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유언장을 써둬야 하지 않을까?” 지난해 가을, 낙엽 지는 수목원에서 사목(死木) 여러 그루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말했다. 죽은 나무 또한 탄소를 저장하거나 작은 생명체에게 보금자리가 되는 등 숲의 일원으로서 삶을 이어간다는 사실에 감동하던 차였다.
유언장이란 일상에서 떠올리기엔 낯선 단어지만, 죽음 이후를 고민하기에 이른 때는 없다. 특히 비혼이거나 퀴어라면 죽음 뒤에도 자신답게 기억되고 영향을 미치기 위해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가족구성권연구소가 2009년 발행한 <‘비정상’ 가족들의 ‘비범한’ 미래기획: 찬란한 유언장>에서는 유언장의 의미를 이렇게 소개한다.
“유언장은 죽음 뒤 발자취를 본인 스스로가 결정하는 중요한 문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정상가족제도 때문에 차별받고 혼란스러워하는 정상가족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은 구성원의 죽음에 직면할 시에 장례 절차뿐만 아니라 상속문제 등 여러 문제에서 혈연가족이 아니라는 것으로 배제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유언을 통해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막연한 고민을 구체화해주는 도구이자 그 자체로 법적 효력이 있는 문서를 써보기로 했다. 변호사 지인을 비롯한 사람들을 모아 집에서 작은 워크숍을 열었다. 빵과 과일, 따뜻한 차를 두고 앉아 워크숍에 참여한 이유를 나누고 유언장의 구조, 효력 발생의 조건과 한계에 대한 강의를 들은 뒤 거실과 부엌 여기저기 흩어져서 각자의 유언장을 적었다.
나는 가장 먼저 작고 귀여운 재산 목록을 만들었다. 반려견 또한 현행법에 따라 일단은 동산 항목 중 하나에 올려야 했다.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조항을 신설하는 민법 개정안이 아직도 통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내 유언을 집행해줄 사람을 지정한다. 나는 같이 사는 친구들 이름을 적었다. 내 ‘유언집행자’들을 생각하니 든든했다. 생전의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기억하는 사람 중 이 고생스러운 일을 기꺼이 맡아줄 사람. 나 또한 그들의 유언집행자가 되기로 했다.
원죄처럼 지고 다니는 첼로, 사진 몇만 장, 옷과 책, 쓰다 만 글과 받은 편지들, 심지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의 아이디와 비밀번호까지. 누군가에겐 쓰레기일 수도, 의미 있을 수도 있는 물건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어떤 것은 개별적으로 또 어떤 것은 포괄적으로 ‘유증’하겠다고 자필로 적어나간다.
원하는 장례 방식도 덧붙인다. 영정사진이 따로 없을 때 SNS 프로필 사진 중 유언집행자들이 보기에 나은 것으로 써달라 했다(앞으로 프로필 사진을 더욱 신중하게 고를 것이다). 장례식장 음식은 비건으로 부탁했다. 옆 사람의 것을 커닝해 주검은 대학병원에 기증했고, 화장 뒤 유골은 영산강에 뿌려지고 싶다. 그러고도 무언가 빠진 듯했는데, 천주교 장례예식에 따라 미사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성당에서 오르간 반주를 하며 생전에 몰랐던 분들의 장례미사에도 참석해봤는데, 그때마다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깨달음이 진실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유언장을 쓰며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하는 거야말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장 실감 나게 고민하는 시간이다. 내가 맺은 관계를 돌아보며 무엇을 누구에게 주고, 누구에게 내 죽음을 알리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건 정말이지 머리 아픈 일이었다. 너무 비장해질까 걱정했는데 모두가 흰 종이와 펜을 쥔 채 머리 싸매고 있는 게 시험 치는 학생들 같아서 웃겼다.
자기 자신인 채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행운이 모두에게 주어지길 바란다. 우리의 삶이 이어진 만큼 죽음도 서로 이어져 있으니까.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 마주한 다음 문장을 되새긴다. “끝까지 나답게 살다가 아는 얼굴들 사이에서 죽고 싶다.”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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