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어디세요?”
1998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아마르티아 센(91)은 이런 질문이 기다리는 정답을 배반하듯이 되묻는다. “왜 하나의 장소여야 하는가?” 센은 ‘단 하나의 무언가’를 이끌어내려는 질문의 부당함을 말한다. 정체성은 단일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단 하나의 정체성 때문에 벌어지는 폭력은 인류가 겪게 된 커다란 불행의 씨앗이라는 점을 그는 어린 시절 참혹한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김승진 옮김, 생각의힘 펴냄)은 평생 빈곤, 불평등, 정의, 자유라는 문제에 천착한 인도 벵골 출신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의 회고록이다. ‘경제학계의 마더 테레사’라 일컬어질 정도로 억압받는 계급과 정체성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센의 생애를 관통한 세계사와 개인사를 소개한다.
센은 1933년 인도 동북부에 있는 서벵골주 산티니케탄의 부유한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옛집은 ‘세계의 오두막’이라는 뜻을 가진 ‘자가트 쿠티르’라 불렸다. 센의 외가는 오래전부터 인도의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가까웠다. 센이 태어났을 때 산스크리트어로 ‘불멸’을 뜻하는 ‘아마르티아’라는 독특한 이름을 지어준 것도 타고르였다. 센은 이성과 자유에 관한 타고르의 사상을 존경했다.
어린 시절 센은 3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1943년 벵골 대기근을 목격했다. 굶주림에 울부짖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는 평생 잊지 않았다. 아기를 안은 엄마가 굶어 죽어가는 아이의 입보다 자신의 입에 먼저 음식을 집어 넣으며 스스로 인간이 아니라고 울부짖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어느 무슬림 노동자가 힌두교도의 칼에 찔려 센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대기근에 관한 강렬한 경험은 센을 동정과 자비심이 충만한 경제학자로 성장시키는 바탕이 됐다.
경제학자로서 센은 기아가 가난한 사람들이 시장에서 충분한 식품을 구매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임을 밝혔다. 기근의 문제는 ‘총식품량’이 아니라 각 가정의 ‘식품 접근 역량’ 때문에 생긴다는 얘기다. 벵골 대기근에서 피해를 본 집단은 농촌 노동자들이었고, 이를 제대로 보도하지 못한 언론의 부자유와 소통의 제약이 가진 파괴적 구실이 컸다고 그는 설명한다.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가 빈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서방세계에 잘못 알려진 인물들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다. 센은 마하트마 간디보다 타고르가 이성과 합리성에 관한 한 훨씬 설득력 있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고 본다. 또 서구인들이 가진 타고르의 이미지에 맹목적인 신비주의가 들씌워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유럽에서 타고르는 폐허에서 인류를 건져낼 구원의 메시지를 가진 동방에서 온 현인으로 여겨졌고, 예이츠가 타고르의 시를 완전히 신비주의적인 의미를 가진 작품으로 묘사하면서 왜곡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군부 통치에 저항한 아웅산 수치의 정치적 리더십에 끔찍한 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로힝야족을 도우려는 의지가 없었던 점 때문이다. 센은 버마 군부가 강도 높게 수행한 프로파간다 때문에 수치가 소수집단에 대한 비방을 막을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쳤다고 본다. 이처럼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특정 집단에 대한 선택적 증오가 생겨나고 있으며 타이밍과 현실성의 문제가 점점 더 중요한 이슈가 돼가고 있다고 전한다.
센은 세계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없애고자 하는 좌파의 대의에 깊이 공감했지만 권위주의와 정치적으로 교조적인 측면에 회의를 느끼면서 마르크스주의와 거리를 뒀다. 마르크스가 가졌던 자유에 대한 강한 관심에 견줘 현실 공산당 운동은 늘 개인의 자유에 그보다 덜 공감했다는 점도 비판한다.
어린 시절 힌두-무슬림 폭동을 보면서 집단정체성이 수행하는 파괴적 역할을 평생 비판해온 센은 2020년대 이후 종교적 구분선을 따라 벌어지는 정체성 분쟁에 대해 크게 우려한다. 시민권, 거주지, 언어, 직업, 종교, 정치 성향 등 많은 정체성은 우리 안에서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고 각자를 자신이 되게 해준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역과 시대의 경계를 넘어 타인에게 본능적으로 공감하고 합리적인 논증으로 설득을 멈추지 않는 일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할 열쇠로서 희망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한다. 648쪽. 3만3천원.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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