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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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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암 수증기 마시며 일한 뒤 백혈병 걸렸다”

‘영풍문고’ 영풍그룹 석포제련소 하청노동자 진현철씨, 몸무게 26㎏ 빠지고 급성 백혈병 진단에도 산재 아니라던 공단 판정 뒤집고, 재판에서 인정받아
등록 2023-12-01 12:27 수정 2023-12-15 06:31
2023년 11월27일 영풍석포제련소에서 6년9개월을 일한 뒤 백혈병에 걸린 진현철(72)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요양불승인처분 취소소송 1심에서 승소했다. 류우종 기자

2023년 11월27일 영풍석포제련소에서 6년9개월을 일한 뒤 백혈병에 걸린 진현철(72)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요양불승인처분 취소소송 1심에서 승소했다. 류우종 기자

‘노느니 뭐라도 해보자’며 시작한 일이었다. 56살에 광부를 명예퇴직하고 새 직장을 찾던 차였다. 제련소 일이 그리 내키진 않았지만 지인의 계속된 권유로 출근하게 됐다. 그곳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릴 것이라고 진현철(71)씨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2023년 11월22일, 경북 봉화 영풍석포제련소 하청노동자 진씨가 백혈병 산업재해(산재)를 법원에서 인정받았다. 2년 전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 신청이 기각됐으나 법원은 진씨 손을 들어줬다. 그간 석포제련소에서 지난 4월 소음성 난청에 대해 산재가 인정됐지만 백혈병이 인정된 건 처음이다. 11월26일 <한겨레21>이 강원도 태백시 진씨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많이 마시면 뼈가 녹는다’는 경고판

포름알데히드·황산·카드뮴·라돈·납…. 진씨가 일했던 영풍석포제련소에서 검출된 발암물질이다. 영풍석포제련소는 대형서점 ‘영풍문고’로 유명한 영풍그룹이 운영하는 아연 제련소로, 고려아연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크다. 2022년 기준 연매출은 1조7천억원, 총 직원 수는 1천여 명에 이른다. 사무직을 포함한 원청 직원이 580여 명, 하청업체 직원이 640여 명으로 하청 인원이 조금 더 많은 구조다.

진씨는 2009년 12월부터 2017년 2월까지 약 6년9개월(2011년 1∼7월은 제외)간 석포제련소 하청노동자로 일했다. 제련 과정에서 발생한 기계 내부의 불순물 찌꺼기를 긁어내는 일을 주로 했다. 그 과정에서 백혈병 유발 물질인 포름알데히드를 비롯해 각종 발암물질에 노출됐다.

“뜨거운 김이 이렇게 기계 안에서 바로 뿜어져 나와요. 그걸 마주 보면서 일해야 해요. 공장 한쪽에 ‘(공기를) 많이 마시면 뼈가 녹는다’는 경고판이 붙어 있어요. 회사가 준 방진마스크를 쓰긴 하지만 어차피 숨 쉬면 뜨거운 공기가 다 (코로) 들어가는 거예요. 냄새도 지독해요. 너무 (냄새가) 심해서 직원들이 일을 못할 때도 있었어요.”

이에 대해 제련소 쪽은 “(진현철씨) 소송 당사자가 아닌 관계로 소송 경과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면서도 “진현철씨가 일한 공정은 환기가 잘되는 구조였고, 하청업체 확인 결과 방독마스크도 정상적으로 지급됐다”고 밝혔다. 또 진씨가 언급한 경고판은 현장 확인 결과 존재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석포제련소에서 일한 이덕순씨가 보관 중이라며 꺼내온 방진마스크. 방독마스크가 아니어서 가스를 차단하는 필터가 전혀 없다. 신다은 기자

석포제련소에서 일한 이덕순씨가 보관 중이라며 꺼내온 방진마스크. 방독마스크가 아니어서 가스를 차단하는 필터가 전혀 없다. 신다은 기자

독한 화학물질 냄새에 적응하지 못한 신입들은 그만뒀고 오래 일한 직원들도 자주 결근했다. 진씨는 끝까지 버틴 것을 후회한다. “‘나도 안 했으면 될걸’ 그런 생각이 들죠. 다른 사람들은 다 그만뒀는데.”

2017년 2월, 진씨 몸에 이상 신호가 찾아왔다. 온몸에 힘이 없고 음식 먹기가 싫어졌다. “원래 대식가였는데 그때는 밥을 못 먹었어요. 회사에서 삼겹살 회식을 하는데도 전혀 손이 안 가고요. 죽을 쒀서 보온통에 담아서 먹는데 점점점점… 힘이 없어지더니 정말 죽기 직전까지 갔어요.” 회사에서 무거운 물건을 앞장서 내리던 진씨가 이제는 걷기도 힘들 지경이 됐다.

병원을 찾은 진씨 안색을 보더니 의사가 곧장 입원시키고 검사했다. 진단명은 급성 백혈골수암. 몸에 피가 돌지 않아 자꾸 힘이 없어지는 거라고 했다. 그길로 항암을 시작했다. 병실을 수없이 옮겨다니고 항암 부작용으로 손발 피부가 까질 때까지 꼬박 1년을 치료했다. 발병 전 104㎏까지 나갔던 몸무게는 항암 치료를 하며 78㎏까지 빠졌다. “사람들이 나보고 죽는다고, 다 죽는다고 했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동안 원청도 하청도 사업주의 연락은 없었다. “너무 괘씸했어요. 자기네 집에서 먹이던 개가 나가도 사람이 찾는데 그 사람들은 1년 동안 전화 한 통 없었습니다.”

영풍석포제련소 내부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한 퇴직자가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영풍석포제련소 내부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한 퇴직자가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1년 2회 안전 관리 측정에 포름알데히드 빠져

2019년 9월, 진씨는 자신의 병이 산재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다. 심사에만 꼬박 1년9개월이 걸렸다. 2021년 6월, 공단은 진씨의 산재 신청을 기각했다. 공단 산하 연구기관인 직업환경연구원이 석포제련소를 현장 방문해 포름알데히드 등을 검출했으나 “인체 노출 수준은 미미하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당시 산보연이 검출한 생산 현장과 직원 대기실의 포름알데히드 농도는 0.002∼0.005ppm 수준으로, 노동부가 정한 유해 노출 기준(0.3ppm)과 견줘 매우 낮았다. 이 보고서를 토대로 공단은 진씨 병이 직업병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진씨는 소송을 냈다. 공단 처분이 부당하니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이다. “소송에서 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너무 억울해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백혈병 산재를 전문적으로 다룬 임자운 변호사 가 연결됐다.

진씨와 임 변호사는 연구원 보고서가 평상시 노동 환경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연구원이 제련소를 방문한 횟수가 2021년 2월 단 한 차례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측정 일정과 방법을 제련소 쪽에 미리 알렸기 때문에 사업주가 측정값이 낮은 환경을 만들 수 있었다고 봤다. 또 작업 방식에 따라 노동자가 포름알데히드 등에 일시적으로 고농도 노출됐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진씨는 아연 찌꺼기가 딱딱하게 굳으면 기계 안쪽으로 허리를 굽혀 찌꺼기를 긁어내야 했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발암물질이 녹아 있는 수증기를 자주 마셨다.





진씨 쪽은 직원 대기실에서 포름알데히드가 검출된 사실도 지적했다. 직원들이 일하는 공간을 벗어나서도 포름알데히드가 검출될 정도면 업무공간에선 직원들이 해당 물질에 더 자주 노출됐을 것이란 주장이다. 석포제련소 쪽은 평상시 공장 내 포름알데히드가 있는지 따로 추적·관리하지 않았다. 석포제련소를 1년에 2회씩 정기 방문해 안전 관리 수준을 측정하는 민간기관의 작업환경 보고서에는 포름알데히드가 아예 측정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제련소는 포름알데히드가 관리 대상에서 빠진 이유에 대해 “포름알데히드는 공정에서 취급하는 원료·부원료에 포함되거나 반응으로 생성되는 물질이 아니어서 유해인자로 지정·관리하지 않고 있다”며 “작업환경 측정 대상은 용량비율 1% 이상 함유한 혼합물을 사용하는 경우인데 그런 혼합물이 없어 측정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임자운 변호사는 “이 사안의 핵심은 노동자 건강에 유해한 물질을 관리 대상에서 놓쳤다는 것”이라며 “법적 의무냐 아니냐만 따지면 노동자 건강 보호에 필요한 여러 조치를 논의하기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2019년 경북 봉화 석포 영풍제련소 전경. 한겨레21 김진수 기자

2019년 경북 봉화 석포 영풍제련소 전경. 한겨레21 김진수 기자

측정기 왜 힘들게 차느냐

진씨가 소속된 석포제련소 하청업체 쪽도 진씨의 병이 산재가 아니라면서 “작업 강도가 약해 고령(자) 근로도 가능한 작업장에서 백혈병이라는 병이 발생할 수 없다고 본다”는 의견서를 냈다. 또 ‘귀사에 백혈병과 관련된 유해물질이 있다면 물질명을 알려달라’는 공단의 질의에도 ‘없음’이라고 답했다. 아연을 취급하는 현장이라 카드뮴 등 발암물질로 분류되는 중금속이 많은데 하청업체는 이런 물질을 하나도 적지 않았다.

법원은 진씨 쪽 주장을 받아들였다. 판결문을 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단독 손혜정 판사는 △노동부 기준에 미달한다는 이유만으로 인체 영향이 미미하다 단정할 수 없고 △포름알데히드는 백혈병 관련성이 의학적으로 확인된 물질이며 △고용노동부가 2014년 석포제련소에서 300건 넘는 법 위반을 적발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진씨가 근무한 기간 유해물질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또한 진씨는 3조 3교대로 1주 평균 7일씩 휴일 없이 근무하는 등 제련소에 머무른 시간도 길었다. 손 판사는 “원고(진현철씨)가 근무 전에 건강에 별다른 이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백혈병과 관련된 유전적 소인, 병력이나 가족력도 전혀 없다”며 백혈병과 진씨 업무의 연관성을 인정했다.

영풍석포제련소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은 진현철씨가 12월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영풍석포재련소 노동자 사망사건 관련 긴급기자회견에서 당시 작업환경 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한겨레 윤운식 선임기자

영풍석포제련소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은 진현철씨가 12월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영풍석포재련소 노동자 사망사건 관련 긴급기자회견에서 당시 작업환경 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한겨레 윤운식 선임기자

진씨는 현직으로 일할 때 석포제련소가 유해물질 측정값을 낮게 매기려 ‘꼼수’를 쓰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측정기관 사람이 나와서 ‘(유해물질) 측정기 차고 일하라’고 하는데요. 제가 측정기를 차고 있으면 회사(제련소)에서 전화가 와요. ‘그걸 뭐 하러 힘들게 차느냐, 교대할 때 달라’고 하죠. 그렇게 나오는 검사 결과가 정말 (실제) 검사 결과일까요? 회사에서 일감을 받는 평가기관이 피라미 한 마리인 날 위하겠어요, 아니면 자기들에게 일감을 주는 회사를 위하겠어요?” 2019년 석포제련소는 오염물질 농도 측정업체와 공모해 관련 수치를 1800여 건 조작한 사실이 적발돼 형사조치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제련소 쪽은 “외부 기관 방문에 대응해 격무를 안 시키거나 측정기 반납을 권유한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과 다르며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관련 기관이 현장 점검 및 측정할 시에는 안전 및 환경관리팀 법정관리자가 안내 및 동참하고 있다”고 밝혔다.

발병 뒤 6년 만에야 진씨는 법원에서 산재를 인정받았다. 절차가 기약 없이 길어지자 그는 거의 포기 상태였다고 한다. 아들이 전화를 걸어와 승소 소식을 알렸던 날도 “어리벙벙”할 뿐이었다.

요 며칠 변화를 느낀 건 입맛이다. 승소 소식을 들은 뒤 음식을 부쩍 잘 먹었다. 보는 사람마다 “살이 붙었다”며 덕담했다. 홀쭉해진 뒤 안 차던 시계를 오른팔에 다시 차보니 시곗줄이 빡빡하게 느껴졌다. 진씨는 몸의 변화가 기분 좋았다.

영풍석포제련소 백혈병 산재 인정을 받은 진현철씨 사건 개요

영풍석포제련소 백혈병 산재 인정을 받은 진현철씨 사건 개요

진씨가 꼭 이기고 싶었던 이유

다만 근로복지공단이 항소하면 진씨는 다시 기나긴 법정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공단 쪽은 법무부 지휘를 받아 항소 여부를 검토 중이다.

진씨는 석포제련소에서 일하다 다치거나 병든 사람이 자신만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 마을에 저 말고도 아픈 사람이 많았어요. 화상 입고 발등 다 까진 채로 출근한 사람, 몸에서 화학물질 나와서 입원한 사람 등 많았죠. 그런 사람들도 산재 신청을 해보다가 너무 오래 걸리고 가망도 없으니까 포기하고 떠난 거죠. 다들 힘도 없고 순진한 시골 양반들이에요. 일하다 병들어도 그저 ‘내가 나이 들고 힘없어서 죽는가보다’ 생각하죠. 그래서 저는 꼭 이기고 싶었어요. 제가 승소해야 그분들도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태백=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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