26 11:29
2024년 8월16일 오후 부산 금정구의 한 축구장에서 ‘호통 판사'로 유명한 천종호 부산지법 부장판사가 인터뷰하고 있다. 조윤상 한겨레 피디

2024년 8월16일 오후 부산 금정구의 한 축구장에서 ‘호통 판사'로 유명한 천종호 부산지법 부장판사가 인터뷰하고 있다. 조윤상 한겨레 피디


“내가 던질게.” 천종호 부산지법 부장판사가 김성준(25)으로부터 공을 받았다. 천 판사가 스로인으로 던진 공이 몇 번의 패스를 거쳐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나이스!” 성준이 소리쳤다. 정식 축구는 아니다. 13명씩 도합 26명이 뛰는 경기. 연령대도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했지만, 경기는 치열하고 진지하게 진행됐다.

제1530호 표지이야기에서 다룬 홈리스월드컵 국가대표 선발을 위한 1차 합숙훈련이 끝난 지 약 2주가 지난 2024년 8월16일, 부산의 한 축구장을 찾았다. 이곳에선 매주 금요일 오후 ‘만사소년FC’의 경기가 진행된다. 법원에서 보호처분을 받고 회복시설에 머무는 청소년들의 성품 교정을 위해 ‘호통 판사’로 유명한 천 판사가 2016년부터 운영하는 축구단이다. 경남 지역의 청소년 회복시설 등에서 매주 30~40명의 위기청소년이 온다. 자립준비청년들도 자유롭게 운동하러 나온다. 서울 2024 홈리스월드컵 국가대표 주장 성준은 5년째 이 팀에 몸담고 있다.

매주 열리는 경기엔 천 판사도 함께 뛴다. 축구 실력은 평범하지만 누구보다 진심이다. 나이가 많다고 봐주는 건 없다. 천 판사에게 패스를 많이 한다거나, 살살 하는 선수는 없었다. 심지어 몸싸움도 강하게 붙었다. 운동장 안에선 그저 똑같은 선수였다. “보호처분을 받은 청소년 성품 교정을 위해 여러 활동을 하는데 운동이 제일 좋은 것 같더라고요. ‘만사소년’이라고 이름을 지은 건 모든 일을 소년 중심으로 한다는 겁니다.” 전반전을 마친 뒤 땀으로 흠뻑 젖은 천 판사가 말했다.

2024년 8월16일 오후 부산 금정구의 한 축구장에서 만사소년FC가 연습경기를 하고 있다. 천 판사가 스로인을 준비하고 있다. 천 판사 바로 앞 검정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서울 2024 홈리스월드컵 국가대표팀 주장 김성준이다. 류석우 기자

2024년 8월16일 오후 부산 금정구의 한 축구장에서 만사소년FC가 연습경기를 하고 있다. 천 판사가 스로인을 준비하고 있다. 천 판사 바로 앞 검정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서울 2024 홈리스월드컵 국가대표팀 주장 김성준이다. 류석우 기자


만사소년FC는 지금까지 9명의 홈리스월드컵 국가대표를 배출했다. 홈리스월드컵 국가대표를 많이 배출하는 육성소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실은 만사소년FC 자체가 ‘작은 홈리스월드컵’이다. 축구를 통해 무언가 변화를 만들어보겠다는 취지는 홈리스월드컵이나 만사소년FC 모두 같기 때문이다.

“(회복시설에 있는) 6개월 동안 여기 나와서 야단도 맞고 제가 열심히 뛰라고 소리도 지르고 하다보면 아이들이 변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라인 밖에서만 소리치면 안 들어요. 그래서 저도 같이 뛰는 거죠.” 성준은 어떤 청년이었는지 천 판사에게 물었다. “처음엔 굉장히 짜증을 많이 냈죠. 애들이랑도 많이 싸우고 축구도 심하게 하니까 제가 야단을 많이 쳤어요. 한 달 동안 못 나오게도 하고 그랬어요.”

옛날 기억을 떠올린 성준이 웃으며 얘기했다. “진짜 무섭게 혼내세요. 티브이(TV)에서 보던 그대로거든요. 퇴장도 자주 시켜요. 저도 한 번 당했어요.” 천 판사에게 호되게 혼나던 성준은 어느새 홈리스월드컵 국가대표 주장이 돼 팀을 이끌고 있다. “예전이라면 염려됐을 텐데 이제는 리더십도 생기고 성품도 좋아져서 충분히 잘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천 판사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성준은 이날 경기 내내 리더의 면모를 보였다. 같은 팀 선수가 실수하면 다독였고, 공격을 몰아칠 땐 뒤에서 응원의 말을 쉼 없이 내뱉었다. 골을 넣은 선수들에겐 먼저 가서 축하해줬다.

경기가 끝난 뒤 성준은 천 판사에게 특별한 선물을 전달했다. 홈리스월드컵 1차 합숙훈련 기간 토트넘 선수들과 만나 사인받은 유니폼이다. 아까울 만도 하지만, 성준은 그동안 받은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했다. “설날이든 추석이든 명절이면 늘 천 판사님이 챙겨줬어요. 저희 친구들끼리 맛있는 거 먹으라고 용돈을 주셨거든요. 최근엔 미국도 데려가주셨고요. 꾸준히 받기만 해왔어요. 이젠 도와주신 만큼 보답해드리고 싶어요.”

부산=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21토크ㅡ한겨레21 표지 기사의 뒷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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