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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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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괴롭힘인가 vs 왜 괴롭힘이 아닌가

[직장내괴롭힘금지법 시행 5년]
‘판단 요건 강화 필요하다’ 쪽과 ‘지금은 문턱 높이는 대신 적용 대상 늘려야 할 때’ 입장 엇갈려
등록 2024-08-03 11:59 수정 2024-08-07 11:30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개정된 2021년 10월14일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직장갑질119가 거리투표 행사를 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개정된 2021년 10월14일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직장갑질119가 거리투표 행사를 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직장 내 괴롭힘의 법률적 정의는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다.

일명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으로 불리는 개정 근로기준법 제76조의 2(직장 내 괴롭힘의 금지)와 제76조의 3(직장 내 괴롭힘 발생시 조치)의 시행 5주년이 지난 지금, 심호흡 한 번으로 읽어낼 수 있는 저 조문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드높다. 개념적으로 얘기하면 모호성이고, 직관적으로 얘기하면 ‘무엇이 직장 내 괴롭힘인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의문형으로 바꾸면 ‘이것이 왜 괴롭힘인가?’이다.

지속·반복성 추가 필요 vs 문턱 높아져

다른 한쪽에서는 거울상처럼 대칭되는 목소리가 크게 울린다. ‘이것은 왜 괴롭힘이 아닌가?’ 이 목소리가 개념의 모호성은 겨냥하지 않는 점도 작지 않은 차이다. 전자는 법의 오남용에, 후자는 법의 사각지대에 각각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차이는 한층 도드라진다. 둘 다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문제이기는 하다.

전자의 목소리는 주로 정부와 재계, 그리고 일부 학계를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주장은 ‘직장 내 괴롭힘의 판단 요건을 강화해야 한다’로 집중된다. 서유정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연구위원도 비슷한 입장이다. 직장 내 괴롭힘의 성립 요건에 ‘지속·반복성’이 추가돼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동일 집단에 대한 패널 연구 등을 통해 지속·반복성의 판단 기준도 구체적으로 검토했다.

“대부분의 행위에 대해서 일관되게 주 1회 이상 반복돼야 한다는 기준이 확인됐다. (…) 지속성에 대해서는 행위 유형별로 1개월 이상(폭력, 폭언, 성희롱), 2개월 이상(성과 가로채기, 불필요한 야근 강요, 개인적 업무 지시 등), 3개월 이상(차별대우, 회식 참석 강요, 중요한 정보 공유와 의사 결정 과정에서 배제 등)으로 나뉘었다.”(서유정·김종우, ‘직장 내 괴롭힘 성립기준 및 사업장 모니터링 체계 구축 연구’, 2023년 7월)

후자의 목소리는 직장 내 괴롭힘 관련 활동을 하는 전문가들이 주로 내고 있다. 김동현 변호사(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는 지속·반복성을 추가하자는 주장에 “실체적·절차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 판단의 문턱을 높이려는 의도”라며 “괴롭힘에 대한 개념이 어느 정도 모호한 건 사실이지만, 직장 내 성희롱 관련 법규가 그랬듯이 명료함은 법조문이 아니라 판단 기준과 해석례가 풍부하게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 변호사는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190호(‘일의 세계에서 폭력과 괴롭힘의 근절에 관한 협약’)가 지속·반복성을 명시적으로 ‘배제’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협약 190호는 폭력과 괴롭힘에 대해 “일회성인지 반복적인지와 무관하게 신체적·정신적·경제적·성적 피해 야기를 목적으로 하거나, 피해를 초래하거나 초래할 개연성이 있는 용납되지 않는 행위나 관행 또는 위협”으로 정의하고 있다. 2019년 만들어진 협약 190호는 국제노동기구 187개 회원국 가운데 44개국이 비준했다. 한국에서도 노동계와 시민사회의 비준 요구가 날로 커지고 있다.

갑질에서 안전으로… 패러다임 전환 촉구

이 대목에서 문득 궁금해진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개념적 모호성에는 부정적인 면만 있을까? 미처 생각지 못한 미덕도 있지 않을까? 관점을 바꾸면 훨씬 너른 시야가 열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상담 신청을 하는 이들 가운데 직장 내 괴롭힘의 개념을 정확히 아는 경우는 드물다. 성희롱을 당했다며 괴롭힘 상담을 신청하고, 임금체불을 당했다며 신청하기도 한다. 자신이 겪은 부당한 처우가 무엇이다 하고 규정하지 못하던 이들이 일상의 감각인 ‘괴롭힘’을 통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부당함에 맞서는 보편적 권리의식과 행위의 대문 역할, 노동기본권이나 다른 인권과 연결되거나 그쪽으로 건너가는 다리 역할도 하고 있지 않은가.”(직장갑질119 윤지영 대표와 배가영 상근 활동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 대한 불만은 사실 ‘왜 괴롭힘인가’ 쪽보다 ‘왜 괴롭힘이 아닌가’ 쪽이 훨씬 강하다. 불만은 짤막한 조문이 아니라, 5년 전의 입법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 관료들보다 한층 노골적인 사용자의 책임회피와 제도 왜곡·악용으로 향한다. 2024년 7월15일 국회에서 열린 ‘직장 내 괴롭힘 패러다임의 전환: 갑질에서 안전으로’ 토론회에는 일선에서 직장 내 괴롭힘 상담과 조사 활동을 하는 노무사들이 발제자로 나섰다. 한 노무사가 이렇게 말했다.

“신고하는 순간, 피해자에게는 지옥문이 열립니다.”

직장갑질119의 익명 오픈 채팅방에 올라온 사연들. 직장갑질119 제공

직장갑질119의 익명 오픈 채팅방에 올라온 사연들. 직장갑질119 제공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윤지영 대표는 “법에는 피해자에게 불이익한 조처를 하면 안 되고 각종 보호 조처를 해야 한다고 돼 있지만, 신고자가 고립되거나 2차 피해를 보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은 당위적인 선언만으로 턱없이 부족하다”며 “사용자가 시늉만 하면서 교묘하게 의무를 회피하거나 외려 악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보니 피해자로서는 신고하면 제 발로 나가야 할 수도 있겠다고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배가영 활동가도 “채팅 상담을 할 때 ‘신고하세요’라고 권하는 게 정말 좋은 상담일까 늘 고민할 수밖에 없다”며 맞장구쳤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의 핵심 취지는 ‘사람 관계가 안전한’ 일터를 만드는 것이다. 안전한 일터를 만드는 일은 사용자가 아니면 어렵다. 이 법이 사용자에게 포괄적 의무를 부여하는 구조로 돼 있는 이유다. 근로기준법 제76조의 3 제2항은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접수하거나 발생 사실을 인지한 사용자는 지체 없이 당사자 등을 상대로 사실 확인을 위한 조사를 하도록 못 박고 있다. 제4항과 제5항은 피해자와 행위자에 대해 사용자가 적절하고 필요한 조처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사용자가 법 취지에 맞춰 충실히 역할을 해야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업주 ‘셀프 조사’ 못하게 했지만…

법조문 너머의 현실은 사뭇 살풍경이다. 사용자에게 주어진 포괄적 의무가 사용자의 권한이나 재량으로 오인되고 있지 않은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사용자 또한 언제든지 괴롭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더하다 . 더구나 가해자인 사용자의 ‘셀프 조사’도 가능한 구조다. 직장갑질119의 직장 내 괴롭힘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 가해자가 사용자이거나 사용자의 친인척인 비율은 20 %대에 이른다 .

고 용노동부는 2021년 에 만든 지침에서 가해자가 사업주나 경영 담당자, 그의 혈족이나 인척인 경우 노동부가 직접 조사한다고 규정했다 . 그러나 2022년에는 사업장 에서 자체 조사하도록 지도하되 근로감독관이 조사를 병행할 수 있도록 변경했다 . 노동부 관계자는 7월15일 토론회에서 “사용자의 괴롭힘 사건도 사업장 내 자체 조사 ‘의무 ’가 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었다”며 “지금은 사업장 자체 조사와 별개로 노동청 신고 즉시 근로감독관이 조사에 착수하도록 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

하지만 괴롭힘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고용노동청이 외려 2차 가해를 하기도 한다. 다음은 7월15일 국회 토론회에서 김유경 노무사(노무법인 돌꽃)가 공개한 제보 사례다.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씨×× ’ ‘××년’ 같은 욕설을 수차례 하고 , 부당한 서약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고, 부당하게 업무 배제를 명령했던 ‘ 비교적 명백한 ’ 괴롭힘 사건이 있었다 . 녹취록 등 증거자료도 명백했다 . 노동자가 노동청에 신고하자 담당 근로감독관이 ‘ 인정되기 힘들다 ’ 면서 취하서를 내밀었고 , 취하를 거부하자 눈앞에서 취하서를 찢었다 . 국민신문고에 신고했으나 담당 근로감독관은 교체되지 않았고, 사건은 결국 불인정으로 결론 났다. 근로감독관에게 불인정 사유를 묻자 ‘ 근로자가 사용자에게 따졌기 때문 ’ 이라고 했다.”

이렇듯 사용자와 정부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취지를 형해화하면서 외려 법이 오남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본말전도라고 할 수 있다. 제도가 오남용될 수 있는 음습한 조건을 사용자와 정부가 스스로 배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서유정 연구위원의 문제의식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직장 내 괴롭힘 성립 요건 강화와 별개로 사용자의 책임성 강화도 제안한다. 서 연구위원은 “외국에서는 사용자가 가해 행위를 하는 경우가 드물다”며 “사용자에게 직원에 대한 보호 의무를 강하게 적용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오남용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사용자에 대한 교육과 노동자에 대한 교육을 동시에 크게 강화해야 한다”며 “특히, 노동자들에게는 괴롭힘 증거를 수집하는 교육이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법 적용 사각지대 해소가 가장 시급

법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제도적 보완 과제다.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은 “이미 국가인권위원회와 국회 입법조사처가 21대 국회 때 5명 미만 사업장과 원청 등 특수관계인의 사각지대 해소를 권고했고 관련 법안도 발의됐으나 임기 종료와 함께 모두 폐기됐다. 22대 국회에도 여러 법안이 발의된 상태”라며 “지금은 문턱을 높일 때가 아니라 적용 대상을 크게 늘리기 위해 국회 캐비닛을 열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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